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g)
AI 시대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자주 “기술”을 먼저 떠올립니다. 하지만 제가 요즘 더 강하게 체감하는 변화는 기술이 아니라 정체성의 무게중심입니다.
예전에는 직위가 나를 설명해줬습니다. 팀장, 부장, 임원… 조직 안에서 직함은 곧 신뢰의 약속처럼 작동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다릅니다. 경량문화라는 말이 딱 맞습니다. 무엇이든 가볍고 빠르게 바뀌고, 소유보다 경험이, 고정된 소속보다 유동적인 연결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 흐름 속에서 직위는 점점 “무거운 갑옷”이라기보다 “얇은 라벨”이 됩니다.
그래서 질문이 바뀝니다.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가 아니라,
“조직이 제거된 상태에서도 나는 어떤 가치를 주는가?”로요.
송길영 박사님의 [시대예보:경량문화의 탄생] 책에서 이런 취지의 질문을 읽고 마음이 오래 머물렀습니다.
내 도메인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AI 시대에 어떻게 꽃피울 것인가?
나는 어떤 형태의 풍요로움에 기여할 것인가?
이 질문이 무섭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상하게도 기회처럼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답이 “직위”가 아니라 “기여”에 있기 때문입니다. 기여는 회사에 남아도 만들 수 있고, 회사를 떠나도 만들 수 있습니다. 기여는 내가 들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IT 조직에서 1년을 보내고 HR로 복귀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화려한 부활”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HRD 팀장 자리가 공석이 되면서, 급하게 다시 초청(?)을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그때의 HRD는 말 그대로 초토화였습니다. 구성원들이 줄줄이 퇴사하고, 팀장까지 공석인 뒤였습니다. 자리는 남아 있는데 사람이 없었고, 해야 할 일은 늘어났습니다. 조직이 무너졌다는 건, 업무가 많다는 뜻이 아니라 신뢰와 리듬이 사라졌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조직 재건”을 혼자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부터 다시 세워야 했습니다. 신규 채용이 어려운 회사 사정 속에서, 내부에서 교육 업무를 해봤던 사람들, 교육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스카웃 제안을 했습니다.
합숙 교육 기간에 많은 직원들과 저녁에 진솔하게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유독 교육부서에 대해 궁금해하던 한 직원이 떠올랐습니다. 전화를 걸기 전까지도 망설였습니다. “내가 지금 이런 제안을 해도 될까?”
다행히도 그 친구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우리는 함께 조직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5년이 흘렀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쏟아부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잘 굴러가기 시작한 조직에서 매너리즘이 찾아왔습니다. 잘 돌아가는데 마음은 마르기 시작하는 순간. 이게 경력의 아이러니입니다. 성과가 안정되는 순간, 성장은 멈춘 듯 느껴집니다.
저는 AI 시대에 HR Analytics를 제대로 해보고 싶었습니다.
조직진단 결과를 더 정교하게 해석하고, 인사제도 변화가 조직 만족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보고 싶었고, 퇴직 예측의 신호를 설계해보고 싶었습니다. HR Analytics 대시보드도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간단했습니다.
HRD 부서에는 HRM 데이터가 공유되지 않았고, 접근 권한도 없었습니다.
저는 상사에게 여러 차례 면담을 요청했고, 결국 올해 HR Analytics 부서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원하던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회에는 늘 ‘대가’가 붙어 있더군요. 보직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리더였다가 실무자가 되어 팀원들과 “동료”가 되는 경험.
대한민국 조직 문화에서 이건 생각보다 훨씬 큰 사건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괜찮았습니다. 제가 선택한 길이니까요. 하지만 주변이 더 불편해했습니다.
나이와 직위가 있는데 직책이 없다는 사실이, 조직 안에서 이렇게 큰 의미인지 저는 몰랐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후회가 올라왔습니다.
“진짜 내가 원한 게 이거였나?”
“왜 이렇게까지 내려와야 하지?”
그 감정이 비정상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상승”을 성장으로 배워왔으니까요. 내려오는 걸 성장으로 해석하는 법을 배운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한 번의 경험이 있었습니다.
좌천처럼 보였던 시간이, 시간이 지나 내 편이 되어 돌아온 경험.
그 나비효과가 제 커리어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은 너무 힘들지만 이번 선택도, 언젠가 의미를 만들 거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막상 HR Analytics로 이동하고 나니, 제 일상이 놀랍게도 달라졌습니다.
리더로서 참여하던 회의, 보고자료 만들기, 강의와 출장, “사람 일”로 채워지던 시간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오롯이 분석 업무에 집중할 시간이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나 한가하지?”
네, 일이 줄어든 건 맞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업무량”이 줄었다기보다 분산되던 에너지가 하나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실제로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났습니다.
조직진단 결과의 정교한 해석
인사제도·정책 변화가 직원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 분석
퇴직 예측 모델 설계의 기초 구조화
HR Analytics 대시보드 구상과 개발
이건 리더의 일이 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어떤 시기에는 “리더십”보다 “몰입”이 더 강력한 성장 엔진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AI 시대에는 그 몰입이 더 큰 의미를 가집니다. AI는 ‘내가 생각한 것’을 빠르게 구현해주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거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둘 다 결국 내가 무엇을 질문하고, 무엇을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이 나이에, 이 직위에, 이대로 편하다고 머무는 것.
사람은 불편할 때 성장하고, 편안할 때 멈춥니다.
지금은 분명 집중할 시간이 생겼고, 몰입할 여건도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그 편안함에 취해버리면,
저는 미지근한 물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처럼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비유가 과격하게 들릴지 몰라도, 저는 이 감각이 꽤 현실적이라고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제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이 시간은 휴식이 아니라, 다음 기회의 발판이다.”
“직위가 아니라, 내가 시장(조직 밖 포함)에서 증명할 수 있는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칼럼에서 오바마 연설 내용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실패가 자신을 규정하게 하지 않고 실패가 자신을 가르치게 만들었다는 것.
저는 이 문장을 커리어의 중요한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실패는 늘 옵니다. 좌천처럼 보이는 이동도, 보직을 내려놓는 순간도, 어색한 시선도,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지?”라는 자책도 다 실패의 언어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입니다.
CIO실에서 1년이 제게 가르친 것은 “기술”만이 아니었습니다.
낯선 언어를 배우는 법, 다른 세계의 문법으로 말하는 법, 서로 다른 사람들을 연결하는 법,
즉 조직이 바뀌어도 살아남는 능력이었습니다.
이번 HR Analytics 이동이 가르치는 것도 비슷합니다.
직함이 줄어든 자리에 생긴 시간은, 결국 “내가 누구인지”를 새롭게 증명하라는 요청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여전히 불안합니다.
사실 불안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불안은 다음 단계로 가는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불안을 “퇴사 vs 잔류” 같은 이분법으로 다루지 않으려 합니다.
대신 이렇게 바꾸려 합니다.
결심이 아니라 증거
선택이 아니라 옵션
직위가 아니라 기여
직위가 가벼워지는 경량문화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 이상 직위를 붙잡기보다, 내가 주는 가치의 무게를 키워야 합니다.
조직 밖에서도 작동하는 나의 ‘포터블 가치’를 만들 수 있다면, 경량문화는 위기가 아니라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그 기회를 잡기 위한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편해진 만큼 더 위험하다는 걸 알기에
이 시간을 발판삼아, 또 다른 기회를 반드시 만들어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