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직이 데이터를 맹신할 때 범하는 가장 위험한 실수는 '데이터가 없으면 문제도 없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금융·항공·의료 등 치명적 실패를 겪은 조직 사례를 분석해보면, 경고등은 시스템 밖에서 '숫자가 아닌 형태'로 먼저 켜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성과관리 체계가 정교해질수록 조직은 역설적으로 '판단의 공백(Judgment Gap)'을 겪는다. 계기판의 숫자가 정상이면, 현장의 직관과 미세한 징후는 "객관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기각된다. 이것은 관리의 효율화가 아니라, 위험을 감지하는 '조직 감각의 마비'에 가깝다.
위험의 본질: 리스크는 데이터의 공백이 아니라, '데이터로 번역되지 못한 현장 신호' 속에 숨어 있다.
구조적 모순: "증거를 가져오라"는 요구는 합리적이지만, 위기 전조 단계에서는 자칫 "증거가 나올 때까지(사고가 날 때까지) 기다리자"는 방임이 될 수 있다.
리더의 과제: 설명되지 않는 불편한 신호를 '공식적인 논의 테이블' 위로 올리는 프로세스를 설계해야 한다.
고장과 사고는 대개 ‘갑자기’ 오지 않는다. 현장은 먼저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조직 내부에는 보이지 않는 '여과 장치'가 작동한다. 관리 시스템이 고도화될수록 조직은 "증거가 완성된 것만 보고하라"고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숫자로 번역되지 않는 직관은 탈락하고, "공식 수치로 보고되지 않았다"는 말은 강력한 면책 사유가 된다. 현장의 감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판단 체계의 설계 자체가 신호를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Weick & Sutcliffe가 말하는 고신뢰 조직(HRO)은 “작은 신호를 잘 본다”를 넘어선다. 핵심은 설명되지 않는 신호를 조직이 어떤 방식으로 다루도록 학습되어 있는가에 있다. 고신뢰 조직은 이상 징후를 곧바로 원인 분석이나 해결 과제로 밀어 넣지 않는다. 완전히 설명되지 않아도 판단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섣부른 결론보다 ‘의심을 유지하는 상태’를 조직적으로 허용한다. 반대로 실패 조직은 신호를 못 봐서가 아니라 "아직 근거가 부족하다", "지금은 아니어도 된다"는 말로 판단을 미루며 정상성 편향(Normalcy Bias)으로 흘러간다.
하버드와 맥킨지의 연구는 이를 '증명의 함정'으로 설명한다. 고장과 사고는 현장에 물리적·심리적 파편을 먼저 남긴다. 일반 조직은 이 파편을 보며 "수치로 증명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반면, 고신뢰 조직은 다르게 질문한다.
"설명은 안 되지만, 왜 현장은 불편해하는가? 우리가 놓친 맥락은 무엇인가?"
이들은 설명되지 않는 신호를 노이즈(Noise)가 아닌 '아직 해석되지 않은 데이터'로 다룬다. "확실하지 않으니 보류한다"가 아니라, "확실하지 않으니 더 주의 깊게 관찰한다"는 합의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결론을 내리자는 것이 아니다. 일단 ‘논의 대상’으로 올리자는 것이다. 아래 징후 중 2개 이상이 포착되면, 데이터가 부족하더라도 '주의 단계'로 격상하여 논의해야 한다.
[반복성] 지점이 반복된다: 같은 종류의 불편이나 이상 징후가 두 번 이상 관찰된다.
[현장 언어] 찜찜함이 남는다: "이상하다", "계속 걸린다", "설명하기 어렵다"는 표현이 여러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
[비공식 대응] 설명은 안 되는데 대처하고 있다: 매뉴얼 없는 우회로, 임시방편, 개인기 같은 '비공식적 해결'이 늘어난다.
[고비용] 실패 비용이 크다: 안전, 신뢰, 품질 등 한 번 터지면 회복이 불가능하거나 매우 느린 영역이다.
[책임 분산] 주어가 모호하다: "보고된 건 아니고...", "확실한 건 아니지만..."이라며 판단의 주체가 모호해진다.
오늘, 리더로서 팀원들에게 던지는 질문을 조금만 바꿔보자.
"자료로 증명하긴 애매하지만, 현장에서 계속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나요?"
이 질문 하나가 조직의 안테나를 다시 작동시킨다. 숫자로 기록되지 않는 것을 논의하라. 그것이 AI 시대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리스크 관리다.
문제는 ‘신호를 못 보는 것’이 아니다. 신호를 판단 책임에서 빼버리는 습관이다. 탁월한 리더십은 더 많은 데이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 이전의 신호(Weak Signal)를 다룰 수 있는 그릇을 만드는 것이다. 숫자가 닿지 않는 곳의 신호를 수용할 때, 조직의 안전과 학습 속도는 비로소 달라진다.
[참고]
Harvard Business Review, Strategies for Learning from Failure (Amy C. Edmondson, 2011)
Karl E. Weick & Kathleen M. Sutcliffe, Managing the Unexpected (2015)
McKinsey & Company, The State of Organizations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