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원. 임진왜란을 제법 안다면 전쟁 초반기 무능한 도원수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을 구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김명원(金命元, 1534~1603)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1561년 문과에 급제한 전형적인 문신이었다. 하지만 젊은 시절 권신 이량을 탄핵했다가 파직될 만큼 강직했고, 이후 함경도·평안도 등 주요 군사 요충지의 지방관을 두루 거쳤다. 1583년 니탕개의 난을 시작으로 여진족과의 대규모 충돌이 빈번해지자 조정은 그를 함경도 관찰사로 파견했고, 김명원은 병력 동원, 물자 공급, 백성 원호 등 군사 행정에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다. 1589년 정여립의 난을 수습한 공로로 평난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조정에서는 "무재(武才)가 있는 데다 변방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만약 사변이 있을 때 순찰사를 겸직시키면 매우 편리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조선에서 군사 전문가로 이름난 문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때,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1592년 4월 29일, 김명원은 팔도도원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가 도원수로 임명된 시점은 이미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의 군대가 전멸한 다음 날이었다. 조정은 급박하게 몽진을 준비하고 있었고, 김명원에게 주어진 임무는 겨우 1천여 명의 병력으로 한강 방어선을 지키며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그를 향해 밀려오는 것은 꾀가 많았던 지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와와 용맹하기로는 최고였던 가토 기요마사,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4만여 명의 왜군이었다.

문제는 병력수만이 아니었다. 김명원의 휘하에는 전직 우의정 이양원처럼 관직 경력으로는 그보다 훨씬 높은 인물들이 있었다. 평생 정승직 한 번 해보지 못한 김명원으로서는 이들에게 제대로 명령을 내릴 수도 없었다. 비변사는 "김명원은 성격이 너무 유순해서 장수 통제를 할 만한 그릇이 아니다"라며 탄핵했다. 한강 방어선은 무너졌고, 임진강 전투에서도 패배했다. 평양성마저 함락되었다.
『선조실록』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김명원은 사람됨이 지나치게 순후(純厚)하여 원수에는 적임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연패를 거듭한 김명원은 처벌은커녕 계속된 체직 요청에 도원수직을 유지했다. 선조는 그를 권율로 교체하려 했으나, 비변사가 "권율은 경기 지역의 지형지물과 군사 정세를 모릅니다. 함부로 바꿨다가는 혼란스러워집니다"라며 반대했다. 결국 해가 바뀌고 1593년 6월이 되어서야 김명원에서 권율로 도원수가 교체된다. 하지만 김명원은 이후 호조, 예조, 형조, 공조의 판서를 역임하며 행정가의 모습으로 중용된다. 김명원은 왜 살아남았을까.

답은 그의 진짜 능력에 있었다. 김명원은 전투 지휘에는 서툴렀지만, 군사 행정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평양성이 함락된 후 그는 평안북도에서 무려 2만여 명의 병력을 재건했다. 임진강과 평양수비, 평양탈환 등 굵직한 전투에선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던 그 였지만 군수지원업무에서는 그야말로 소하의 재림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한양 탈환 작전 때는 경기도 일대에서 수천 명을 재차 징발해냈다. 이처럼 흩어진 군대를 모으고, 물자를 확보하고, 방어선을 구축하는 능력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
또 평양성을 지키면서도 미리 함락을 예측하고 평양 북쪽인 순안에 병력을 집결시켜 왜군의 북진을 막아낸 것도 그의 전략적 안목이었다. 명나라 장수들조차 그의 군사적 식견을 높이 평가해 자문을 구할만큼 그는 군사행정 전문가였다. 후일 류성룡, 이항복과 함께 한양 탈환의 병력 배치와 작전을 입안한 것도 김명원이었다.
조정은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은 전방이 아니라 후방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전황이 급박해 그를 전선으로 내몰 수밖에 없었던 것이 비극이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원수로서 촌공(작은 공)조차 없다” 고 비난했지만 선조는 "공을 세우지는 못했으나 고생을 많이 했다"며 탄핵을 기각했다. 능력 있는 사람을 잘못된 자리에 앉힌 '적재적소의 실패'였다.
하지만 김명원에게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이 있었다. 부원수 신각(申恪)의 죽음이다.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는 혼란 속에서 신각은 이양원을 따라 양주로 후퇴했다. 다음 집결지는 임진강이었는데, 전쟁의 혼란으로 경기도와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김명원은 임진강에서 신각을 기다렸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장계도 올라오지 않았다. 상주 전투와 탄금대 전투에서 죽다 살아난 이일조차 장계는 제때 올렸건만, 신각은 3일 간 소식이 없었다. 당시 전장에서 적을 앞에 두고 도주하는 지휘관이 많았기에 김명원은 신각도 도주했다는 합리적인 의심에 다다른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김명원은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신각이 이양원을 따른다는 핑계로 제멋대로 도망쳤습니다." 이에 선조는 크게 분노했고 일벌백계를 삼기 위해 즉시 신각을 참수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런데 며칠 후, 경기도에서 승전보가 올라왔다. 신각이 해유령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왜군 척후대 70명을 전멸시켰다는 소식이었다. 임진왜란 조선관군 최초의 승전이었다. 늦게야 장계를 접한 선조는 급히 선전관을 보내 신각을 죽이지 말라 명했으나, 이미 늦었다. 신각은 처형된 후였다. 조선의 첫 승전장군은 그렇게 억울하게 죽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날 즈음인 1597년 2월, 또 한명의 명장이 죽음의 문턱에 섰다. 이순신이었다. 왜군의 첩자 요시라의 계략에 빠져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조의 진노를 샀다. 선조는 이순신을 잡아들여 고문했고,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선언했다. 조정 대신들은 침묵했다. 이순신의 친구이자 그를 천거한 류성룡조차 선조의 눈치를 보며 탄핵에 찬성했다. 그때 김명원이 나섰다. 판부사 정탁, 참판 이원익 등과 함께 이순신을 옹호했다. 4월 1일, 이순신이 겨우 목숨을 건져 옥에서 풀려났을 때, 김명원은 사람을 보내 그를 위로했다.

진짜 시험은 그해 7월에 왔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졌다. 비변사의 신하들은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선조는 수군을 아예 폐지하려 했다. 앞으로 무슨 방법이 있느냐며 힐책하는 선조 앞에 두 사람이 입을 열었다. 김명원과 병조판서 이항복이었다.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삼는 것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선조는 내키지 않았지만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그는 일어나 나가버렸다. 그의 침묵은 머쓱한 동의였다.
이순신은 남은 13척의 배로 명량해전에서 기적을 일으켰다. 만약 김명원과 이항복이 그때 나서지 않았다면, 조선은 제해권을 영영 잃었을 것이다.
김명원은 1602년 세상을 떠났다. 실록은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때에 따라 판단의 부침이 심하다는 비방을 받았으나 풍도가 뛰어나 재상의 그릇이었다."
오늘날 기업으로 비유하면, 김명원은 경영관리 부서에 어울리는 직원이 급박한 상황에 현장 영업직으로 떠밀린 경우다. 그는 영업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현장을 위한 지원체계를 완벽하게 구축했다. 병력을 모으고, 물자를 확보하고, 전략을 수립하는 것. 바로 영업팀이 싸울 수 있게 만드는 백오피스의 역할이자 영업관리의 천부적인 능력을 발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치명적인 실패도 있었다. 신각이라는 유능한 직원을 잘못된 판단으로 잃었다. 현장과의 소통 두절, 불충분한 정보, 급박한 상황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김명원은 평생 이를 자책했다.
그리고 5년 후, 회사의 핵심 인재인 이순신이 사내 정치의 희생양이 될 위기에 처했을 때, 김명원은 누구보다 앞장섰다. 신각을 구하지 못한 후회가 이순신을 구하는 용기가 되었다.

그가 없었다면 이순신이 이뤄낸 명량대첩의 기적도, 조선의 승리도 없었을 것이다.
김명원의 이야기는 두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 리더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한다. 능력 있는 사람을 잘못된 자리에 앉히면 조직도 개인도 불행하다. 김명원은 후방 지원에 탁월했지만 전방 지휘에는 서툴렀다. 조정이 그를 처음부터 군수참모로 두었다면 더 빛났을 것이다. 아니면 명령 체계라도 단일화해 그의 지휘권을 공고히 했다면 또 어떻게 되었을 지 모른다.
둘째, 진정한 인재는 어디서든 자기 방법을 찾아 기여한다. 김명원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자리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전투에서 이기지는 못했지만, 전쟁을 지원하는 체계를 만들어 승리의 원동력을 복원하였고 결국 승리에 기여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필요한 인재를 지켜냄으로써 나라를 구했다.
결국 제목처럼 인사가 만사다.
사람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지키느냐에 따라 모든 일이 결정된다. 김명원의 온후함은 때로 약점이 되었지만, 그 온후함이 인재를 살리고 나라를 구했다. 적재적소도 중요하지만, 어떤 자리에서든 최선을 다하는 자세와 인재를 지키는 용기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400년 전 김명원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