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지로 유명한 중국의 삼국시대는 칼과 창의 시대임과 동시에 참모의 시대였다. 천하가 셋으로 나뉘는 과정에서 장수들의 칼보다 참모의 책략이 더 많은 운명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참모가 같은 방식으로 주군을 섬긴 것은 아니다.
삼국지하면 가장 유명한 참모 중 한명인 제갈량은 유비와 끝까지 함께 갔다. 반면 순욱은 조조 앞에서 멈춰 섰다. 오나라의 장소는 손권 곁에서 끊임없이 반대했다.
세 사람 모두 충신이었지만, 충성의 방식은 달랐다. 제갈량은 시간을 견뎠고, 순욱은 원칙을 지켰고, 장소는 자리를 지켰다. 또한 제갈량은 항상 중심에 있었고 순욱은 원칙을 위해 중심에서 내려왔으며 장소는 항상 중심 밖에 있었다.
그런데 이 차이는 단순히 성격이나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다. 각자의 출신, 정치적 기반, 주군과의 관계 구조가 만들어낸 필연적 선택이다. 제갈량은 인맥은 있었지만 독자적 권력 기반이 없었고 순욱은 예주 사족 전체를 대표하는 위치였지만 이에 비해 장소는 구조적으로 제거될 수 없었다.
이것은 삼국시대의 이야기지만, 오늘날 조직의 임원과 참모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의 선택은 우리의 입지에서 나온다.

제갈량의 출신을 정확히 보자. 서주 낭야 제갈씨, 명문가다. 다만 부친은 일찍 죽었고 숙부 제갈현이 예장 태수로 오며 남방으로 데려왔지만 그마저 제갈량이 14세 때 죽는다.
그러나 제갈량에게 아무것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형주 명사들과 정치적 교류를 맺고 있었다. 누나는 형주 명문가인 괴씨의 일원, 괴기에게 시집갔다. 장인 황승언은 당시 형주의 유력 귀족이던 채모의 큰누나와 결혼했다. 그는 또한 사마휘, 방덕공, 서서, 최주평, 석도 등 형주 명사들과 교유했다. 이른바 '형주파' 지식인 네트워크의 일원이었다.
그렇다면 제갈량에게 정치적 기반이 있었을까? 그건 아니다. 학맥과 정치적 기반은 다르다.
괴씨, 채씨는 형주의 유력 가문이었지만 그들의 권력은 형주의 지배자인 유표 정권에 속해 있었다. 제갈량은 이 가문들과 혼인으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그 자체로는 정치적 자산이 되지 못했다. 형주의 실권자 유표는 제갈량을 등용하지 않았다. 왜? 제갈량의 혼인 관계는 '연줄'일 뿐 유표 입장에서 그를 등용해야 할 정치적 필요성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207년, 유비가 세 번 찾아왔던 이른바 삼고초려. 제갈량에게 유비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그가 발돋움할 유일한 기회였다. 제갈량의 형주 네트워크는 유표 정권에서는 활용될 수 없었다. 유표는 형주 토착 사족들로 이미 조정을 채우고 있었고 따지고보면 외부인인 제갈량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비는 달랐다. 유비에게는 참모가 절실했고 형주에서 다시금 천하를 향한 기반을 다져야 했다. 제갈량의 형주 네트워크는 유비를 통해서만 정치적 자산이 될 수 있었다. 퍼즐처럼 서로의 필요가 맞아떨어지는 관계였던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제갈량의 인맥은 유비 없이는 무용지물이었다. 융중대에서 제갈량이 유비에게 천하의 형세를 물었을 때 제갈량은 환상이 아닌 실현가능한 미래를 팔았다. "조조는 천시(天時)를 얻었고, 손권은 지리(地利)를 얻었습니다. 장군께서는 인화(人和)를 택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냉정한 현실 인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제갈량 자신의 운명을 유비에게 거는 선언이기도 하다. 유비가 성공하면 제갈량의 형주 네트워크가 정치적 자산이 되고 유비가 실패하면 제갈량은 다시 형주의 초가집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제갈량은 유비의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설계한다. 형주 확보, 익주 겸병, 동오와의 동맹, 한중 쟁탈. 제갈량의 모든 전략은 '유비 정권의 생존'이 전제다. 214년,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던 중 종군하던 방통이 사망하자 제갈량을 부른다. 이때 제갈량은 중요한 판단을 내린다. 형주와 익주를 동시에 지킬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형주는 언젠가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는 형주를 맡으려 했던 관우에게 동오와의 화친을 거듭 말하지만 관우는 이를 무시했다. 결국 219년 관우는 형주에서 패하고 죽는다. 이때 제갈량의 반응이 중요하다. 그는 고향이자 자신의 정치전략인 융중대의 핵심인 형주를 되찾자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이미 형주는 전략적으로 포기된 땅이었고, 제갈량은 익주 내부의 안정에 집중한다.

221년,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명분으로 동오를 친다. 제갈량은 이에 반대했지만 유비가 일갈하자 반대를 멈춘다. 그런데 제갈량은 왜 더 강하게 막지 않았는가? 제갈량은 유비를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제갈량의 형주 네트워크를 다시 보자. 괴씨, 채씨 등 형주 명문가들은 어디로 갔을까? 208년 적벽대전 이후 형주는 조조-유비-손권이 나눠 가졌다. 그 과정에서 형주 토착 사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제갈량이 가지고 있던 '형주 기반'은 이미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제갈량이 유비를 떠나면? 그는 혼인 관계로 연결된 가문들이 있지만, 그것을 정치적 자산으로 전환할 방법이 없다. 조조에게 가도 손권에게 가도 그는 '형주 출신의 한 인물'일 뿐 '형주 사족의 대표'가 아니다. 중용이야 받겠지만 유비 아래서만큼은 아니다.
그래서 제갈량은 유비의 결정을 공개적으로 뒤집지 않는다. 주군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는 것, 이것이 그의 원칙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실패를 대비한다. 그것이 바로 그의 진가다.

222년, 결국 무리하게 출병한 유비가 이릉에서 육손에게 참패한다. 촉한의 주력군이 궤멸하고 유비는 백제성으로 도망친다. 이때 제갈량이 한 일은 무엇일까. 첫째, 수도인 성도의 질서를 유지한다. 패전 소식에도 불구하고 촉의 조정은 흔들리지 않는다. 둘째, 오나라와의 관계를 복원한다. 유비가 죽기 직전 제갈량은 이미 손권과의 재동맹을 준비하고 있었다. 셋째, 유선의 후견 체제를 구축한다. 223년 유비가 죽고 유선이 즉위할 때, 권력 공백은 발생하지 않는다. 제갈량은 유비의 잘못된 선택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그 실패가 자신의 정치적 생명까지 끝내지 않게 했다.

제갈량은 225년 남만을 정벌한 뒤 227년, 「출사표(出師表)」를 올리고 북벌을 시작한다. 이 글에서 제갈량은 자신의 참모론을 명확히 밝힌다. "신은 본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선제께서 세 번 찾아주셔서 천하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선제께서 돌아가실 때 신에게 후사를 부탁하셨으니, 신은 죽을 때까지 이 책무를 다하겠습니다." 이것은 감정적인 충성이 아니다. 계약적 충성이다. 유비가 자신을 발탁했고, 유선을 부탁했으니, 그 계약을 이행하는 것. 이것이 제갈량의 논리다. 그러나 북벌은 모순처럼 보인다. 국력이 부족한데 왜 북벌인가? 제갈량의 판단은 이랬다. "촉한은 기다릴수록 불리하다. 위나라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고, 촉한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진다. 그렇다면 지금 싸워야 한다." 물론 제갈량도 알고 있었다. 북벌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실제로 제갈량은 다섯 차례 북벌을 감행하지만 한 번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채 234년 다섯 번째 북벌에서 오장원에서 병사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제갈량이 패배하면서도 촉한을 망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매번 신중하게 출병했고, 불리하면 즉각 철수했다. 승리를 강요받았지만, 파멸을 택하지는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촉한은 263년 멸망하기 까지 29년을 더 버틴다. 제갈량이 남긴 행정 체계, 인재 시스템, 군사 조직이 그만큼 견고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천하를 통일하지 못했지만 국가라는 시스템을 남겼다.

순욱의 출신을 정확히 보자. 영천 순씨, 당대 최고의 명문가다. 그러나 순욱의 위치는 단순히 '명문가 출신'이 아니었다. 순욱은 예주 지역 사족의 대표자였다.
예주는 당시 중원의 핵심 지역이었고 영천은 그 중심이었다. 영천 순씨 외에도 영천 진씨(陳氏), 영천 종씨(鍾氏) 등 유력 사족들이 밀집해 있었다. 순욱은 이들 예주 사족 전체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다. 순욱의 숙부 순상은 삼공을 지냈고, 순욱 자신도 효렴으로 천거되어 벼슬길에 올랐다.
191년, 순욱이 조조를 찾아갔을 때,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었다. 예주 사족 전체의 정치적 선택이었다.
왜 조조였을까? 당시 천하는 혼란했고, 사족들은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동탁의 폭정, 군벌들의 할거, 중원의 황폐화. 사족들에게는 '질서를 회복할 세력'이 필요했다. 순욱은 조조를 그 세력으로 본 것이다.
"지금 천하가 어지러우니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자가 일어나 민심을 수습해야 합니다. 장군께서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한나라를 구할 영웅'이라는 전제다. 예주 사족들이 원한 것은 질서 회복이었고 그 질서는 '한나라'라는 체제 안에서의 질서였다. 새로운 왕조가 아니라, 한나라의 부흥.

196년 마침 수도인 장안에서의 혼란으로 황제가 도망길에 올랐다. 이때 순욱은 조조에게 황제 옹립을 제안한다. "천자를 받들어 천하에 호령하십시오." 이것은 천재적인 정치 전략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조조의 전략이 아니라, 예주 사족의 전략이기도 했다. 예주 사족들이 원한 것은 중원의 안정과 질서 회복, 한나라 체제 내에서의 자신들의 위치 보장, '한실 부흥'이라는 명분 하에 정치적 영향력 확보였다. 헌제 옹립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조조는 '한나라의 이름'으로 질서를 회복하고, 예주 사족들은 '한나라 조정'의 일원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순욱과 조조의 관계는 제갈량-유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의존했지만, 순욱은 조조와 동맹했다. 그것도 예주 사족 전체를 대표해서. 순욱에게 조조는 '주군'이 아니라 '한실 부흥의 파트너'였다.
200년 천하 패권의 향방을 두고 당시 가장 강력했던 군벌이었던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서 맞붙는다. 조조의 병력 2만, 원소 병력 10만. 수적 열세는 명백했고 조조 진영 내부에서도 동요가 일었다. 이때 조조마저 군량도 떨어져가 본진인 허창을 지키고 있던 순욱에게 돌아가는게 어떻느냐는 의견을 편지로 전한다. 이때 순욱이 조조에게 답변했다.
"원소는 모든 군사를 집결해 공(조조)과 더불어 승패를 결정하고자 합니다. 공께서 지극히 약한 것으로 지극히 강한 것을 감당해야하니 만약 이를 능히 제압치 못하신다면 필시 저들이 이를 틈탈 것이니 이는 천하를 가를 관건입니다. 게다가 원소는 평범하여 사람을 끌어모으는 일에는 능하나 그들을 제대로 쓰지 못하니 공께서는 물러나시면 안됩니다.”

순욱은 단순히 조조를 격려한 것이 아니다. 천리 밖에서 원소 진영의 내부 구조를 분석하고 조조의 강점을 명확히 제시했다. 실제로 원소군은 내부 분열로 무너졌고, 조조는 관도에서 승리한다.
관도 대전 이후 조조의 세력은 급속히 확대된다. 하북을 평정하고 형주를 압박했다. 사실상 북방의 지배자가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순욱은 조조의 두뇌였다. 그런데 208년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패하면서 상황이 변한다. 천하 통일의 꿈이 좌절되자, 조조는 '현실 정치'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건안 17년(212년), 동소 등이 조조를 국공으로 벼슬을 높이고 구석(九錫, 신하로서 누리는 가장 큰 특혜 9가지)을 갖춰줘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단순한 작위가 아니다. 한나라의 신하가 아니라, 독립적인 정치 세력의 수장이 된다는 선언이다. 동소 등은 은밀히 순욱을 찾아갔다. 왜 순욱을 찾아갔을까? 순욱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순욱이 반대하면 조조 정권의 핵심인 예주 사족들이 따라오지 않는다. 순욱이 동의해야 이 조치가 '한실 부흥'의 일환으로 포장될 수 있다. 순욱은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니라, 예주 사족 전체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이었다.

그러자 순욱은 이렇게 답한다. "조공은 본래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조정을 진흥시켰으니 그 공훈은 탁월합니다. 하지만 조공께서는 ‘아직’ 충성의 절개(忠貞之節)를 지키고 계십니다. 군사는 남을 사랑하기를 덕으로 한다 하였으니 마땅히 그리하면 안 됩니다."
이 대답에서 핵심은 ‘아직’이라는 한 글자다. '아직 충성의 절개를 지키고 계십니다.' 무슨 뜻인가? 구석을 받으면 더 이상 충성의 절개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까지는 한나라 신하였지만, 구석을 받는 순간 스스로 역적이 된다는 것이다.
순욱은 조조의 야심을 비판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처음 택한 명분'을 지키라고 한 것이다. 순욱에게 조조는 '한나라를 구하는 신하'여야 했다. 그것이 조조가 천하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명분이었기 때문이다. 순욱은 이것을 정치 전략으로 본 것이 아니라, 넘어서는 안 될 선으로 본 것이다. 순욱은 여기서 단순히 개인적 의견을 말한 것이 아니다. 예주 사족들의 입장을 말한 것이다. '우리는 한나라를 구하기 위해 당신을 지지했다. 당신이 한나라를 배신하면, 우리의 동맹은 끝난다.' 하지만 213년, 조조는 위공에 오르고 구석을 받는다. 순욱의 반대를 무시한 것이다. 그리고 순욱을 회남의 수춘으로 보낸다. 명목상으로는 손권을 치기 위한 출정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정에서의 배제다. 조조 세력의 초창기를 제외하고는 조정에서 안방마님 역할을 하던 순욱을 변방으로 보낸 다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수춘에서 순욱은 죽는다. 정확한 사인은 기록마다 다르다. 병사했다는 기록도 있고 조조가 보낸 빈 찬합을 받고 자결했다는 기록도 있다. 중요한 것은 순욱이 이 시점에서 더 이상 조조와 함께 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사실이다.
순욱은 제갈량처럼 '주군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후일을 준비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조조의 변질을 인정할 수 없었고, 그렇다면 함께 갈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순욱은 조조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조의 새로운 길을 따라가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설계한 '한나라 신하 조조'라는 구도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멈춘 것이다. 순욱의 죽음은 개인의 비극이 아니다. 예주 사족과 조조 정권 사이의 명분 동맹이 종료된 것이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시작된다. 220년, 조조가 죽고 조비가 위왕이 된다. 같은 해, 조비는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에 즉위한다. 위나라의 건국이다. 순욱이 그토록 막으려 했던 일이 순욱 사후 7년 만에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진군, 종요 등의 영천 사족들은 위나라 조정의 중임을 맡았다. 순욱의 의지가 그들에게까지 이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위나라 황실이 무너질 때도 침묵했다. 자신들과 같은 사족 출신인 사마씨가 위나라를 찬탈하고 진나라를 세울 때에도 그들은 사마씨에 순응했다.
순욱이 지키려 했던 원칙은 무엇이었는가? '한실에 대한 충성', '정통성의 존중', '찬탈에 대한 거부'. 그러나 예주 사족들은 조비의 찬탈에 순응했고, 사마씨의 찬탈에도 순응했다. 순욱은 원칙을 남겼지만 그 원칙은 그를 따르던 사족들에 의해 두 번 배신당했다.
예주 사족들의 선택을 비난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들의 논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족들에게 중요한 것은 질서와 안정이었다. 한나라가 무너지고 조비가 황제가 되었을 때 사족들은 선택해야 했다. '한나라의 충신'으로 남아 혼란을 연장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여 안정을 확보할 것인가. 그들은 후자를 택했다. 위나라가 무너지고 사마씨가 정권을 잡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질서와 안정이 명분보다 우선했다. 순욱은 달랐다. 순욱에게는 명분이 질서보다 우선이었다. 조조가 한나라를 배신하면 질서를 잃더라도 명분을 지켜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예주 사족 전체가 순욱과 같은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다. 순욱은 예주 사족의 대표였지만 그의 원칙은 결국 개인의 원칙이었다. 순욱은 조조의 성공을 보지 못했다. 물론 조조도 죽을 때까지 황제에 오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의 원칙은 동료 사족들에게 계승되지 못했다. 그러나 역사는 순욱을 '한실 부흥'의 명분을 끝까지 지킨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장소의 출신을 보자. 서주(徐州) 출신이지만 일찍 강동으로 이주했다. 장소는 명문가는 아니지만, 학식과 명망으로 강동 사족 사회에서 인정받은 인물이다.

196년경 손책이 강동을 평정할 때, 장소는 함께 강동이장이라 불리던 장굉과 함께 손책을 도왔다. 손책은 무력으로 강동을 장악했지만, 강동 토착 사족들의 '승인'이 필요했다. 장소는 장굉과 함께 그 다리 역할을 했다. 200년, 26세의 손책이 암살당하며 18세의 손권에게 유언을 남긴다. "내사(內事)는 장소에게 물으라. 외사(外事)는 주유에게 물으라."
이것은 단순한 인사 추천이 아니다. 손책은 권력 분점 구조를 설계한 것이다. 18세의 손권이 홀로 강동을 다스릴 수 없으니, 장소에게는 행정과 정치를, 주유에게는 군사를 맡기라는 것. 이 유언은 장소에게 절대적인 정통성을 부여한다. 손권이 아무리 황제가 되어도 그는 형이 지명한 '내사 책임자'를 함부로 제거할 수 없다. 장소를 건드리는 것은 곧 손책의 유언을 부정하는 것이니까. 비교적 빠르게 죽은 주유에 비해 심지어 장소는 오래 살기 까지 한다. 손권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지경이다.

208년 적벽대전을 앞두고, 장소는 조조에게 항복하자고 주장한다. "조조의 군세는 막을 수 없습니다. 항복하여 강동을 보존하는 것이 현실적입니다."
이것은 비겁함이 아니다. 냉정한 현실 인식이다. 당시 조조군은 압도적이었고 손권군이 이길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그러나 손권은 장소의 의견을 거부하고 주유의 주전론을 택한다. 그리고 적벽에서 승리한다.
장소는 틀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장소가 틀렸어도 제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인가?
첫째, 장소의 반대는 예측 가능했다. 장소는 항상 신중론, 보수론을 펼쳤다. 손권은 장소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둘째, 장소의 반대가 오히려 가치가 되었다. "우리 조정에서 가장 신중한 장소조차 두려워한 조조를 우리가 이겼다." 장소의 항복론은 적벽 승리를 더 극적으로 만들었다. 셋째, 장소는 정치적 기반이 있었다. 강동 사족의 대표인 장소를 제거하면 사족 전체가 동요한다.
물론 그렇다고 장소가 마냥 편했던 것만은 아니다. 229년, 손권이 황제에 즉위하자 장소가 신하된 예로 하례를 올렸다. 그러자 손권은 장소의 하례를 받기도 전에 “만약 옛날 장공의 계책같이 했다면 지금쯤 이미 밥이나 빌어먹고 있었을텐데 말이오.” 라고 쏘아붙혔다. 20년이 지난 뒤에도 손권의 마음은 좋지 않았나보다. 이후 기분이 상했는지 장소 또한 늙었음을 이유로 관직에서 사퇴한다.
특히 조정의 원로대신인데도 총리직과 같은 승상에 자신이 임명되지 않은 언짢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촉한의 사신이 오에 와서 촉한을 찬양할때 반박하는 신하가 하나도 없자 손권은 이 꼬장꼬장한 노인이 그리웠는지 강제로 다시 복직시킨다.

마침 이때 요동에 있던 공손연이 오의 신하가 되기를 청하자 손권은 장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신을 보내 공손연을 연나라 왕에 임명하게 했다. 자신의 반대가 소용없자 장소는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오지 않았고 손권도 화가 나서 장소의 집 대문을 흙으로 막았다. 이를 본 장소는 대문 안에 맞담을 쌓는 광기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장소의 예측 대로 요동에 보낸 사신들은 공손연에게 죽고 공손연은 하례품만 챙긴채 오를 배신한다. 이후 손권이 장소에게 사과하고 재물을 내려 구슬려봤지만 장소는 단단히 삐져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결국 손권은 집에 불을 지르면 결국 나오겠지 싶어서 불을 질렀지만 장소는 끝끝내 나오지 않아 결국은 아들이 장소를 업고 뛰쳐 나왔다고 한다. 그때 장소는 여든에 가까운 나이였다. 손권과 장소는 삼십년 세월을 이렇게 톰과 제리처럼 지낸 사이였다.
그런데 장소가 상징적이다. 장소는 항상 손권의 결정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순욱처럼 죽지도 않는다. 그는 계속 살아서 반대한다. 장소의 방식은 이렇다. 결정 전에는 격렬히 반대한다. 결정이 나면 일단 물러난다. 그러나 계속 불평과 경고를 한다. 다음 결정 때 또 같은 방식으로 반대한다.
장소가 손권 아래에서 30년간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손책의 유언이라는 방패. 장소는 손책이 지명한 사람이다. 장소를 제거하는 것은 손책의 유언을 부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