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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事萬史 : 인사가 가른 천하의 향방

人事萬史 : 인사가 가른 천하의 향방

왕망과 유수
리더십시니어리더임원CEO
영준
유영준Feb 12,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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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하를 가른 14년,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었다

기원후 9년 정월, 왕망은 낙양의 황궁에서 황제의 옥새를 받아들었다. 한고조 유방 이래 200년을 이어온 한 왕조는 그렇게 끊겼고 신나라가 세워졌다. 그는 스스로를 섭황제라 칭하며 고대 주나라의 이상 질서를 회복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중국은 오랜 혼란 속에 있었다. 한무제의 무리한 흉노 정벌과 서역 원정의 후유증은 쉽게 치유되지 않았고, 전한 말기에 이르러 외척과 환관의 전횡, 토지 겸병으로 인한 농민의 몰락, 빈부 격차의 심화 등 말기왕조의 증상이 또렷해졌다. 백성들은 변화를 원했고 왕망은 그 변화의 구원자로 등장했다.

개혁은 거대했다. 토지 개혁, 화폐 개혁, 노예제 폐지, 관직 재편. 왕망은 경전에 근거한 이상 국가를 설계했고 그것을 현실에 구현하려 했다.

그러나 불과 14년 뒤인 23년 10월 6일, 그는 반란군에게 포위된 장안의 궁궐 미앙궁에서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상인 두오가 그의 목을 베었고, 그의 시신은 백성들에게 찢겼다. 그의 혀는 조각조각 잘렸고 머리는 장터에 내걸렸다. 새로운 유교질서를 천명하며 나라이름까지 새로울 신으로 지었던 신新나라는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역사에서 지워졌다.

그로부터 2년 뒤인 서기 25년 6월, 한왕조의 방계황족이었던 유수는 하북의 호현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그의 나이 불과 서른 살이었다. 그는 왕망에 의해 무너진 천하를 다시 세우겠다고 맹세했고 결국 성공했다. 십여년이 지난 서기 36년, 그는 천하를 통일했고 후한은 이후 200년을 이어갔다. 역사는 그를 광무제라 부른다.

같은 혼란, 같은 시대, 같은 중국 땅. 한 사람은 무너졌고, 한 사람은 천하를 다시 세웠다.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군사력의 차이? 시대정신의 변화? 운명의 장난?

아니다. 사람을 어떻게 썼는가였다.

2. 두 사람이 만난 시대, 전한 말기의 대혼란

전한 말기의 위기: 토지 겸병과 농민의 몰락

기원전 1세기 후반, 한 왕조는 위기에 처했다. 귀족과 지방호족의 토지 겸병이 천하의 혼란을 야기하기 시작했다. 귀족과 호족들은 끝없이 토지를 사들였고 세금을 내야 할 자작농은 몰락하여 소작농이나 유민으로 전락했다.

극심한 빈부 격차는 사회를 분열시켰다. 부유한 상인은 황금으로 집을 지었지만 가난한 농민은 나무껍질을 먹으며 겨울을 견뎠다. 외척과 환관의 전횡도 극에 달했다. 황제는 허수아비였고 실권은 당시 외척이었던 왕씨 일족이 쥐었다. 바로 그 중심에 왕망이 있었다.

왕망은 왕씨 외척 출신이었다. 그의 고모 왕정군이 원제의 황후였고, 왕씨 일족은 대대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젊은 왕망은 달랐다. 그는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가난한 선비들을 도왔다. 그는 유교 경전에 밝았고 주례를 깊이 연구했다. 그의 이상은 명확했다. "고대 주나라의 완벽한 질서를 회복하자."

왕망의 평판이 높아지며 그는 최고위직인 대사마에 올랐다. 기원전 5년 그는 황제의 조모인 부씨에게 존호를 올리는 걸 반대했다는 이유로 귀양을 갔는데 많은 관리들은 그가 억울하다고 동정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그의 차남인 왕획이 노비를 함부로 죽이는 일이 벌어지자 왕망은 아들을 심하게 질책해 결국 자결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왕망에 대한 기대로 관리들은 지속적으로 그의 죄를 씻어달라고 탄원했고 결국 왕망은 3년 만에 조정에 복귀한다. 당시 그의 가문은 외척이었기에 황후를 뽑을 때 당연히 왕망의 딸이 황후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왕망은 자신의 딸은 제외하고 황후를 뽑을 것을 청했고 천 명이 넘는 사람이 궁궐에 몰려와 왕망의 딸을 황후로 뽑아야 된다고 청하기까지 했다.

그 후 왕망은 황후의 아버지로서 받는 2억전 중 4천만 전만 받고 3,300만전은 후궁 가문에 나누어주었다. 황후가 2,300만전을 더 내리자 그는 그 중 1천만 전을 친척 중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기까지 했다. 다음해, 전국에 한재가 들자 왕망은 돈 100만 냥과 땅 30경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이런 왕망에 대해 기원후 4년에는 8천 명, 다음해에는 무려 48만명이나 되는 이가 그에게 상을 내려달라 탄원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왕망은 성인의 재림이었고 혼탁한 세상을 밝게 바꿔줄 인물이었다. "드디어 개혁자가 나타났다!" 그러나 14년 후, 그들은 왕망을 찢어 죽였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3. 꿈은 높지만 현실은 시궁창

천자에 오른 9년, 왕망은 가장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왕전제를 통한 모든 토지의 국유화였다. "토지는 왕토다. 사유재산이 될 수 없다."

이론적으로는 완벽했다. 토지를 국가가 관리하고 균등하게 분배하면 빈부 격차가 사라진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토지 측량은 누가 할 것인가? 소유권 분쟁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기존 지주들의 저항은 어떻게 무마할 것인가?

왕망이 임명한 관료들은 '토지는 공공의 것'이라는 명분은 외울 수 있었지만, 실제로 토지를 측량하고 분쟁을 조정하고 저항을 무마하는 능력은 없었다. 결과는? 혼란만 가중되었고 정책은 3년 만에 폐기되었다.

왕망은 재위 기간 동안 무려 다섯 차례나 화폐를 개혁했다. 10년에는 금, 은, 구리, 거북껍질, 조개껍질로 28종의 화폐를 발행했고 14년에는 화천과 화포를 발행했다. 목적은 고대의 이상적 화폐 제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상인들은 새 화폐를 신뢰하지 않았다. 거래는 마비되었고 경제는 붕괴했다. 백성들은 물물교환으로 돌아갔다. 더 심각한 문제는 화폐를 위조하거나 사용을 거부하면 사형에 처했다는 점이다. 수만 명이 처형되었다.

왕망은 노예 매매를 금지했다. "사람은 물건이 아니다." 명분은 옳았다. 그러나 보상책은 없었다. 노비를 소유한 지주들은 반발했고 노비로 생계를 이어가던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졌다. 정책은 곧 철회되었다.

왕망의 개혁은 하나같이 실패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책이 실패하면? "백성이 이해하지 못해서다." 관료가 실패하면? "충성심이 부족해서다." 피드백은 올라오지 않았고 조정은 현실과 점점 멀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자연재해가 덮쳤다. 11년, 황하가 범람해 수십만 명이 죽었고 경작지가 물에 잠겼다. 제방 보수가 필요했지만 예산도 인력도 없었다. 18년에는 대기근이 들었다. 흉년이 들었고 백성들은 굶주렸다. 결국 고향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유민이 급증했다.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산속으로, 숲속으로 그들은 흩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곧 반란군으로 변했다.

18년, 산동 지역에서 기근이 들었다. 백성들은 굶주렸고 유민이 속출했다. 이들 중 일부가 모여 반란을 일으켰다. 지도자는 번충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눈썹을 붉게 칠하고 다녔다. 왕망의 군대와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적미군이라 불렸다. 적미군은 순식간에 수만 명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조직적이지 않았다. 목표도 명확하지 않았다. 다만 "살고 싶다"는 절박함만 있었다.

거의 같은 시기 지금의 호북성인 강하군 신시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지도자는 왕광과 왕봉이었다. 그들은 녹림산을 거점으로 삼았기에 녹림군이라 불렸다. 녹림군은 적미군보다 조직적이었다. 그들은 지역 호족들과 연합했고 나름의 군사 전략도 가지고 있었다.

적미군과 녹림군의 봉기는 왕망 정권에 치명타였다. 왕망은 군대를 보내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왕망의 군대도 사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병사들도 백성이었고 그들도 왕망의 정책에 불만이 있었다. 싸울 이유가 없었다.

4. 왕망의 HR—이상은 완벽했으나 사람은 부재했다

그렇다면 왕망의 HR은 어디가 문제였을까. 그 시작은 인사의 반이라 할 수 있는 채용에서부터 시작한다.

왕망이 원한 사람은 명확했다. 유교 경전에 밝고 언행이 단정하며 고대의 이상 질서를 이해하는 도덕군자.

그는 현량방정이라는 일종의 과거 제도를 부활시켜 전국에서 인재를 모집했다. 선발 기준은 경전 이해도, 도덕적 평판, 명분에 대한 충실도였다. 실무 능력이나 현장 경험은 부차적이었다.

왕망은 직접 시험관으로 나서기도 했다. 그는 응시자들에게 물었다. "주례에서 토지는 어떻게 분배되었는가?" "주나라 화폐 제도의 원리는 무엇인가?" 대답을 잘하면 합격이었다.

결과적으로 왕망 주변에는 '경전을 외우는 사람'은 많았지만, '세금을 걷을 줄 아는 사람', '군대를 지휘할 줄 아는 사람', '민심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현대 HR에서 채용의 기본은 역량 모델이다. 역량 모델은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된다. 지식, 기술, 태도.

왕망의 채용은 태도와 경전 지식에만 집중했다. 기술은 아예 평가 대상이 아니었다.

이는 현대 조직으로 치면 문화 적합성만 보고 채용하는 것과 같다. 조직 문화는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 실행 역량이 없으면 조직은 '좋은 사람들의 무능한 집단'이 된다.

왕전제를 실행하기 위해 왕망은 전국에 토지 측량관을 파견했다. 하지만 그는 토지 제도를 설계하던 실무자가 아닌 경전에 밝은 선비들을 선발했다. 이들은 주례의 정전제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는 토지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 대처할 수 없었고 소유권 분쟁이 발생하면 조정 능력이 없었으며 지주들이 저항하면 협상 기술이 전무했다.

결국 측량은 중단되었고 정책은 실패했다. 왕망은 관료들을 질책했다. "경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경전 이해가 아니라 현장 실무 능력이었다.

그런가하면 왕망의 평가 기준은 단순했다. "정책에 동의하는가?" "고대 제도를 이해하고 따르는가?" 이는 이념 정합성 평가였다. 성과가 아니라 충성도를 측정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한 관료가 화폐 개혁을 집행했는데 경제가 혼란에 빠졌다. 왕망은 물었다. "규정대로 했는가?" 관료는 답했다. "예, 새 화폐를 정확히 배포했고 위조자를 처벌했습니다." 왕망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혼란은 백성이 이해하지 못해서다. 어리석은 백성들을 교화하지 못한 지방관들의 탓이다." 결국 실책에 대한 책임은 사라졌다.

현대 성과관리는 프로세스 평가와 결과 평가라는 두 가지 축으로 나누곤 한다.

왕망의 평가는 순수한 프로세스 평가였다. KPI는 있었으나 OKR은 없었다.

현대 HR에서는 이를 활동 중심 평가의 함정이라 부른다. 사람들은 '일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 집중하고 '실제 성과'는 외면한다. 회의는 많지만 결정은 없고 보고는 많지만 실행은 없는 조직이 탄생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왕망은 재위 기간 동안 다섯 차례나 화폐를 개혁했다. 첫 번째 개혁에서 28종의 화폐를 발행했으나 혼란이 발생하고 상인들이 거부했다. 담당 관료는 처벌받지 않았다. "규정대로 집행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개혁에서 화천과 화포를 발행했으나 또다시 혼란이 왔고 경제가 마비되었다. 담당 관료는 처벌받지 않았다. "고대 제도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개혁도 동일한 패턴이 반복되었다.

왕망은 매번 말했다. "정책은 옳다. 백성이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조직 학습 이론에서는 학습이 일어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피드백, 성찰, 수정. 왕망의 조직에는 이 중 어느 것도 없었다. 피드백은 올라오지 않았고 성찰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수정은 불가능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현대 HR에서 가장 주목받는 평가 방법론 중 하나가 OKR이다. Objective는 무엇을 이룰 것인가, Key Results는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왕망의 화폐 개혁을 OKR로 설정했다면 경제 안정화라는 목표 아래 물가 상승률 5% 이하, 상인 신뢰도 70% 이상, 화폐 유통량 30% 증가 같은 지표를 두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측정했다면 첫 번째 개혁 실패 후 즉시 방향을 수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왕망의 조직은 '옳은 일'만 반복했고 결국 다섯 번 모두 실패했다.

왕망은 모든 권한을 중앙으로 집중시켰다. 정책은 낙양과 장안의 황궁에서 정해졌고 전국의 관료들은 이를 집행만 해야 했다. 왕망은 직접 세세한 부분까지 지시했다. 토지 측량 방법, 화폐 배포 방식, 노비 관리 방법까지.

현장의 의견은 필요 없었고 지방의 특수성은 고려하지 않았으며 피드백은 불충으로 간주되었다.

현대 HR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심리적 안전감이다. 이는 구글의 프로젝트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입증된 개념으로 고성과 팀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심리적 안전감이란 말해도 처벌받지 않는 환경, 실패를 공유할 수 있는 문화, 다른 의견이 존중받는 조직을 말한다.

왕망의 조직에는 이것이 없었다. 다른 의견은 곧 불순이었고 실패 보고는 무능의 증거였으며 질문은 불충이었다. 결과는? 정보가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11년 여름, 황하가 범람했다. 수십만 명이 죽었고 경작지가 물에 잠겼으며 난민이 속출했다. 그러나 지방 관료들은 이미 징후를 알고 있었다. 제방이 낡았고 수위가 위험 수준이었으며 보수가 시급했다.

왜 보고하지 않았을까? 한 관료의 증언이 남아있다. "보고하면 관리 소홀로 처벌받습니다. 예산 요청은 낭비로 간주됩니다. 그래서 모두 침묵했습니다."

결국 황하는 터졌고 왕망은 사후에 조치를 내렸다. "제방을 보수하지 않은 관료를 처형하라!"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심리적 안전감이 붕괴된 조직에서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나쁜 소식을 보고하면 처벌받는다. 사람들은 침묵한다. 정보가 위로 올라가지 않는다. 의사결정이 현실과 괴리된다. 정책이 실패한다. 리더는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는가?"라고 질책한다.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왕망의 조직은 정확히 이 악순환에 갇혔다.

현대 조직론에서는 분권화와 자율성을 강조한다. 특히 다니엘 핑크의 드라이브에서는 인간의 내재적 동기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자율성, 숙련, 목적.

왕망의 조직에는 이 중 어느 것도 없었다. 관료들은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고 성장의 기회는 없었으며 목적은 위의 명령을 따르는 것 그 자체였다. 당연히 동기는 사라졌고 헌신은 증발했다.

하지만 왕망은 신뢰를 요구했다. "개혁은 옳다. 고로 따라야 한다." "나는 천명을 받았다. 고로 충성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부덕을 위조해 하늘의 뜻이라 선전했고 고대 경전을 인용해 자신의 정책을 정당화했으며 반대 의견은 천명을 거스르는 것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신뢰는 명령으로 생기지 않는다. 신뢰는 행동의 누적으로 만들어진다.

왕망은 약속을 지켰는가? 그는 수많은 약속을 했다. "토지를 균등히 분배하겠다"는 약속은 실패하고 폐기되었다. "경제를 안정시키겠다"는 약속은 다섯 번의 화폐 개혁과 다섯 번의 실패로 끝났다. "백성을 구하겠다"는 약속은 민생 악화로 귀결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내가 옳다'고 주장했다. 백성들은 점차 그를 믿지 않게 되었다.

현대 조직론에서 신뢰는 능력, 일관성, 진정성, 배려가 뒷받침 될 때 만들어진다.

왕망의 능력은 실패 반복으로 입증되지 못했다. 토지 개혁 실패, 화폐 개혁 다섯 번 실패, 경제 관리 붕괴. 일관성은 정책이 수시로 변경되고 화폐만 다섯 번 바뀌며 말과 행동이 달랐다. 진정성은 부덕 위조, 명분과 현실의 괴리,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 의심받았다. 배려는 백성보다 이념을 우선하고 고통을 외면하며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으로 결여되었다.

23년 9월, 반란군이 장안을 포위했다. 녹림군과 적미군이 합세하여 황궁을 에워쌌다. 왕망은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나를 지켜라!" 그러나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

궁궐 안에서도 사람들은 도망쳤다. 경호 병력조차 이탈했다. 10월 6일, 왕망은 미앙궁에서 혼자 남았다. 반란군이 쳐들어왔을 때 그의 곁에는 단 한 명의 신하도 없었다. 그는 남색 옷을 입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위기가 타개되길 바랐지만 곧 이어 달려들어온 상인 두오가 그의 목을 베었다. 백성들은 그의 시신을 찢었다. 혀를 조각조각 잘랐고 팔다리를 뜯었다.

이는 신뢰 붕괴의 최종 단계다. 조직이 위기에 처했을 때 사람들이 떠난다면 그것은 신뢰가 없었다는 증거다.

그러나 왕망에게도 장점은 있었다

왕망을 단순히 실패한 찬탈자로만 보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에게는 분명한 이상이 있었다. 토지 겸병을 막고 농민을 구하고자 했고 빈부 격차를 줄이려 노력했으며 노예제를 폐지하려 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생각이었다.

한서를 집필한 후대의 역사가 반고도 인정했다. "왕망의 뜻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방법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왕망은 개인적으로는 청렴했다. 권력을 잡기 전 그는 사치를 멀리했고 가난한 선비들을 도왔다. 자신의 봉록을 나눠주기도 했다. 황제가 된 후에도 그는 화려함을 멀리했다. 궁궐을 확장하지 않았고 사냥을 즐기지 않았다. 이는 당시 귀족들과 대조적이었다.

왕망은 교육을 강조하여 태학을 확충했고 경전 연구를 장려했으며 선비를 우대했다. 이는 문화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왕망의 문제는 의도가 아니라 실행이었다. 그는 이상은 있었으나 현실을 몰랐다. 사람을 존중했으나 사람을 쓰는 법은 몰랐다. 변화를 원했으나 변화를 이끄는 법은 몰랐다. 그리고 그 대가는 참혹했다.

5. 유수의 등장

그렇다면 왕망의 천하를 통째로 가져간 유수는 누구인가

유수는 한 왕조 황실의 먼 후손이었다. 한 고조 유방의 9대손. 정확히는 경제의 7남이자 무제의 이복형이었던 장사정왕 유발의 4대손이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몰락했다. 아버지는 일찍 죽었고 그는 형 유연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유수는 조용하고 신중한 성격이었다. 반면 그의 형 유연은 호탕하고 야심이 있었다. 22년, 형 유연이 말했다. "이 세상은 곧 무너질 것이다. 우리도 일어나야 한다." 유수는 처음에는 망설였다. 그러나 결국 동의했다.

22년 말, 유수는 형을 따라 용릉에서 거병했고 녹림군에 합류했다. 그는 형과 함께 거병한 용릉군을 이끌고 왕망군과 맞서며 천하에 그 이름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녹림군은 승리를 거듭했고 23년 2월 그들은 유현을 황제로 추대했다. 유현은 한 왕실의 후예였으나 능력은 없었다. 그는 술을 좋아했고 결단력이 없었다. 역사는 그를 경시제라 부른다.

그 후 경시제의 즉위에 분노한 왕망이 각지에서 모은 정예대군을 대사공 왕읍, 대사도 왕심으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고 병법에 밝은 자는 모두 징집해 참모로 삼게 하였다. 거기에 거무패라는 장사를 누위로 삼아 호랑이, 표범, 물소 등으로 만든 맹수부대를 동원해 반란을 진압하게 한다. 이들은 당시 유수가 지키고 있던 곤양으로 진격했는데 당시 수가 43만에 달했다고 전한다. 곤양에 있던 병력은 불과 9천명. 결국 녹림군의 장수들은 모두 두려워 곤양을 포기하고 각자 흩어지자는 주장을 한다.

이때 유수는 그들을 설득하며 “지금 우리의 병사와 곡식은 적고 관군이 강하다지만 힘을 합쳐 싸우면 어찌 승리하여 공을 세우지 못하겠습니까. 만약 이대로 흩어져 돌아간다면 적은 더 작게 분열된 우리를 각개격파할테니 단 한명도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완성이 아직 함락당하지 않은 상황에서 곤양을 버린다면 우리뿐 아니라 녹림군의 모든 부대가 전멸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설마 모두 한마음으로 싸워 이름을 세우기보단 배반하여 처자식과 재물을 지키려 하시는 것입니까?”

이 말에 다른 장수들은 모두 발끈하며 자신들을 모욕하지 말라고 한다. 이 말에 유수가 방긋 웃자 장수들은 그제야 유수의 본 뜻을 알고서 그를 도와 싸우기로 결의한다.

적의 선봉 10만이 성 앞에 도착했을 때 유수는 종조, 이일 등을 포함해 13명의 기병만 이끌고 밤을 틈타 남문으로 나갔다. 유수는 힘껏 싸워 포위망을 뚫고 곤양을 빠져나가 원군을 요청한다. 왕망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왕읍은 수십겹으로 곤양을 포위하고 함락 직전까지 내몰았다.

그후 원군을 모은 유수는 1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곤양을 구원하러 다시 달려갔다. 그는 앞장서서 칼을 휘두르고


영준
유영준
일과 사람을 잇는 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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