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세기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 아래 피로 피를 씻어내는 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전쟁의 혼란으로 모든게 뒤엉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또 사람사는 대로 흘러갔다.
1556년 정월, 오우미국(近江国) 이누카미군의 작은 마을 토도무라. 토도 겐스케 토라타카의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이름은 타카토라(高虎). 태어날 때부터 보통 아이가 아니었다. 젖먹이 시절, 한 명의 유모 젖으로는 부족해 여러 여인의 젖을 받아먹었다. 3살에 떡 6개를 먹어치웠고, 13살에는 형보다 체구가 컸다. 성인이 되어서는 6척 2촌(약 190cm)의 거구가 되었다.
그러나 이 거한의 운명은 순탄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스스로 순탄함을 거부했다.
형 토도 타카노리가 이세 공격에서 전사한 지 1년 후, 타카토라는 형을 따라 다이묘였던 아자이 나가마사(浅井長政) 휘하로 들어갔다. 당시 아자이 가문은 오다 노부나가와 대립하며 세력을 유지하던 유력 다이묘였다.
첫 출진은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 불과 14세였던 소년은 적의 수급 하나를 취했다. 9월 우사야마 성 전투에서도 적극적으로 싸웠다. 나가마사는 타카토라의 활약을 칭찬하며 패도(佩刀, 칼)를 하사했다. 1571년 8월, 오다군 공성전에서 가장 먼저 수급을 올리자 나가마사는 직접 감장(感状, 포상장)까지 내려주었다.
젊은 타카토라는 전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1572년, 사건이 터졌다. 성 아래에서 같은 아자이 가문 가신인 야마시타 가스케와 싸움이 붙었고, 타카토라는 그를 죽여버렸다. 같은 조직 동료를 살해한 것이다. 현대로 치면 사내 폭력 사건으로 형사고발감이다.
타카토라는 성에서 도망쳐 아츠지 사다유키가 있는 야마모토 산성으로 피신했다. 사다유키는 그를 빈객으로 맞아주었다. 여기서 현대 인사관리의 첫 번째 질문이 던져진다. "전직장에서 문제가 있었던 직원을 받아들일 것인가?"
사다유키는 타카토라의 '능력'을 보고 받아들였다. 나이는 어리지만 전장에서 검증된 무용(武勇)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혈기넘치던 그의 '성격'이었다. 타카토라는 아츠지 가문에서도 다른 가신들과 불화했다. 특히 아츠지 나타스케와 히로베 토쿠히라는 뛰어난 무용을 가졌지만 명령 불복종이 잦았다. 타카토라는 이들을 참지 못하고 찔러 죽였다. 그의 나이 불과 17세, 두 번의 살인과 두 번의 도주를 벌였다. 갈 곳이 없던 그는 결국 로닌, 즉 낭인이 되었다. 두 번의 살인으로 쫓겨난 타카토라에게 세상은 냉혹했다. 그러나 기회는 왔다. 1573년, 한때 아자이 가문 가신이었다가 오다 가문으로 옮긴 이소노 탄바노카미 카즈마사가 그를 80석의 봉록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80석. 하급 무사의 봉록이었다. 아자이 가문에서 나가마사에게 직접 감장을 받던 청년에게는 초라한 대우였다. 하지만 타카토라는 묵묵히 일했다. 그는 경력단절 후 재취업을 하며 과거 직급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1574년, 또 문제가 생겼다. 카즈마사의 후임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조카 오다 노부즈미가 오자, 타카토라는 호로슈(母衣衆, 다이묘의 측근&선봉 돌격대) 임무를 맡았다. 그는 전장에서 군공을 올렸지만 가증(加增, 봉록 인상)이 없었다. 타카토라는 세 번이나 가증을 청원하며”더 이상 호로 임무를 맡기 어렵다"고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미련없이 떠났다. 두 번째 교훈, 정당한 보상이 없으면 떠날 수 있다. 단, 절차를 밟아야 한다.

타카토라는 세 번 청원하고, 교섭이 결렬되자 정식으로 오다 가문을 떠났다. 당시 오다 가문은 기나이(畿内)를 장악한 최강 세력이었다. 아무리 오다 노부나가의 직속이 아니었다지만 "천하의 오다 가문"을 스스로 떠난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그러나 그는 떠났다. 다시 로닌이 되는 한이 있어도. 그는 성과를 내도 인정받지 못할 바에야 인정받을 곳으로 가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던 그는 어느덧 스무살이 되었다. 이때 하시바 히데나가(羽柴秀長)가 타카토라를 300석으로 영입했다. 히데나가는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생이었다. 당시 히데요시는 급부상하는 오다 가문의 핵심 중신이었다. 이전에 비하면 거의 4배의 연봉 인상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타카토라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는 드디어 자신의 진짜 능력을 발휘할 무대를 찾은 것이다. 히데요시는 오우미의 나가하마 성을 새로 쌓고 있었고, 노부나가는 아즈치 성을 건설 중이었다. 타카토라는 이 축성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토목·건축 업무를 맡았다. 여기서 그의 핵심 역량 중 하나인 축성술(築城術)이 쌓인다.
1577년, 히데요시가 주고쿠(中国) 공격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자 히데나가는 산인(山陰) 방면 침공을 맡았다. 타카토라도 종군하여 다지마(但馬) 원정에 참여하였고 유명한 다케다 성 개축에도 관여했다. 1578년, 미키 성 공략 중 타카토라는 히데나가 휘하에서 벳쇼 나가하루를 공격했고 결국 1580년 성을 함락시켰다. 이 시기, 타카토라는 군공만 세운 것이 아니었다. 1581년 전후, 그는 다지마에 자신의 거관(居館)을 조성했다. 잇시키 슈리노다이부의 딸 규보 부인과 결혼했고, 부친 토라타카를 오우미에서 불러들여 함께 살게 했다. 그는 자신의 핵심 역량인 전공과 축성술을 닦으며 삶의 기반을 안정시켜나갔다.
그러던 중 1582년,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이 일어났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살해되자 히데요시가 급히 돌아와 야마자키 전투를 일으켰다. 타카토라는 이때 히데요시군의 선봉으로 공을 세웠다. 주군 히데나가는 하리마(播磨)와 다지마 2국의 다이묘로 올라섰다. 히데나가는 다지마의 이즈시에 새 성을 쌓을 것을 명했고, 타카토라는 축성은 물론 히메지와 이즈시의 통치까지 맡게 되었다.
군사 전문가에서 행정·건축 전문가로 영역을 확장한 것이다.
이후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한 이후 대전쟁을 일으킨다. 바로 임진왜란이다. 이때 타카토라는 수군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육상전에서 검증된 그는 이제 수상전도 지휘할 수 있는 '만능형 장수'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육군에서 전공을 올리며 북진하던 동료들과 달리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이순신(李舜臣)이었다.
옥포 해전 패배, 부산포 해전 패배 등 바다에서 이순신을 상대했던 그의 전적은 연전연패였다.
1597년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을 상대로 승리해 체면을 세웠지만, 이순신이 복귀하자 다시 명량 해전에서 대패했다. 타카토라는 수군 총대장이었음에도 후방에서 화살을 맞을 정도로 참패했다. 뒤이은 절이도 해전에서도 패배. 아무리 조직 내에서 뛰어난 인재라도 더 뛰어난 상대를 만나면 질 수 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타카토라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순신과 싸운 모든 일본 수군이 졌다. 타카토라는 패배 속에서도 생존했고 끝내 히데요시의 신뢰를 잃지 않았다. 그는 최선을 다했다는 점을 히데요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598년 8월, 천하를 통일하고 무리한 전쟁을 일으킨 히데요시가 사망했다. 일본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츠나리의 대립이 깊어졌다. 이떄 타카토라는 결단을 내렸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서기로. 이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그는 히데요시·히데나가 형제 밑에서 20년 넘게 일했다. 도요토미 가문의 충신이었다. 그런 그가 이에야스 편으로 돌아선다?
하지만 타카토라는 명확했다. "자신이 어느 편인지 분명히 밝히는 것이야말로 지조(志操)다." 물론 당시 도요토미 가문의 보호를 양측 다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도요토미 가문을 배반했다고 보긴 어려웠다. 하지만 이후 타카토라의 행색을 볼 때 다른 무장들과는 달리 이에야스 쪽으로의 확실한 이적이 이루어졌다고 판단된다.

1600년 9월, 결국 이시다 미츠나리의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세키가하라(関ヶ原) 에서 맞붙는다. 이 대전투에서 동군(이에야스 편)이 승리했다. 당연히 타카토라도 참전해 선봉에서 싸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오오타니 요시츠구에게 패했다. 자신은 패배하고 고전했지만 결국 이긴 편이었기에 그는 그 공을 인정받는다. 타카토라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요(伊予) 이마바리 20만 석 다이묘가 되었다. 1608년에는 이세(伊勢) 츠(津)로 전봉되며 2만 석이 추가되었고 오사카 전투 이후 또 가증받아 최종 32만 3천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아시가루에서 32만 석 다이묘까지 올라선 셈이다. 일개 사원이 중견기업의 사장이 되었다. 연봉으로만 치면 400배 이상의 출세였다.
세키가하라 이후, 주변 사람들은 타카토라를 의심했다.
"저자는 주군을 10번이나 바꿨다. 믿을 수 있는가?"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도 부친 이에야스에게 경계해야 할 다이묘를 물었다. 시마즈, 다테 등을 거론하자 이에야스는 웃어넘겼다. 그런데 타카토라를 거론하자 이에야스는 정색했다. "이즈미노카미(和泉守, 타카토라의 관직)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이어서 타카토라를 불러 자리에 동석시켰다.
왜 이에야스는 타카토라를 믿었을까? 1614-15년 오사카 전투 때의 일화가 답을 준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화친하며 오사카 성의 해자를 메우는 조건을 걸었다. 물론 이는 손쉽게 해자를 메우기 위한 이에야스의 함정이었다. 타카토라는 이 매립 공사를 지휘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의 가신인 간 미치나가는 "이것은 무사도에 어긋난다"며 거부했다. 이 일로 그는 타카토라와 큰 갈등을 빚었고, 결국 타카토라는 그에게 할복을 명했다. 미치나가는 1615년 할복했다. 타카토라는 오래된 가신이 반대해도 따르는 주군의 명을 따랐다. 그것이 비윤리적으로 보일지라도. 이에야스 입장에서 "이 사람은 내 명령을 확실히 수행한다"는 신뢰를 얻은 것이다. 그는 주인을 여러 번 바꿨지만 절대 먼저 주군을 저버리지 않았고 재직 중에는 조직에 누구보다 충성했다. 그것이 신뢰의 기반이다.
평균 근속연수 6.3년, 20-30대는 2년의 시대.
어느 조직이 묻는다. "당신은 충성스러운가, 능력 있는가?"
토도 타카토라는 답한다. "둘 다다. 단, 충성의 정의가 바뀌었을 뿐."
전통적 충성은 한 조직에 평생 헌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타카토라식 충성은 재직 중 최선을 다하고 이직 때엔 윤리를 지켰으며 전문성으로 자신을 증명했다. 결국 그가 32만 석 다이묘가 되고, 이에야스가 임종 직전까지 신뢰한 이유는 열 번 옮겼지만 단 한 번도 속이지 않았고, 있을 때는 최선을 다했으며, 떠날 때는 당당했고, 어디서든 필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주군을 일곱 번 바꾸지 않으면 무사가 아니다."
그가 했던 이 말은 어쩌면
‘변화를 두려워 말고, 성장하라. 단, 어디에 있든 최선을 다하라. 그것이 진정한 직장인이다.’
라는 의미는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