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1년, 22세의 청년 왕이 고려의 왕좌에 올랐다. 공민왕이었다. 그가 물려받은 나라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100년 가까이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며 권문세족이 나라를 좌지우지했다. 왕은 있으되 왕권은 없었고, 백성들은 토지를 빼앗기고 수탈당했다.
공민왕은 문과에 급제한 유학자도 아니었고, 전장을 누빈 무장도 아니었다.
궁궐에서 자라며 후계자 수업을 받지도 못했다. 그는 10년간 원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하며 성장한 불안정한 청년이었다. 그저 기황후에 의해 고려의 왕으로 간택된 그저 장기말에 지나지않았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이렇게 기록했다. "왕이 즉위하기 이전에는 총명하고 어질고 후덕하여 백성들의 기대를 모았고, 즉위한 후에는 온갖 힘을 다해 올바른 정치를 이루었으므로 온 나라가 크게 기뻐하면서 태평성대의 도래를 기대했다."
흔히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왕들이라면 의기소침하겠지만 공민왕은 달랐다. 그는 인재를 가리지 않았다. 원나라에서 함께 고락을 같이한 호종공신 정세운, 김용, 조일신을 측근으로 삼았고, 동시에 권문세족 출신인 이인복, 이인임, 염제신도 등용했다. 사대부들의 대부였던 이제현과 이색을 중용했으며, 무인으로는 최영과 이성계, 안우, 이방실, 김득배를 요직에 배치했다. 심지어 만년에는 공신들의 자제들로 이루어진 근위대인 자제위를 만들어 홍륜 등 2세대를 자신의 측근으로 만들었으며 내시 최만생, 환관 안도치 같은 궁중 세력까지 활용했다. 그리고 원나라 황실 출신의 노국공주를 아내이자 정치적 동반자로 맞이했다. 또한 요승으로 일컬어지는 신돈에게 전권을 맡기는 한편 고려 불교의 버팀목이였던 보우를 왕사로 초빙하기도 한다.
그의 인재풀은 파격적이었다. 출신도, 배경도, 파벌도 가리지 않았다. 21세기 용어로 표현하자면 '다양성과 포용의 극치'였다. 아마 한국사에서 그만한 인재풀은 선조 이외에도 없을것이다.

그러나 즉위 1년 만에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최측근 조일신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공민왕과 함께 원나라에서 고생하며 그를 따랐던 측근이 칼을 들었다. 반란은 진압되었고 조일신은 죽었다. 첫 번째 배신이었다.
이 사건은 공민왕이 처단하고 싶어했던 기철에 대한 그의 독자적 행동을 무마하기 위해 반란으로 덮어 씌운 것이라는 추측도 있을만큼 고려 후기 정가의 미스테리였다. 당시 고려는 원에 부역하던 부원배, 특히 원나라의 황후였던 기 황후와 남매인 기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 권문세족은 산과 강으로 그들의 토지를 나누었고 이는 고려를 이끄는 왕으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웠을 일이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자신을 위해 칼을 빼든 최측근을 공민왕은 역모로 다스렸다. 최측근의 첫 번째 배신이자 그가 쓴 인물을 스스로 버린 첫번째 배신이었다.

그후 시간이 흘러 1356년, 공민왕은 다시 한 번 대담한 결단을 내렸다. 이전 조일신을 활용해 기철을 제거하려 한 것을 곱씹고 확실하게 기철과 그의 일파를 일거에 숙청한 것이다. 이른바 병신정변(발음을 주의하자.)이었다. 기철은 당시 고려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최고 권력자였다. 그는 원나라 황실의 배경을 믿고 왕권을 무시했다. 공민왕은 연회를 벌여 그들을 안신시키고 일거에 습격해 그 자리에서 참살해 기철과 권겸, 노책 등 부원배 일파를 제거했다. 정치적 모험이었으나 어찌 되었건 성공했다. 그후 무신정권 시기 최우에 의해 설치되어 인사권을 다루던 정방을 비롯해 원나라의 여러 간섭기구를 폐지하고 관제를 복구했다. 고려를 새롭게 만들 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고려를 가만두지 않았다. 자주를 선언하자마자 1359년과 1361년, 북방에서 재앙이 찾아왔다. 홍건적이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한 것이다. 특히 1361년 2차 침입 때는 20만에 달하는 홍건적 무리가 개경을 함락시켰다. 공민왕은 지금의 안동인 복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국가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때 나선 사람들이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였다. 정세운은 공민왕의 호종공신이자 총애받는 측근이었다. 안우, 이방실, 김득배 역시 홍건적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명장이었다. 이들은 '3원수'라 불리며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수복했다. 고려를 구한 영웅들이었다. 백성들은 그들의 이름을 외쳤고, 조정은 그들을 칭송했다. 공민왕도 그들을 치하했다. 상을 내렸고, 권한을 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1362년, 정세운이 제거되었다. 공식 기록은 이렇다. 김용이 왕의 명령을 위조, 정세운이 반역을 꾀한다고 이방실, 안우, 김득배에게 왕명으로 정세운을 처리하라고 명했다. 세 명의 무장은 명을 따랐고, 정세운은 죽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같은 해, 이방실, 안우, 김득배가 사사되었다. 죄목은 "정세운을 죽인 죄"였다. 이들은 김용의 위조가 있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왕의 명령에 따라 정세운을 제거했다. 그런데 바로 그 일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진상을 살펴보지도 않고 이들에 대한 처형이 이루어졌다.
조정은 충격에 빠졌다. 백성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홍건적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4명의 영웅이 단 1년 만에 모두 사라졌다. 반역도 아니고, 전쟁에서 죽은 것도 아니었다. 왕의 손에 죽은 것이다. 특히 김득배의 제자였던 정몽주는 "한없이 한탄했다"고 한다.

1363년, 진실이 드러났다. 김용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흥왕사의 난이었다. 김용은 공민왕을 제거하고 왕위를 찬탈하려 했다. 반란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은 1362년 정세운을 참소한 것이 김용의 모략이었다는 것이고 김용은 정세운을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하려 했던 것이다.
반란은 최영에 의해 진압되었고 김용은 죽었다. 이 과정에서 환관 안도치가 공민왕을 대신해 목숨을 잃었다. 결국 정세운 사망에 관련된 사람은 공민왕을 제외하고 모두 죽은 것이다.
공민왕은 알았을 것이다. 정세운은 무고했다는 것을. 그를 죽인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그렇다면 이방실, 안우, 김득배는? 그들도 무고했다. 아니, 그들은 단지 위조되었지만 왕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었다. 공민왕의 불우한 환경을 그를 의심병 환자로 만들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아마 전공이 높아 백성들의 칭송을 받는 정세운을 죽이기 위해 김용을 이용하고, 입을 막기 위해 3원수를 죽인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와중 김용도 언제 버림받을 지 몰라 반란을 일으켰다면?
어찌되었든 원나라에서 그를 호종하던 조일신, 정세운, 김용도 모두 공민왕에 의해 죽고 나라를 구한 3원수마저 죽게 되었다.
곧이은 1365년, 공민왕에게 가장 큰 비극이 찾아왔다. 노국공주가 아이를 낳다 난산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노국공주는 공민왕에게 단순한 왕비가 아니었다. 그녀는 정치적 동반자였고, 정서적 지주였으며, 외교적 완충 장치였다. 무엇보다, 그녀는 공민왕이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노국공주는 비록 정략결혼이긴 했지만 반원정책을 추진하는 공민왕을 지지했고 자신이 보탬될 수 있는 일들을 하였다. 사실상 자신의 조국을 배반한 셈이었다.

역사는 이렇게 기록한다. "왕이 노국공주가 죽은 후 슬픔이 지나쳐 모든 일에 뜻을 잃었다." 공민왕은 무너졌다. 그는 노국공주를 위한 사찰인 영전 건립에 국고를 쏟아부었다. 실의에 빠진 그는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신하들을 의심하며 새로운 선택을 한다. 아무 배경이 없던 신돈이었다.

신돈은 승려 출신으로 정치 경험이 전혀 없었다. 기존 권문세족과도, 신진사대부와도, 무인 세력과도 연이 없었다. 말 그대로 '외부인'이었다. 공민왕이 신돈을 선택한 이유는 명확했다. 이제 더 이상 기존 세력을 믿을 수 없다. 연고가 없는 사람, 오직 나만을 따르는 사람이 필요하다. 라는 생각은 아니었을까.
신돈은 공민왕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공민왕은 그를 위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그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한다. 그가 그때 받은 벼슬은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판중방감찰사사(判重房監察司事)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 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兼)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였다.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국회의장을 비롯해 나라의 불교를 관장하고 제사까지 도맡은 막강한 권력이었다. 한국역사에서 이렇게 긴 관직은 왕을 자칭하기 전의 견훤이나 무신정권시기의 최충헌 정도밖에 없다. 그는 심지어 공민왕에게서 ‘스승은 나를 구하고 나는 스승을 구한다.’ 라는 맹세까지 받아내었다. 아마 의심병이 도진 공민왕에게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는 공민왕이 부여해준 권력을 바탕으로 권문세족 개혁을 단행했다. 불법으로 점유한 토지를 되찾았고, 노비를 해방시켰으며, 부패한 귀족들을 숙청했다. 개혁은 일정성과를 냈다. 국가 재정이 회복되었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다. 정치 외적으로 그는 노국공주를 닮은 여종 반야를 공민왕에게 바쳤고 그녀에게서 훗날의 우왕이 태어난다. 이우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이야기는 여기에서 나왔다.
하지만 신돈의 권력은 너무 빠르게 커졌다. 그는 '국사'가 되어 왕권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했다. 신돈을 비판하는 신하들을 숙청했다. 공민왕의 의심병이 다시 불이 붙었다. "신돈도 나를 위협하고 있다."
공민왕은 신돈이 부녀자들과 사통하고 자식을 낳았다는 참언을 바탕으로 그를 숙청한다. 공민왕은 심지어 ‘네가 사통하고 자식까지 낳았다는 것이 맹세에 있었느냐, 도성 안에 저택 일곱 채를 짓는다는 일이 있었느냐? 이러한 작태가 많으니 죄상을 다 따지고 이 맹세는 불태워버려라.’ 라고 말했다.
결국 1371년, 공민왕은 신돈을 숙청했다. 그를 끝까지 믿고 지지했던 공민왕이 직접 그를 제거한 것이다.

신돈을 숙청한 후, 공민왕은 정사를 거의 돌보지 않았다. 역사에서 이같은 일들은 "완악한 무뢰배들을 가까이 해 음탕하고 더러운 짓을 함부로 하였고, 수시로 술주정을 부리며 좌우의 신하들을 마구 때리기도 했다." 공신들의 자제들 중 아름답고 잘생긴 남자들로 이루어진 근위대인 자제위를 설립하고 자제위 출신의 젊은이들을 총애했다. 영화 ‘쌍화점’의 배경이 되는 그 이야기다.
그 중 홍륜은 조부인 홍언박이 흥왕사의 난 때 죽었고 아버지또한 왜구 토벌의 명장으로 이름높았던 홍사 우다. 일각에서는 그의 조부가 공민왕 때문에 죽어 홍륜이 개인적인 원한을 품지않았을까도 추측하곤 한다.
어찌되었든 자제위들 또한 공민왕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공민왕의 총애를 받던 신하들이 몇 해 못가 갑자기 제거된 일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도 언젠가 저렇게 될 것이다."
그런데 공민왕이 큰 실수를 저지른다. 공민왕은 자제위 소속의 청년들에게 자신의 후비(일반 후궁도 아니고 같은 왕비다.)들과 간통하라고 명령을 내리곤 했는데 정비 안씨는 죽음을 각오하고 강력하게 거부하였다. 그러나 3번째 후비인 익비 는 결국 홍륜과 관계를 가졌고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 공민왕은 자제위와 후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자신의 자식으로 속여 후계자로 만들 생각을 하였기에 임신 소식을 듣고 입막음을 위해 아이의 아버지인 홍륜을 죽이고자 하였다. 그는 측근 내시인 최만생에게 ‘다음날에 참배하러 가 일부러 주정을 부리다 칼춤을 추며 홍륜을 죽이고 입을 막겠다.’ 라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최만생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아마 다음은 자신의 차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결국 최만생은 이를 홍륜에게 전했고 두 사람은 결심했다, 선수를 치기로.
1374년, 홍륜과 최만생은 공민왕을 시해했다. 공민왕은 43세의 나이로 비참하게 죽었다. 홍륜과 최만생은 곧바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는 환경 탓이었으나 천성이 의심이 많고 잔인해서 심복대신이라도 권세가 커지면 의심해서 죽였다. 패륜적 행동이 이와 같았으니 죽음을 면하려고 한들 어찌 피할 수 있었을까.
공민왕의 재위 23년을 정리하면 이렇다.
1352년 조일신 반란, 1362년 정세운·안우·이방실·김득배 제거, 1363년 김용 반란과 안도치 전사, 1365년 노국공주 사망, 1371년 신돈 숙청, 1374년 공민왕 시해.

그가 등용하고 핵심 인재 대부분이 비정상적으로 죽었다. 만약 정권이 길어졌다면 그가 등용했던 이인임같은 권문세족이나 정몽주같은 신진사대부도 이를 피해가진 못했을 것이다.
역사는 그를 '중흥군주'로 평가한다. 쌍성총관부를 수복했고, 권문세족을 견제했으며, 개혁을 시도했다. 업적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고려의 중흥과 마침표를 동시에 찍은" 군주다.
오늘날 기업으로 비유하면, 공민왕은 부채와 파벌로 뒤덮인 회사를 떠안은 CEO다. 그는 구조조정 전문가를 영입하고(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 외부 컨설턴트를 기용하며(신돈),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다. 회사는 위기를 극복했다. 매출이 회복되고 조직이 재정비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위기를 극복한 핵심 인재들이 모두 제거되었다. CEO는 그들이 너무 강해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위기를 극복하자마자 CEO가 앞장서서 그들을 반목시켰고 토사구팽했다. 아직 위기가 완전히 극복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극복하는 과정이었고 그 과정에서 직원들의 신뢰를 다소간 얻었을 뿐이다. 어차피 위기가 완전히 극복되면 그 칭송은 결단을 내린 CEO인 자신에게 향할텐데 그는 기다리지 못했다.
이런 일이 벌어진 회사에서 누가 CEO를 신뢰하겠는가? 직원들은 배웠다.
"성과를 내도 안전하지 않다. 오히려 성과를 내면 위험하다. CEO의 명령을 따라도 소용없다. 생존이 최우선이다."
공민왕의 이야기는 두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 위기를 극복한 인재를 제거하는 조직은 더 이상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는 홍건적의 침입이라는 국가 최대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다. 그들은 결과로 증명한 인재들이었다. 그런데 공민왕은 그들이 너무 강해’질’ 것을 두려워해 제거했다. 1362년 이후 고려는 계속된 외침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성계가 부상할 수 있었던 것도 그를 견제할 무장들이 최영을 제외하고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최영은 이성계를 누구보다 신뢰했다.
둘째, 신뢰는 한 번 무너지면 복구할 수 없다. 일련의 사건들이 공민왕에 대한 모든 신뢰를 무너뜨렸다. 이후 조정을 지배한 것은 충성심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신하들은 성과가 아니라 생존을 걱정했다. 아무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고, 아무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12년 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칼이 날아왔다. 공민왕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칼을 맞았다. 그가 제거한 인재들이 살아있었다면, 홍륜이 감히 시해를 시도할 수 있었을까? 이성계가 그렇게 쉽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고려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졌을까?

물론 공민왕이 마지막 불꽃을 다른 방향으로 태워버리는 방향에 고려는 다시 혼란 속으로 접어든다. 그가 사망한 이후 불과 9살의 우왕이 즉위했고 이인임이 집정이 되어 정국을 주도했다. 고려는 결국 내부에서 썩어문드러지기 시작했고 변방 함주의 산맥 위에서 두 사나이, 이성계와 정도전은 새로운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침의 고운 햇살, 바로 조선朝鮮을.
공민왕은 재위 내내 고려를 중흥시키고자 했지만 결국 그가 만든 것은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의 잉태였다.
경영의 9할은 인사다. 사람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믿고, 어떻게 지키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 공민왕은 그것을 몰랐고, 그래서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것이 공민왕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