
포스코인터 12년 근속, 나는 오늘 회사에서 준 '영원한 영광'을 분리수거장에 버렸다.
새해를 맞아 대청소를 시작했다. 송도의 바람은 늘 차갑지만, 오늘따라 유독 살을 파고든다. 그리고 나는 지금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장 앞에 섰다. 내 손에는 묵직하고 차가운 금속판 두개가 들려 있다.
하나는'10년 근속 표창.' 또 다른 하나는 근로표창.
이 쇳덩어리 두 개가 내 20대와 30대, 그 피 끓던 12년의 무게란 말인가.
4년 전, 입사 10주년이 되던 날 회사는 나에게 이 표창을 주며 말했다.
"이것은 포스코의 강철로 만들었습니다. 특수 컬러 인쇄를 입혀 절대 지워지지 않고, 영원히 녹슬지 않습니다(Stainless). 회사는 귀하의 노고를 영구히 기립니다."
'영구히(Permanently).'
그 단어가 퇴사를 앞둔 당시, 내 목을 조르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나의 첫 직장인으로서 직무는 포스코인터내셔널의 상사맨이었다. '미생'의 오 차장처럼 눈이 벌게지도록 모니터를 노려봤고,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와 1원이라도 더 깎기 위해 새벽잠을 설쳤다. 어떤 날은 환호했고, 어떤 날은 화장실 변기에 앉아 소리 없이 울었다. 이후 그룹연수원에서 교육담당/사내강사를 하고, 글로벌 HR, ,ESG,업무를 거쳤다. 내 12년은 첫 사회경험의 설레임, 인간관계, 때론 상처와 후회, 성취와 실패가 뒤섞인 '얼룩(Stain)' 투성이였다.
그리고 그 얼룩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런데 회사가 준 이 표창장은 너무나 매끄러웠다.
스테인리스(Stainless). 얼룩 하나 없는 이 완벽한 금속판.
거울처럼 반짝이는 표면에 내 얼굴이 비친다. 하지만 그 안에는 송도의 안개 낀 사무실에서 느꼈던 그 치열했던 공기도, 동료들과 나누었던 뜨거운 믹스커피(사실 투썸커피)의 온기도 없다.
그저 차갑고 매끈한, 회사가 바라는 '이상적인 부속품'으로서의 나만 박제되어 있을 뿐이다.
짐을 정리하며 수십 번 고민했다.
'그래도 10년 근속인데, 기념으로 가져가야 하지 않을까?'
'나중에 자식에게 보여주면 자랑스럽지 않을까?'
아니었다. 이걸 집에 두면, 볼 때마다 나는 과거의 영광을 '소유'하려 드는 꼰대가 될 것 같았다. 마치 서울자가에대기업다니는 김낙수 부장이 그랬던 것처럼.
이 차가운 물성에 갇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꾸만 뒤를 돌아볼 것 같았다.
그래서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하지만 세계적인 철강회사 답게 포스코의 강철은 버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나무 받침대를 뜯어내고, 붙어 있는 금속판을 힘주어 떼어내야 했다. 틈새를 벌리며 낑낑거렸다.
마치 지난 12년간 회사와 얽히고설킨 내 인생의 매듭을 하나하나 강제로 끊어내는 기분이었다.
'우지끈-'
드디어 금속판이 액자에서 떨어져 나왔다.
날카로운 가장자리가 드러난 스테인리스 판.
내 이름 석 자와 근속년수, 그 건조한 팩트만이 적힌 얇은 판.
재활용 집하장의 고철 수거함 앞.
심호흡을 한번 했다. 그리고 미련 없이 손을 놓았다.
'깡-그랑-!'
스테인리스 판이 다른 고철들과 부딪히며 날카롭고도 경쾌한 파열음을 냈다.
옆에 놀이터에서 노는 주변 아이들이 나를 깜짝 놀라 쳐다봤다.
하지만 그 소리가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소리처럼 들렸다.
과거와의 완벽한 단절(Disconnection)을 알리는 타종.
그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깨달음이 스쳤다.
내가 버린 것은 내 커리어가 아니었다. 나는 단지 '물건'을 버렸을 뿐이다.
회사가 주려던 '영속성'은 저 쓰레기통에 처박힌 쇳덩이에 있는 게 아니었다. 진짜 남은 것은, 진짜 녹슬지 않는 것은 내 안에 있었다.
신입 시절 맨땅에 헤딩하며 뚫어냈던 첫 거래처의 기억.
불가능해 보이던 프로젝트를 끝내 성사시켰을 때의 전율.
힘들 때 말없이 어깨를 두드려주던 선배의 손길(발로는 정강이를 차면서). 여러 국가를 돌아다니며 출장 다니던 기억과
이제는 세계 어디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상사맨'으로서의 야생 본능.
이것들은 스테인리스처럼 매끄럽지 않다. 투박하고, 여기저기 찌그러져 있고, 손때가 묻어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살아있다. 내 뇌세포 속에, 내 근육 속에, 내 심장 속에 각인되어 영원히 나와 함께 숨 쉴 것이다.
2023년 6월 24일, 포스코인터에서의 미지막 날을 다시 곱씹어본다. 퇴사하던 나는 당시 무거운 상패 포함 12년간 쌓아온 많은 짐들이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박스 하나로 퇴사하는 (그리고 화분 하나) 느낌이 아니었다. 짐 때문에 두 손은 무거웠었다. 하지만 내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던 것 같다.
퇴사후 3년이 지난 나는 아직 살고 있는 포스코 직원 아파트에서 물질적인 '표창'을 포스코에서 지어준 아파트 분리수거장에 버리고 비물질적인 '긍지'를 챙겼다.
물리적인 것은 언젠가 짐이 되지만,
추억과 커리어는 나를 날게 하는 날개가 된다.
포스코 다시 한번 안녕.
나의 20대와 30대, 안녕
녹슬지 않는 표창장보다, 닳고 닳아 굳은살이 박인 내 두 손을 믿으며 나는 오늘, 진짜 세상으로 퇴근한다.
이 글은 포스코의 12년을 추억하며 작성한 글로 절대 아내의 서재 정리 빨리 하라는 구박을 피해서 쓴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