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5년 교토의 산조가와라.
여인들과 아이들이 처형장으로 끌려왔다. 도요토미 히데쓰구의 정실과 측실, 자녀와 시녀들이었다. 얼마 전까지 히데쓰구는 히데요시의 후임 관백이었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이자 양자였으며 그가 공식적으로 세운 후계자였다.

그러나 히데쓰구는 고야산에서 할복했다. 그의 가족도 살아남지 못했다. 교토국립박물관의 기록에 따르면 히데쓰구의 처첩과 자녀를 비롯한 일족은 산조 강변에서 처형됐다.
그가 직접 세운 후계자가 반역자가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사람을 모으는 데 누구보다 능했다. 그는 혈연이 부족하면 양자를 들였고 오래된 가신단이 없으면 어린 시종을 길렀다. 유력 다이묘와는 혼인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권위를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측근에게 관직을 주고 공을 세운 자에게 영지를 나눠주는가 하면 필요하면 자신의 성과 이름까지 주었다.
그렇게 히데요시는 가족을 만들었다.
문제는 가족의 기준이 바뀌었다는 데 있었다. 어제까지 후계자였던 사람도 오늘은 제거할 수 있었다. 히데요시가 만든 가족은 혈연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직책과 규정으로 결합된 조직도 아니었다.
그 중심에는 오직 히데요시가 있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나 이에야스와 출발점이 달랐다.
노부나가에게는 오랜 시간 오다 가문을 섬긴 오와리의 가신들이 있었다. 이에야스에게도 역시 미카와에서부터 함께한 가신단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갈등과 배신을 겪었지만 자신보다 먼저 존재한 가문과 그 가문을 섬겨온 사람들을 물려받았다. 아니 사실 당대 일본의 다이묘 대부분은 이러한 대를 이은 가신단이 있었다.

그러나 하급 병졸 출신집안인 히데요시에게는 그런 기반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아무런 도움 없이 스스로 올라왔다. 그러므로 자신과 함께 올라갈 사람도 직접 만들어야 했다.
가장 먼저 의지한 사람은 동생 히데나가였다. 히데나가는 군사 지휘만 한 것이 아니다. 영지 통치와 교섭을 맡고 다른 다이묘와 히데요시 사이를 조정했다. 히데요시가 외부로 팽창할 때 내부의 마찰을 받아내는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친족도 끌어들였다. 누이의 아들 히데쓰구는 전쟁과 통치를 경험한 뒤 관백에 올랐다. 히데요시 모친과 친족관계가 있었던 가토 기요마사는 어린 시절부터 히데요시를 섬겼고 전장에서 성장했다. 히데요시의 정실 네네와 가까운 기노시타 가문 출신의 히데아키는 한때 히데요시의 양자가 됐다가 고바야카와 가문으로 입양됐다.
그는 혈연이 아닌 사람도 가까이 두었 키워냈다. 이시다 미쓰나리와 마시타 나가모리 같은 실무형 가신들은 행정과 재정에서 성장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처럼 기존 무사명문과 다른 상인이란 배경을 가진 인물도 중용했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의 양녀와 혼인하며 도요토미 정권의 핵심으로 편입됐고 훗날 오대로의 한 사람이 됐다.

히데요시는 사람을 혈연과 양자, 혼인과 관직, 영지와 은혜로 연결했다. ‘도요토미’라는 성도 그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다만 이를 오늘날의 같은 가족이나 같은 법적 가문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도요토미는 천황에게 받은 씨성인 우지였고 히데요시는 이를 자신이 선택한 여러 유력자에게 나눠주었다. 같은 도요토미 이름을 사용하게 하는 것은 정치적 명예와 결속을 주는 행위였지만 모두를 하나의 이에, 곧 하나의 세습가문으로 합친 것은 아니었다. 마치 왕건이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성을 내리던 것과 유사한 모습이다.
히데요시는 혈연과 가문으로 엮인 기반이 부족했기에 사람을 넓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방식은 하나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친족이었고 누군가는 양자였다. 누군가는 어린 시절부터 길러낸 시종이었으며 누군가는 유력 다이묘였다. 누군가는 행정 실무자였고 누군가는 전장의 무장이었다.
다만 이들은 모두 히데요시를 섬겼다. 그러나 서로를 같은 조직의 동료라고 생각했는지는 조금 다른 문제였다.
1591년, 그의 동생인 히데나가가 죽었다. 같은 해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 쓰루마쓰도 죽었다. 히데요시는 조카 히데쓰구에게 자신이 맡은 관직인 관백의 직위를 넘겨주다. 히데쓰구는 단순한 명목상의 후계자가 아니었다. 그는 오미하치만을 통치했고 기슈와 시코쿠 정벌에 참여했으며 관백으로서 주라쿠다이에 들어갔다.
이 시점에서 도요토미의 승계는 정리된 것처럼 보였다.
히데요시는 태합(일종의 상왕)으로 남고 히데쓰구는 관백이 된다. 히데요시가 세운 권력과 히데쓰구가 이어갈 권력이 공존하는 구조였다.
그런데 1593년 히데요리가 태어났다.
이 한 번의 출생이 기존의 질서를 뒤집었다. 히데쓰구는 히데요시의 누이에게서 태어난 조카였다. 그는 뒤이어양자가 되었고 관백이 되었으며 후계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히데요리는 히데요시의 친아들이었다.
히데요시에게 도요토미의 미래는 더 이상 ‘자신이 선택한 후계자’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피를 이은 아들’의 문제가 됐다.

1595년 히데쓰구는 모반 혐의를 받고 고야산으로 보내졌다. 뒤이어 할복을 명령받았다. 히데쓰구가 실제로 반역을 준비했는지, 히데요시가 어떤 이유로 그를 제거했는지는 기록만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후대에 널리 퍼진 ‘살생관백’이라는 잔혹한 인물상 역시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확실한 것은 히데요리의 출생 이후 히데쓰구의 지위가 위협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히데쓰구만 죽은 것도 아니었다. 그의 가족과 측근까지 제거됐다. 한 사람의 후계자를 지운 것이 아니라 그를 중심으로 형성된 관계망을 없앤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히데요시는 히데요리를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보호를 위해 선택한 방법은 결국 도요토미의 인적 기반을 줄이는 일이었다. 그는 성인이 된 후계자를 없애고 어린아이만 남긴 것도 모자라 계자의 친족과 측근도 제거했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히데요리를 대신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까운 성인 남성은 사라졌다. 결국 그는 혈통은 지켰지만 히데요리에 대한 승계 역량은 약해졌다.
이를 현대 인사이론의 ‘심리적 계약’으로 볼 수 있다.
심리적 계약은 구성원이 조직과 리더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는 비공식적인 의무와 약속을 말한다. 문서에 적혀 있지 않아도 구성원은 자신의 충성과 성과에 대해 조직이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지 기대한다. 승진과 지위, 보호와 인정, 미래의 역할이 여기에 포함된다.
히데요시가 사람들에게 준 약속도 대부분 공식 규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나를 따르라.
공을 세우면 너에게 영지를 주겠다.
내 성을 쓰게 하겠다.
내 가족으로 받아들이겠다.
내 뒤를 맡기겠다.
이 약속들은 분명 처음에는 사람을 움직였다.
가토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 같은 무장들은 히데요시를 따라 전장에서 성장했다. 이시다 미쓰나리 같은 근신은 히데요시의 권위를 바탕으로 행정을 수행했다. 친족인 히데쓰구는 후계자로 세워졌다.
그러나 히데쓰구의 제거는 도요토미 가신들에게 다른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받은 지위가 내일도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다. 가족이라는 이름도 주군의 사정에 따라 취소될 수 있다.
승계 약속도 친아들이 태어나면 바뀔 수 있다. 히데요시가 히데쓰구를 제거해야 했던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결국 문제는 남는다. 조직은 리더의 내면에 있는 사정을 알 수 없다. 구성원은 밖으로 드러난 결정과 처우를 보고 조직의 규칙을 판단한다.
후계자가 하루아침에 반역자가 되고 그 가족까지 처형됐다.
그 순간 도요토미의 사람들은 하나의 사실을 배웠다. 도요토미의 질서는 제도가 아니라 히데요시의 의지였다.

히데요시가 살아 있는 동안 여러 집단은 한 지붕 아래 있었다.
친족과 양자 집단이 있었다. 가토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 같은 전장형 무장들이 있었다. 이시다 미쓰나리와 마시타 나가모리 같은 행정 실무자들이 있었다. 우키타와 모리, 우에스기와 도쿠가와처럼 독자적인 영지와 가신을 가진 대다이묘도 있었다.
이들은 출신이 달랐다. 맡은 역할도 달랐다. 히데요시에게 받은 보상과 기대하는 미래도 달랐다.
이 구조를 ‘조직 단층선’으로 볼 수 있다.
조직 단층선은 구성원들의 출신과 직무, 경험과 이해관계가 겹치면서 조직 안에 잠재적인 하위집단이 형성되는 현상이다. 평상시에는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자원 배분이나 권력 승계처럼 이해가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하면 단층선이 활성화된다. 그때 구성원들은 전체 조직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우선하기 시작한다.
도요토미 정권의 갈등을 흔히 ‘문치파와 무단파의 대립’으로 설명한다.
이 구분은 일정 부분 유효하다. 행정과 병참을 맡은 미쓰나리 계열과 조선 전장에서 싸운 무장들 사이에는 분명한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갈등을 문관과 무장의 대립으로 정리하면 실제 구조를 놓치게 된다.
임진왜란 과정에서 발생한 지휘와 보고의 갈등이 있었다. 특히 이로 인해 생긴 영지와 전공평가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개인적인 원한과 혼인관계가 있었으며 종교와 지역적 배경도 달랐다.

가장 단적인 예가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다. 고니시와 가토는 모두 히데요시가 발탁한 무장이었다. 하지만 고니시는 상인 출신이었고 가토는 무사 집안 출신이었다. 고니시는 가톨릭 신자였으나 가토는 불교 신자였다. 특히 영지마저 이웃했던 둘은 심지어 임진왜란 중에도 서로를 돕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심연 아래에서의 갈등을 히데요시는 자신이라는 중심으로 눌렀다.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기보다 자신과 각각 연결했다.
무장은 히데요시의 은혜를 받았고 근신도 히데요시의 신뢰를 받았다.
유력 다이묘도 히데요시에게 영지와 관직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무장과 근신, 친족과 외부 다이묘가 서로에게 책임을 지는 구조는 약했다.
모든 선이 히데요시에게 모였다. 중심이 사라지자 선들은 서로를 묶지 못했다.
히데요시도 바보가 아니니만큼 승계 문제를 모르지는 않았다. 그는 생애 말년에 유력 다이묘들을 중심으로 한 오대로와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오봉행 체제를 구성했다. 어린 히데요리가 성장할 때까지 여러 세력이 서로 견제하며 정권을 운영하도록 한 것이다.
겉으로는 균형 잡힌 구조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도시이에, 모리 데루모토와 우에스기 가게카쓰, 우키타 히데이에 같은 대다이묘가 히데요리의 후견인이 되었고 이시다 미쓰나리를 비롯한 봉행들은 실무를 담당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함께 일해온 하나의 경영진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들에게 어린 후계자를 지켜달라고 맡긴 연합체에 가까웠다.

이들에게는 일본에서 가장 큰 각자의 영지가 있었으며 각자의 가신단과 수 만에 달하는 각자의 군사력도 있었다. 히데요리를 지키겠다는 맹세는 있었지만 누가 최종 결정을 내리고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강한 집행력은 없었다. 마치 오다의 군단장과 비슷하지만 히데요시가 세운 오대로는 군단장들보다도 그 표층이 얇았다.
히데요시가 죽자 단층선은 빠르게 움직였다.
단순히 문치파와 무단파, 미쓰나리와 이에야스의 갈등만으로 세키가하라를 설명할 수는 없다. 여러 다이묘는 도요토미에 대한 충성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영지와 원한, 혼인과 생존 가능성을 계산했다.
가토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히데요시가 길러낸 무장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미쓰나리가 싫다는 이유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섰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한때 히데요시의 양자였지만 전투 도중 서군을 배신, 동군에 승리에 기여했다.

이들이 곧바로 도요토미를 배신했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동군의 여러 장수도 자신들은 히데요리가 아니라 미쓰나리를 상대로 싸운다고 여겼다. 이에야스 역시 처음부터 도요토미를 공개적으로 폐지하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그 모호함이 도요토미 조직의 상태를 보여준다. 누구도 무엇이 도요토미를 위한 선택인지 합의하지 못했다.
가문을 지키는 것이 히데요리를 지키는 것인지, 미쓰나리를 따르는 것인지, 이에야스와 협력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살아 있을 때 모든 판단은 쉬웠다. 히데요시가 원하는 것이 도요토미의 뜻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자 도요토미의 뜻도 함께 사라졌다.
스타트업과 작은 중소기업은 처음부터 노부나가나 이에야스의 제도를 가질 수 없다.
멋들어진 직무기술서와 승계계획을 먼저 만든다고 조직이 생기지 않는다. 아직 고객도 없고 사람도 없으며 돈도 부족하다. 대표는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부터 불러야 한다. 친구를 데려올 수도, 가족에게 자금을 맡길 수도 있다. 함께 고생한 직원을 팀장으로 세우거나 실력이 조금 부족해도 배신하지 않을 사람에게 중요한 일을 맡길 수도 있다.
이 단계에서는 히데요시의 방식이 필요하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
아무 기반도 없는 곳에서 관계를 만들고 그들에게 미래를 믿게 하는 힘.
직원에게 ‘우리 회사’라는 감각을 주는 힘이다.
문제는 회사가 커진 뒤에도 모든 관계가 대표 개인에게만 연결될 때다. 창업멤버는 자신이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새로 영입된 임원은 자신이 성과로 인정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표의 친족은 자신이 회사를 물려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에 반해 외부 투자자는 전문경영체제를 기대한다.
모두가 같은 회사에 있지만 서로 다른 약속을 믿고 있다.
대표는 어쩔 수 없이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꾼다.

처음에는 오래 일한 사람을 후계자라고 했다가 친족이 입사하면 판단이 달라진다. 전문경영인을 영입해 권한을 주겠다고 했다가 창업멤버가 반발하면 다시 권한을 회수하기도 한다. 가족처럼 일하자고 해놓고 어려워지면 법적 계약만 내민다.
이런 회사에서 갈등은 능력 부족 때문에 생기지 않는다. 각자가 믿고 있던 약속이 달랐기 때문에 생긴다. 그렇다고 히데요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갈 때 대표와 가까운 사람을 버릴 필요는 없다.
다만 관계를 조직의 기준으로 바꿔야 한다.
누가 어떤 조건에서 팀장이 되는지 정해야 한다. 친족과 창업멤버도 같은 평가를 받을 것인지 밝혀야 한다. 후계자가 누구인지보다 후계자가 되는 절차를 정해야 한다. 대표가 과거에 했던 약속과 현재의 인사기준이 충돌한다면 모호하게 덮지 말고 다시 합의해야 한다.
‘가족’ 같은 조직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누가 가족인지 대표 혼자 정하지 못하게 하라는 뜻이다. 그게 가’족’같은 회사를 막는 길이다.
히데요시는 사람이 없던 곳에서 사람을 만들었고 그 힘으로 천하를 통일했다.
그러나 자신이 만든 관계를 자신보다 오래가는 질서로 바꾸지 못했다.
그가 죽자 가족은 남았지만 가문은 남지 않았다.

대표가 가족의 정의를 독점하는 순간 그 조직은 가족이 아니다. 그저 서로 다른 약속을 품고 후계를 기다리는 측근들의 연합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