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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事萬史: 신뢰가 무너뜨린 조선의 3백년

人事萬史: 신뢰가 무너뜨린 조선의 3백년

이괄, 공신에서 역적이 된 이유
인사기획리더십리더임원CEO
영준
유영준Dec 2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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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정공신에서 역적으로, 한 달의 비극

1624년 1월, 조선의 북방을 지키던 12,000명의 정예군이 갑자기 남하하기 시작했다. 지휘관은 인조반정 2등 공신이자 부원수 겸 북병사로서 북방을 지키는 이괄이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인조는 그에게 "감히 한번 죽기로 싸워 나라의 은혜를 갚지 않겠습니까"라는 충성 맹세를 들으며 북방의 중책을 맡겼던 인물이었다. 무엇이 충신을 역적으로 만들었을까?

2. 논공행상이 아닌 신뢰의 문제

흔히 이괄의 난은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반정에서 실제 반정군을 이끈 실무 책임자였지만 1등 공신이 되지 못한 것에 분노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록을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괄은 지금의 서울시장 겸 수방사령관에 해당하는 한성부 판윤이라는 고위직에 올랐다. 한성판윤은 육조판서와 동급인 정2품 경관직으로 '9경'이라 불리던 최고위직이었다. 당시 1등 공신이었던 김류는 "이괄은 공이 많으니 변방이 아닌 도성에 두어야 한다"고 건의할 정도였다. 심지어 이괄이 2등 공신이 된 것에 대해 공신 책봉 당시 이괄은 이미 평안도 부원수로 떠난 뒤였다. 한양에서 신하들 앞에서 불평을 늘어놓을 기회조차 없었다.

진짜 문제는 신뢰의 갑작스러운 붕괴였다.

3. 조선의 방패를 맡은 남자

이괄이 평안도 부원수로 임명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북방의 후금은 점점 강성해지고 있었고 조선 침공의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당장 1619년, 명을 도우러 파병된 조선군 1만5천명 중 8천 이상이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했다. 당시는 전쟁 직전의 비상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국방을 책임졌던 도원수 장만의 청에 따라 이괄은 부원수 겸 북병사로 임명되었다. 장만은 문인 출신이었지만 강직한 성품을 높이 평가받아 전국의 군사 활동을 총괄하는 도원수가 되었다. 그가 직접 이괄을 청한 것은 북방을 지킬 수 있는 능력 있는 장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출발하는 날, 이괄은 인조 앞에서 말했다.

"신이 이 중임을 받고 밤낮으로 떨리고 두렵습니다. 금년에 불행하게도 적병이 침입해 오면 군사의 많고 적음과 강하고 약한 차이가 현격히 다를 것이니 앞으로 어떻게 당해내겠습니까. 그러나 감히 한번 죽기로 싸워 나라의 은혜를 갚지 않겠습니까."

이괄은 구주와 태천은 성채가 없어 방어가 어렵고, 영변이 주둔하기 적합하다는 구체적인 방략도 제시했다.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정보 수집과 전략 수립을 할 줄 아는 장수였다.

인조는 "도원수와 자네가 가니 서쪽의 근심을 전부 잊을 수 있다"며 굳건한 신뢰를 보냈다. 그에게 12,000명의 정예병을 맡겼고, 후에 추가로 전라도 군사까지 더 보냈다. 이것은 당시 조선이 동원할 수 있는 최정예 전력이었다. 북방 후금에 대비해 강병을 육성하고, 국경을 지키는 임무. 조선의 운명이 이괄의 손에 달려 있었다.

4. 고변 한 건이 무너뜨린 모든 것

1624년 1월 17일, 이괄이 정충신, 한명련 등과 함께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이 들어왔다. 특히 그의 아들 이전이 반역에 가담했다는 고변이었다. 정충신은 당시 안주목사로 평안도에서 서울로 내려오는 주요골목을 지키던 장수였으며 이괄과 절친한 사이였다. 한명련은 천민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려 밑바닥부터 당상관까지 출세한 인물이다. 최근 영화 전,란의 주인공인 강동원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한명련은 당시 명나라 장수 마귀가 조선군 4대 양장 중 하나로 꼽았던 명장으로, 이름값만 보면 오히려 이괄보다 위였다.

인조는 처음엔 이괄을 믿었다. "이괄이 반역했을 리 없다"며 비호했다. 김류 또한 이괄을 두둔했다. 하지만 다른 1등공신이었던 이귀는 표독스러울 정도로 이괄을 잡을 것을 역설하며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당시 조정에선 이괄은 믿을만하니 이괄의 아들인 이전 정도만 불러다 문초해보고 돌려보내자고 하였지만 이귀는 강경했다. 이귀는 "군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 아들 잡혀가는 걸 그냥 지켜만 보겠는가. 일단 이괄을 체직해놓은 후에 조사하고, 결백이 밝혀지면 복직시키자."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인조는 절충안을 냈다. "이전만 데려오라."

이것이 파국의 시작이었다.

금부도사가 이괄의 군영에 도착했을 때, 이괄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아들을 보내면 아들은 죽을 것이고,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었다.

"아들이 역적인데 아비가 어찌 무사하겠느냐!"

이괄이 금보도사를 죽이며 했다던 이 한 한마디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결국 이괄은 금부도사를 베어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5. 조선 최악의 내전이 시작되다

이괄은 12,000명의 북방 정예군과 함께 항왜(항복한 일본군) 100여 명을 전력으로 활용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투항한 일본 병사들은 뛰어난 검술과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이괄군의 핵심 타격대가 되었다.

한명련도 이괄과 함께 반란에 가담했다. 금부도사에게 붙잡혀 호송 중에 이괄에게 구출되어 합류했다는 설과, 자신을 잡으러 온 금부도사를 죽이고 30여 기병을 이끌고 합류했다는 설이 있다.

어쨋든 그들의 군대는 일사불란했다. 관군들은 후금에 대비한 정예병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괄군은 관군을 우회하거나 격파하며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심지어 산길을 통해 진군하며 청야전술까지 사용했다. 자기 나라 땅에서 모든 것을 불태우고 가면서까지 관군의 추격을 따돌렸다.

장만은 평양 남쪽 황주에서 이괄을 막으려 했지만 이괄군은 산속으로 숨어 이동했고 평양을 우회해 배후로 돌아갈 틈을 내주고 말았다.

인조는 자신이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맡긴 정예군에게 쫓겨 충청도 공주로 도망쳐야 했다.

이괄은 손쉽게 한양을 점령하고 선조의 10번째 서자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했다. 이괄은 조선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칼을 일으켜 두 왕을 세운 인물이 되었다.

6. 친구의 칼날이 부른 역전극

하지만 이괄은 치명적 실수를 범했다. 인조를 뒤쫓지 않고 한양에서 안일하게 시간을 보낸 것이다.

다음날, 이괄은 친구 정충신의 진영을 공격하기로 했다. 정충신은 고변에 함께 이름이 올랐지만, 실제로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군무지인 안주를 이탈하여 도원수부에 합류해 관군을 이끌고 이괄을 막아섰다. 정충신은 임진왜란 때 권율 휘하에서 싸운 장수였다. 그는 10대의 나이에 전라도에서 의주까지 승전보를 단신으로 전해 면천되었던 인물이자 권율과 이항복이 아끼던 인재였다. 정충신은 한양 북쪽 안령(무악재)을 야음을 틈타 점령했다.

전투에 자신있었을까. 이괄은 백성들에게 방을 붙여 자신이 관군을 깨뜨리는 것을 구경하라고 했다. 그는 전투가 시작되자 항왜 검객들을 풀어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소드마스터급 항왜들의 검술은 관군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선봉이었던 선천 부사 김경운이 전사하고, 전투는 4시간이나 지속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이괄군의 상징과도 같았던 백전노장 한명련이 화살에 맞아 부상으로 전선을 이탈했다. 때마침 한명련과 외모가 닮은 이양이라는 군관이 탄환에 맞고 전사하자 관군의 장수였던 남이흥이 기지를 발휘해 "역적 한명련이 죽었다! 역적 이괄이 도망친다!"라고 외쳤다.

화약 연기로 시야가 가려진 이괄군은 그 소리를 듣고 사기가 떨어지며 이괄의 명령도 무시하고 전부 도망쳤다. 관군은 400여 명의 머리를 베고 300여 명을 사로잡았다. 성벽 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한성 주민들은 이괄군이 패배하자 직접 서대문을 지키던 이괄군을 몰아낸 다음 성문을 걸어 잠가버렸다.

이괄은 겨우 남대문으로 입성했지만, 지킬 병력이 없어서 한양에서 물러났다.

한양 점령 단 하루, 실질적으로는 한 밤 만의 일이었다. 삼일천하. 패배한 이괄은 경기도 이천으로 패주했다. 하지만 도원수 장만과 정충신이 이끄는 관군이 맹렬하게 추격해왔다. 결국 이천에서 이괄은 취침 중 부하인 이수백과 기익헌에게 배신당했다. 그들은 이괄의 목을 베어 관군에 가져갔다. 형 이적, 부하 한명련도 함께 목숨을 잃었다. 파죽지세로 한성을 점령했던 그들치곤 허망한 최후였다.

7. 반란이 남긴 것

이괄의 난이 진압되었지만, 그 후폭풍은 상상을 초월했다.

먼저 이괄군과의 전투에서 조선은 약 15,000명의 정예병을 잃었다. 이것은 인조가 이괄에게 준 12,000명과 추가 병력, 그리고 전투 과정에서 소모된 병력을 합친 숫자였다. 광해군의 사르후 전투 원정으로 이미 큰 타격을 받았던 조선군은 이제 회복 불가능한 수준까지 약화되었다. 정충신과 장만 같은 장수들이 있었지만, 병사가 없었다. 후금의 침략에서 도성을 구원할 전략기동이 가능했던 정예병은 이괄의 반란으로 모두 사라졌다. 더 치명적인 것은 평안도 일대의 방어 체계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괄과 함께했던 장수들 중 일부는 역적으로 몰릴까 두려워 도망치거나 아예 후금에 투항했다. 특히 이괄의 부하였던 한명련의 차남 한윤은 관군의 추격을 피해 후금에 망명했다. 그는 천명제와 숭덕제의 신임을 받아 관직에 올랐고, 조선 침공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정묘호란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한윤과 함께 후금으로 도망친 이들은 조선의 내부 사정을 낱낱이 알렸다. 조선의 군사력이 얼마나 약한지, 방어선이 어디인지, 어떤 루트로 침공하면 되는지—바로 이괄이 한양으로 진격했던 그 길을 알려주었다. 이괄군의 핵심 전력이었던 항왜들은 안령(무악재) 전투에서 섬멸당했다. 살아남아 경상도로 도망친 항왜들은 그곳에서 같은 항왜 출신 장수 김충선을 만났다. 김충선은 추격전을 벌여 서아지를 비롯한 반란에 가담한 항왜들의 목을 베었다.

이괄의 난은 이후 3백년 역사를 결정짓는다. 이괄의 난 이후 불과 3년 뒤 정묘호란이 일어나고 12년뒤인 1636년엔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후금(청)이 두 차례나 조선을 침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괄의 난으로 조선의 북방 방어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정예병은 없었고, 방어 전략은 적에게 노출되었으며, 북방의 협력 세력은 도주하거나 배신했다. 정묘호란 때 장만은 70세가 넘은 노구를 이끌고 출정했지만 제대로 된 병력이 없었다. 정충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명장이었지만, 이괄의 난이 앗아간 정예병을 되돌릴 수 없었다.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혀 45일간 버티다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해야 했던 굴욕. 그 뿌리에는 이괄의 난이 있었다. 하지만 더 중요하고 치명적인 변화가 있었다.

8. 신뢰의 붕괴

이괄의 난 이후 조선 조정은 무신들을 신뢰하지 못했다. 반대로 무신들도 조정을 신뢰하지 못했다. 2등 공신이 하루아침에 역적이 되는 것을 본 이후, 누가 목숨 걸고 충성하겠는가? 정충신의 휘하에서 이괄을 토벌하고 1등 공신으로 추천받아 두각을 드러낸 임경업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그 역시 결국 인조에 의해 역모 혐의를 받고 숙청당했다.

또한 정묘호란 당시 안주성을 방어하던 남이흥은 “조정에서 나로 하여금 마음대로 군사를 훈련하고 기를 수 없게 했는데 이제 강한 적을 대적하게 되었으니 죽는 것은 내 일이나 다만 마음대로 훈련하지 못했던 점이 한이로다.” 라고 한탄하며 화약고에 불을 질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결국 붕괴된 신뢰는 이후 3백년의 조선 역사를 굴종으로 밀어넣고 말았다.

이괄은 선조 말부터 30여 년간 관직 생활을 했다. 제주 목사, 북병사,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거치며 성실한 무관으로 평가받았다. 인조반정 때는 착호갑사를 이끌고 선봉에 섰다. 반정 후에도 인조는 그에게 전폭적 신뢰를 보이며 조선의 운명을 맡겼다. 장만은 그를 부원수로 청했고 정충신은 친구로 지냈으며 한명련은 함께 싸울 전우였다. 하지만 단 하나의 고변, 단 하나의 의심이 30년 쌓은 신뢰를 무너뜨렸다.

더 치명적인 것은 절차의 문제였다. 인조가 정말로 이괄을 신뢰했다면 직접 불러 사실 관계를 확인했어야 했다. 하지만 선택한 방법은 이도 저도 아닌 "아들을 잡아오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괄에게 "나는 너를 의심한다"는 메시지였다.

10. 현대 조직에 주는 교훈

1) 의심의 절차를 투명하게 하라

이괄 사건의 핵심은 불투명한 의심 처리 과정이었다. 조정은 고변을 받고 이괄을 의심했지만, 정작 이괄 본인과는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않았다. 아들을 잡으러 금부도사를 보낸 것은 일방적 조치였다.

이귀의 주장은 합리적이었다. "군권을 쥔 사람이 아들 잡혀가는 걸 그냥 지켜만 보겠는가. 일단 이괄을 체직해놓고 조사하자. 결백하면 복직시키면 된다."

하지만 인조는 이 조언을 듣지 않았다. 이괄을 믿는다면서도, 정작 그를 보호하는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현대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직원에 대한 의혹이나 감사가 필요할 때, 절차가 불투명하면 신뢰는 순식간에 무너진다.

"왜 나를 의심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설명 없이 조사부터 시작하면, 그것은 신뢰의 파괴로 이어진다. 더 나아가 이괄처럼 "어차피 나는 끝이다"라는 자포자기를 만들 수 있다.

2) 과거의 공로가 현재의 신뢰를 보장하지 않는다

이괄은 인조를 왕위에 올린 반정의 2등 공신이었다. 30년 관직, 인조반정의 선봉, 한성판윤이라는 고위직. 하지만 그 공로는 한 건의 고변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조직에서도 "저 사람은 오래 일했으니까", "저 사람은 공로가 많으니까" 하는 막연한 신뢰는 위기 상황에서 쉽게 무너진다.

신뢰는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강화해야 하는 관계 자산이다. 과거의 공로는 과거의 것일 뿐이다. 인조가 이괄에게 필요했던 것은 "나는 당신의 과거 공로를 기억한다"가 아니라 "지금도 나는 당신을 믿는다"는 메시지였다.

출발하는 날 인조는 "도원수와 자네가 가니 서쪽의 근심을 전부 잊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후, 그 신뢰는 어디로 갔는가?

3) 핵심 인재 한 명의 이탈은 조직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다

이괄은 단순히 한 명의 장수가 아니었다. 그는 12,000명의 정예병을 통솔하고, 북방 방어 전략을 수립하며, 조선의 생존을 책임지는 핵심 인재였다. 그 한 명을 잃으면서 조선은 3백년의 역사를 나락으로 밀어넣고 말았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괄을 진압한 장수들이다. 정충신은 권율 휘하에서 임진왜란을 경험한 장수였고, 장만은 인조반정 1등 공신이었다. 그런 인물들이 있었지만 정예병이 없어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막지 못했다.

현대 조직에서도 핵심 인재 한 명을 잃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그 사람이 가진 네트워크, 노하우, 신뢰 관계가 모두 사라지고, 때로는 경쟁사로 넘어가 조직의 약점을 알려줄 수도 있다. 이괄의 부하 한윤처럼.

4) 추정이 아닌 사실로 대응하라

인조 정권은 "이괄의 아들이 역모에 가담했다"는 주장을 믿었다. "정충신과 한명련도 함께 모의했다"는 고변도 있었다. 하지만 정충신은 무고했고, 실제로 이전이 무엇을 했는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추정으로 사람을 대했고, 그 결과는 재앙이었다. 고변을 한 문회는 나중에 수많은 사람들을 역적으로 무고하다가 귀양을 가고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이미 이괄의 난은 일어난 뒤였다.

HR에서도 마찬가지다. 소문, 추정, 누군가의 일방적 주장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조치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이괄은 한양을 점령한 뒤 단 하루 만에 패주했다. 역사는 그를 "삼일천하"의 대명사로 기록했다.

하지만 정작 더 큰 패배자는 인조와 조선 조정이었다. 그들은 충성스러운 장수 한 명을 역적으로 만들었고, 그 대가로 두 차례의 전쟁에서 대패한 것도 모자라 조직 전체가 붕괴하는 영향을 낳았다. 실제로 인조는 이괄의 난 이후 속이 좁아지고 의심이 많아진다.

결국 조선은 단 한 명의 신뢰를 잃고 3백년의 미래를 잃었다. 조직의 리더가 신뢰를 철회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한번 무너진 신뢰는 되돌릴 수 없고, 그 파장은 조직 전체로, 그리고 미래로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이괄에게 필요했던 것은 논공행상이 아니었다. "나는 당신을 믿는다"는 명확한 메시지였다. 그것이 없었기에, 충신은 역적이 되었고, 조선은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다. 신뢰의 붕괴는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조직 전체로 번져나간다. 난이 진압된 이후, 한양에서는 "장만이 볼만이요, 이괄은 꽹괄"이라는 유행어가 생겼다. 장만은 볼 만했고, 이괄은 관군의 꽹과리 소리에 놀라 달아났다는 뜻이다. 그들의 이름에서 따온 말장난이다.

하지만 진짜 교훈은 다른 곳에 있다. 신뢰는 천천히 쌓이지만, 한순간에 꽹가리 소리처럼 한 순간에 무너진다. 그리고 그 대가는 상상을 초월한다.


영준
유영준
일과 사람을 잇는 한량
일과 사람을 잇는 한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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