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가 아는 것처럼 수백 년의 삼국시대를 통일한 것은 동남쪽 약소국 신라였다.
가장 약해보였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군사력 때문이 아니었다. 고구려는 더 넓은 땅을 가졌고, 백제는 더 오래된 문화를 가졌다. 그러나 신라는 그들만의 '인재관리 시스템'을 가졌다. 삼한일통전쟁은 단순한 병법의 승부가 아니라, HR 아키텍처의 승부였다.
오늘 우리는 1,400년 전 한반도의 인사 실험에서 배워야 한다. 그것은 역사 공부가 아니라, 조직의 생존 설계도다.

고구려의 마지막 집권자, 연개소문은 처음부터 독재자가 아니었다. 그 역시 나름대로 시대의 문제를 읽었다.
당시 고구려의 왕이었던 영류왕은 당 태종과의 전쟁을 피하려 했다. 그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전쟁 영웅이었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유화책을 폈고 수십 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회복하려 했다. 현대 HR 이론으로 말하자면, 그는 '조직 회복탄력성(Organizational Resilience)'을 선택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을 위시한 강경파 귀족들은 그에 동의하지 않았다. 조직 회복탄력성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고구려를 만드는 것이 먼저였다. 결국 642년, 연개소문은 영류왕과 귀족 180여 명을 살해하고 정변을 일으켰다. 이것은 단순한 쿠데타가 아니라, 의사결정 구조의 극단적 집중화였다.
물론 연개소문 또한 개혁이란 이름 아래 변화를 시도했다. 도교를 수입해 새로운 조직 문화를 만들려 했고, 신진 세력을 등용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현대 조직이라면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나 '조직문화 혁신'쯤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은 '연개소문'이라는 한 사람을 중심으로 작동했다. 신진 세력은 실질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그들은 연개소문의 카리스마에 의존했고, 연개소문이 살아 있는 동안만 체제가 유지되었다.
이것은 바로 '후계자 계획(Succession Planning)의 실패'로 이어졌다. 후계자 계획은 단순히 다음 CEO를 정하는 것이 아니다. 조직의 핵심 역량을 다음 세대로 전이하고, 의사결정 권한을 점진적으로 분산하며, 위기 시에도 조직이 자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연개소문은 권력을 집중시켰으나, 그것을 전이할 시스템은 만들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전쟁의 방식이었다. 연개소문 집권 이후, 고구려는 당태종의 침공을 막아냈다. 안시성 전투에서 안시성주는 당 태종을 물리쳤고 고구려는 끊임없이 버텼다. 수나라와의 전쟁 떄부터 수십년 동안 고구려는 청야입보전술을 택했다. 백성들은 성 안으로 들어가 버텼고 들판은 불탔다. 한 번, 두 번은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전략적 한계를 간파한 당태종은 말년에 이르러 3~5만의 침략군을 소규모로 보내는 반복적인 국지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그때마다 고구려는 들판을 비우고 산성에 틀어박혔다. 결국 고구려의 농토는 황폐하게 변하고 경제는 파탄났다. 이것은 '조직 지속가능성(조직 지속 가능성)' 의 상실이다. 단기 성과를 위해 조직의 기반을 소진하는 구조였다. 국가가 버틸수록 백성은 지쳤다. 특히 과거 고구려 천하관 속에 속해있던 거란, 해, 흑수말갈까지 당에게 회유되었다. 더군다나 몽골고원에 있던 돌궐과 중앙아시아의 철륵 등 고구려와 함께 당에 대항하던 국가들이 차례로 당에게 무너지면서, 고구려는 외교적으로도 고립되었다.

그리고 철혈의 통치자인 연개소문이 죽었다. 그의 아들들은 서로를 죽이려 했고, 장남 연남생은 당나라로 달아났다. 그가 적인 당나라의 선봉장이 되어 고구려로 돌아오자 북방 방어선이 항복했고 연개소문의 동생이던 연정토는 남부 12개성을 들고 신라에게 항복했다. 결국 668년 평양성이 함락된 것은 당의 칼날 때문이 아니라, 조직 신뢰(Organizational Trust)가 먼저 무너졌기 때문이다.
현대 HR 이론에서 말하는 '키 맨 리스크(Key Man Risk)'가 현실화된 것이다. 강력한 CEO가 모든 인사를 쥐고 빠르게 밀어붙이면, 초기 성과는 화려하다. 도교를 들여오고, 신진 세력을 등용하고, 외적을 물리친다. 그러나 그 조직은 CEO의 건강, CEO의 판단, CEO의 승계에 모든 것을 건다. 한 사람이 흔들리면 조직 전체가 흔들린다.
집중화된 의사결정은 속도를 낳지만, 분산된 역량을 만들지 못한다. 합의의 장이 사라지면, 충성의 공공성이 소멸하고, 심리적 계약(Psychological Contract)이 파기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조직'에 충성하지 않고, '나를 살려줄 사람'에게 충성한다.
의자왕 역시 개혁가였다.
그의 아버지 무왕 시대까지만 해도, 백제는 대성팔족의 나라였다. 사씨(사택씨), 해씨, 연씨, 목씨, 국씨, 진씨, 백씨, 협씨 이들은 백제 건국 이래 권력을 나눠 가진 가문들이었다. 무왕의 장군이자 좌평이었던 해수, 국주모의 아버지이자 최고 귀족이었던 사택적덕, 그와 친인척으로 보이는 사택지적 등 이들이 백제를 안정적으로 통치했다. 현대 조직으로 치면, 오랜 기간 검증된 '기득권 경영진(Incumbent Management)'이었다.

그러나 의자왕은 이 구조를 믿지 않았다. 정력적인 국가 운영을 시도했고, 지방 세력을 끊임없이 등용하려 했다. 소외되었던 왕족을 포함해 신진 세력을 불러들이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이른바 '조직 재편'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재편을 넘어 기존 경영진을 밀어냈다.
사택씨는 의자왕 시기 중앙 권력에서 사라졌다. 사택지적비에는 그가 은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비 시대 가장 강력한 귀족이었던 사택씨를 비롯해, 백제 역사 내내 강력했던 해씨 등 이들 대성팔족이 모두 중앙에서 이탈했다. 그 자리는 누가 채웠을까?
각가, 충상, 상영, 계백, 의직, 은상 등. 의자왕 시기 백제의 고위 관료들은 유독 성이 보이지 않거나 특이한 성씨를 가졌다. 이 때문에 이들은 모두 부여씨, 즉 왕족의 일원으로 추측되거나 왕족에서 분화된 신진 세력으로 추정된다. 의자왕은 자신의 혈족으로 경영진을 재편했다. 이것이 바로 '네포티즘(Nepotism)'이다. 창업자 일가와 신진 세력으로 기존 경영진을 밀어낸 것이다.
백제 멸망 5년 전, 의자왕은 41명의 서자와 방계를 좌평직에 임명했다. 좌평은 각 부서의 최고 장관이었다. 그러나 41명이 동시에 좌평이 되자, 좌평은 직책이 아니라 직급이 되어버렸다. 직책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것이다. 팀 없는 팀장, 부서 없는 부장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직함만 있고 실권은 없는, 그러나 대우는 최고급인 왕족들로 조정이 채워졌다.

현대 인사부 이론에서 이것은 '조직 정의(조직 정의)'의 상실이다. 조직 정의는 세 가지 차원으로 구성된다. 분배 정의(누가 무엇을 받는가), 절차 정의(어떤 과정으로 결정되는가), 상호작용 정의(어떻게 대우받는가). 의자왕의 인사는 이 세 가지를 모두 파괴했다.
분배는 혈연으로 왜곡되었고, 절차는 투명하지 않았으며, 기존 경영진은 존중받지 못했다. 대성팔족이 의자왕에 반해 역모를 저질렀을 가능성도 있다. 그들의 안정적 통치에 균열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642년 혹은 655년, 국주모인 사택씨 사망이후 의자왕이 벌인 친위쿠데타에 의해 그들이 사라지고 의자왕 중심의 친위 체제가 급격히 구축되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나·당 연합군이 밀려왔을 때, 백제의 조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계백은 황산벌에서 홀로 싸웠고 웅진을 지키던 예식진은 의자왕을 붙잡아 나당연합군에 항복했다. 백제는 개전 13일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조직 몰입(조직 헌신)이 붕괴된 결과다.
흥미로운 것은 곧바로 이어진 백제부흥운동이다. 수만의 부흥군을 이끈 인물들은 누구였을가? 부여자신(부여자진), 귀실복신, 흑치상지같은 방계 왕족과 목소귀자, 억례복류, 곡나진수같은 호남 지방 중소 귀족 출신들이었다. 부흥운동에 참여한 대성팔족은 사타충의 외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현대 조직에서도 동일한 일이 벌어진다. 최고경영진을 혈연이나 학연으로 뭉치면, 단기적으로는 결속이 강해 보인다. 회의는 빨라지고, 의사결정은 일사분란해진다. 그러나 중간 관리자와 실무진은 '내부 이동성(Internal Mobility)'을 잃는다. ‘내가 오를 사다리’가 보이지 않으면, 구성원 참여도(Employee Engagement)가 급락한다. 기대가 사라지면, 위기 때 사람들은 버티지 않는다. 결국 회사가 망하고 난 뒤에 열심히 일해본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셈과 마찬가지다.
인사는 가문의 족보가 아니라, 인재 파이프라인(Talent Pipeline)이 되어야 한다.
신라의 골품제는 폐쇄적이었다. 진골이 아니면 재상이 될 수 없었고, 6두품은 아무리 뛰어나도 벽에 부딪혔다. 명백한 '유리천장'이다. 그러나 신라는 그 폐쇄성 안에서 '내부 순환의 완결성'을 만들었다.

화랑도는 지배층의 리더십 개발 프로그램(리더십 개발 프로그램)이었다. 젊은 진골들은 화랑으로 수련하고, 전장에서 공을 세우고, 그 공적으로 관직을 얻었다. 현대 기업의 '하이포텐셜(High Potential) 트랙'과 유사하다. 귀산·추항은 백제군 앞에서 죽음을 택했고, 그들의 명예는 신라 전역에 퍼졌다. 관창은 16세에 출전해 두 번 적진에 뛰어들었고, 결국 목이 잘려 돌아왔다. 계백은 그의 목을 보고 "신라에는 어린 소년마저 이러한가."라며 탄식했다.
이것이 바로 '서번트 리더십(서번트 리더십)'의 원형이다. 비녕자, 반굴, 관창 등 귀족층에 해당했던 이들의 솔선수범은 하층민으로 하여금 지배층에 대한 신뢰를 부여했다. 삼국통일의 명장으로만 기억하는 김유신도 젊은 시절, 직접 칼을 빼들고 고구려군에 홀로 돌진해 적장의 목을 취했던 인물이다. 현대 HR 이론에서 말하는 '리더의 진정성(Authentic Leadership)'이 단단한 조직 신뢰를 구축한 것이다.
유명하진 않지만 심나·소나 부자는 전공으로 승진의 사다리를 탔다. 특히 소나는 적과 싸워 전사한 이후 진골만이 받을 수 있는 잡찬 벼슬에 추증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이처럼 신라군 내부에서는 '성과→명예→승진'의 서사가 반복 재생산되었다. 이것은 '역량 기반 HR(역량 기반 인사)'의 전형이다. 누가 왜 올라가는지가 명확했고, 그 기준이 사회적으로 합의되어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혼맥이 충성을 설계했다는 점이다. 왕실과 진골귀족, 김유신과 같은 가야계까지 얽힌 혼인 네트워크는 단순한 사적 유착이 아니었다.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는 김춘추와 혼인해 왕실과 가야계를 연결했다. 김춘추의 딸 지소는 김유신과 혼인했다. 이들은 그야말로 운명공동체였다.
이른바 '전략적 제휴(Strategic Alliance)'와 '이해관계자 정렬(이해관계자 조정)'에 해당한다. 신라가 무너지면 자신의 가문도 무너진다. 국가에 대한 충성이 곧 가족의 존망이었다. '조직 일체감(조직 동일시)'이 극대화된 구조였다. 즉 '국가=가문'의 동형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재교육했다. 화랑도는 단순한 전사 양성소가 아니라, 진골 내부의 끊임없는 재교육과 결속의 장이었다. 현대 기업의 '리더십 아카데미(Leadership Academy)'나 '임원 코칭 프로그램(경영 코칭)'과 같은 역할이었다. 혼맥이 뿌리라면, 화랑은 줄기였고 그들이 활약할 전장은 열매였다.
특히 진골귀족들이 일으킨 비담의 난, 칠숙·석품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신라는 '조직 학습(Organizational Learning)'을 구축했다. 반란을 숙청의 기회로 쓰지 않고 지배권력 재편의 기회로 삼았다. '생산적 실패(Productive Failure)' 와 맞닿는 개념이다. 갈등이 체제를 강화하는 구조를 취하며 신라는 내부 변란이 일어날수록 정권에 반대하는 자들이 사라지며 더욱 공고해졌다. 고구려와 백제가 내부의 갈등을 숙청으로 해결한 반면 신라는 숙청의 확대를 최소화하고 갈등을 흡수해 충성의 재확인(Recommitment)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사–외교–작전이 통합 지휘되었다. 김춘추의 외교(당과의 연합), 김유신의 작전, 왕실과 진골의 결속이 하나의 의사결정 단위였다. 1400년 전, 통합전략이 실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HR이 전략을 실어 날랐다. 김유신은 전쟁터에서 싸우는 장군이 아니라, 인사와 작전을 동시에 설계하는 CHRO 겸 COO 였다.
신라의 시스템은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무척 폐쇄적이었으나 내부 순환(Internal Mobility)이 명확했고 승진의 서사(커리어 내러티브)가 일관되었으며 성과와 보상의 연결(Pay-for-Performance)이 신뢰받았다. 중요한 것은 '누가 왜 승진하는가'가 사회적으로 합의되어 있느냐다. 절차 정의(절차적 정의)가 확립되면 조직은 버틴다. 그리고 지배층이 솔선수범하면 리더 신뢰(Trust in Leadership)가 형성되고 자연스레 조직 구성원은 이들을 따라 목숨을 바칠 뿐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직을 변화시키기 위해 개혁을 시도했다.
새로운 세력을 불러들이고 새로운 사상을 도입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은 '변화 관리(Change Management)'의 실패로 귀결되었다.

신진 세력은 실질적인 역량이 없었고 기존 세력은 밀려났으며 중간층은 기대를 잃었다.
변화에 대한 저항(변화에 대한 저항)을 관리하지 못하고 조직 준비를 확보하지 못한 채 겉으로 보이는 구조만 바꿨다.
신라는 달랐다. 폐쇄적이었으나 내부 순환이 작동했고, 지배층이 솔선수범했으며, 인사와 전략이 한 몸으로 움직였다. 삼한일통이 주는 교훈은 단순하고 분명하다. 신라가 이긴 것이 아니라 신라의 인재관리 시스템이 백년 전쟁을 운영 가능하게 만들었다. 통일은 병력의 승부가 아니라, '인재 파이프라인–리더십 개발–조직 신뢰–전략 실행'의 통합이 작동했느냐의 승부였다.

① 당신의 조직은 '키 맨 리스크'에 노출되어 있지 않은가?
연개소문처럼 강력한 리더가 모든 것을 쥐고 있다면, 초기 성과는 화려하다. 그러나 그 리더의 건강, 그 리더의 판단, 그 리더의 승계에 모든 것을 건다. 후계자 계획(승계 계획)은 단순히 다음 리더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핵심 역량을 다음 세대로 전이하는 한편 의사결정 권한을 점진적으로 분산하며 위기 시에도 조직이 자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한 번 잃은 공정성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
② 당신의 조직에 '조직 정의'가 있는가?
의자왕처럼 지배층을 혈연으로 뭉치고 41명을 고위직에 앉히면 단기적으로는 회의실이 조용해진다. 리더가 원하는 대로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조직 정의의 세 가지 원칙 (분배 정의, 절차 정의, 상호작용 정의)가 무너지면, 중간 관리자와 실무진은 "내가 오를 사다리"를 잃는다. 직책 인플레이션은 직함을 늘리지만 실권은 주지 않는다. 구성원 참여도가 급락하고, 위기 때 계백처럼 홀로 싸우는 사람만 남는다. 네포티즘(족벌주의)을 경계하라.
③ 당신의 조직에는 '인재 파이프라인'이 있는가?
신라의 화랑처럼 리더십 개발 프로그램이 작동하는가? 누가 왜 올라가는지, 성과와 보상이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명확한가? 역량 기반 HR(Competency-based HR)로 '성과→명예→승진'의 서사가 반복 재생산되는가? 그리고 지배층이 솔선수범하는가? 관창처럼 먼저 전장에 뛰어드는 리더가 있는가? 서번트 리더십과 진정성 리더십이 조직 신뢰(조직 신탁)를 만든다. 서사가 없으면 기대도 없고 기대가 없으면 조직 몰입(Organizational Commitment)도 없다.
④ 갈등과 실패를 '조직 학습'의 기회로 쓰는가?
고구려는 영류왕을 죽였고 백제는 대성팔족을 밀어냈다. 신라는 비담의 난을 '조직 학습(조직 학습)'의 기회로 썼다. 이른바 '생산적 실패(Productive Failure)' 개념이다. 실패를 숙청하지 말고 조직 재편의 연료로 써라. 변화 관리(변경 관리)는 저항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을 흡수해 충성의 재확인(Recommitment)으로 전환하는 것이 더 현명한 판단으로 이어지는 결과일 수 있다.
⑤ HR이 전략 실행의 파트너인가, 아니면 행정 지원 부서인가?
신라는 인사–외교–작전을 한 팀으로 묶었다. 김유신은 단순한 장군이 아니라, 인사와 작전을 동시에 설계한 CHRO 겸 COO였다. 현대의 '크로스 펑셔널 팀(Cross-functional Team)'이나 '통합 전략 실행(통합 전략 실행)'과 같다. HR이 실질적으로 전략을 실어 나르지 못하면 전략은 종이나 모니터 안에만 머문다. HR을 전략적 비즈니스 파트너(Strategic Business Partner)로 만들어라. 아니면 내가 스스로 전략적 비즈니스 파트너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보자.

이렇듯 삼국의 흥망은 전장에서 갈린 듯 보이나, 실은 HR 아키텍처에서 결정되었다.
고구려는 카리스마적 리더의 후계자 계획에 실패했고 키 맨 리스크가 현실화되었으며 조직의 회복 탄력성이 청야전술과 함께 무너졌다.
백제는 네포티즘으로 조직 정의를 상실했고 직책 인플레이션으로 인재 파이프라인을 막았으며 중간 관리층의 심리적 계약마저 파기되었다.
신라는 가장 폐쇄적이었으나 그 안에서 내부 순환이 작동했고 리더십 개발 시스템이 확립되었으며 조직 학습으로 갈등을 흡수했고 인사–전략–실행이 통합되어 발빠른 의사결정이 한 방향으로 합의되었다.
역사는 늘 반복한다. 오늘도 어딘가의 조직은 '독점'으로 빠르게 치고 나가고 있고 어딘가의 조직은 '혈연'으로 상층을 채우고 있으며 어딘가의 조직은 '내부 순환'으로 신뢰를 쌓고 있다.
20년 후 살아남는 조직은 칼날이 날카로운 조직이 아니라 인재관리 시스템을 제대로 설계한 조직일 것이다.
칼이 날카롭든 무디든 결국 사람이 쥐고 흔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