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더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그 자리를 지키는 일이다. 당태종이 신하들과 이야기한 내용을 적은 책인 정관정요에서도 창업과 수성 중 수성이 더 어려움을 논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포춘지 2024년 조사에 따르면, 시장 점유율 1위 기업의 69%가 왕좌에 오른 지 5년도 되지않아 그 자리를 내주고 있다. 성공한 순간부터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경쟁사들의 끊임없는 추격, 내부 조직의 안일함, 시장 변화에 대한 둔감함. 정상에 오른 리더일수록 더 큰 위기감을 느끼는 이유다.
"1등을 유지하는 게 1등이 되는 것보다 훨씬 힘들어요."
1등 CEO들의 속마음이다. 기업이 성장 궤도에 올라서고 시장에서 입지를 굳혔을 때, 진짜 리더십이 시험받는 순간이 온다.
기원전 221년, 중국 역사상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 역시 같은 고민에 직면했다. 6개국을 제압하고 기본적인 통합 시스템을 구축한 후, 그에게는 더 큰 과제가 남아있었다. 어떻게 이 거대한 제국을 지속가능하게 운영할 것인가? 1편에서 다룬 '제국의 설계'가 하드웨어였다면, 이제는 실제로 작동하는 소프트웨어가 필요했다.
진시황이 완성한 운영 시스템은 외부 위협에 대한 방어, 내부 조직에 대한 관리, 그리고 지속가능한 성장 동력 확보라는 세 축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오늘날 글로벌 기업들이 추구하는 '지속가능한 리더십'의 원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시황의 가장 상징적인 업적인 만리장성 건축은 단순한 방어 시설을 건축하는 일이 아니었다. 이는 새로운 제국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외부 위협을 차단하며 동시에 국력을 과시하는 종합적인 전략이었다.
기존에 연, 조 등 각국이 따로따로 쌓아놓은 성벽들을 연결하고 확장해서, 북방 유목민족(특히 흉노)의 침입을 막는 거대한 방어선을 구축한 것이다. 이는 통일된 중국의 영토를 명확히 하고 내부를 보호하는 국경 정책이었다.
하지만 만리장성의 진짜 가치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 거대한 건설 프로젝트는 전국의 인력과 자원을 결집시켜 제국 시민들에게 소속감과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마치 현대 기업이 상징적인 본사 건물이나 대규모 프로젝트를 통해 임직원들의 자부심을 높이는 것과 같았다.
"우리가 만든 이 장벽을 보라.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다."
만리장성은 진시황이 백성들에게 보낸 메시지였다. 동시에 주변국들에게는 "함부로 넘보지 마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딜로이트 2023년 연구에 따르면, 시장 선도 기업들의 78%가 '상징적 프로젝트'를 통해 조직 결속력을 높이고 시장에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시황의 전략이 얼마나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제국이 거대해질수록 중앙의 통제력은 약해지기 마련이다. 특히 급작스러운 군현제의 실시는 기존 지배층의 반발을 불렀다. 진시황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파격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황제가 직접 전국을 돌아다니는 순행(巡行)이었다.
진시황의 순행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치밀하게 계획된 현장 경영이었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모두 다섯 차례의 대규모 순행을 실시했다. 각 지방의 통치 상황을 점검하고, 황제의 권위를 백성들에게 직접 보여주며, 새로운 정책들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 확인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순행 중에 각종 기념비나 비석을 세워 황제의 업적을 선전한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CEO가 전국 지사를 돌며 직원들과 소통하고, 동시에 회사의 비전과 성과를 널리 알리는 것과 같았다.
진시황은 순행을 통해 두 가지를 동시에 달성했다. 하나는 지방 관리들에 대한 견제와 통제, 다른 하나는 백성들과의 직접적인 소통이었다. 중간 관리자들을 거치지 않고 최고 경영자가 직접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물론 당시 진시황의 성격을 고려하면 백성들과의 소통보다는 권위에 대한 자랑정도가 더 맞았을테지만.
맥킨지 2024년 연구에 따르면, 정기적으로 현장을 방문하는 CEO가 이끄는 기업의 직원 만족도가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평균 43% 높았다. 2천년 전 진시황이 실천한 현장 리더십의 효과를 현대 연구가 뒷받침하고 있는 셈이다.

가장 어려운 과제는 새로운 조직 문화를 정착시키는 일이었다. 진시황은 기존의 혈연과 지연 중심의 사회 질서를 완전히 바꿔, 능력과 공로 중심의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는 기존 상앙의 변법때에 마련된 20등작을 전국에 도입했다. 즉 전국적인 사회 계층 재편을 통해 20등급의 작위제를 도입한 것이다. 이는 출신이나 혈통이 아닌 오직 제국에 대한 공헌도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는 혁신적인 제도였다. 농업 생산량을 늘리거나, 군공을 세우거나, 행정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면 누구나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는 현대 기업의 '성과주의 인사 시스템'과 정확히 일치한다. 학벌이나 배경이 아닌 실제 성과와 기여도로 평가받는 문화를 만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제도가 단순한 인센티브 시스템을 넘어 제국 전체의 가치관을 바꿨다는 점이다. '제국을 위해 기여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사회 전반에 퍼졌다. 이는 조직 구성원들의 자발적 참여와 몰입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진시황의 시스템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숨어 있었다. 너무 빠르고, 너무 강압적이며, 너무 급진적이었던 것이다.

첫째, 지나친 중앙집권은 구 육국 출신 왕족과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수백 년간 각국을 다스려온 명문가들이 하루아침에 권력을 잃었다. 그들의 불만은 지하로 잠복했다가 진시황 사후 즉시 폭발했다.당장 진나라의 패망을 불러일으킨 진승과 오광, 그 뒤를 이어 천하를 양분한 항우와 유방조차 멸망한 초나라의 백성들이었고 전국의 산발적인 반란을 주도한 세력은 구 육국의 왕족과 귀족들이었다.
둘째, 과도한 토목공사가 백성들을 짓눌렀다. 만리장성 건설에 동원된 인원만 30만 명이 넘었다. 아방궁 건설에는 70만 명, 진시황릉 건설에는 72만 명이 투입되었다. 전국의 장정들이 공사장으로 끌려가 가족과 생업을 잃었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백성 10명 중 3명이 토목공사에 동원되어 있었다고 한다.
셋째,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전국에 강제하면서 수많은 백성이 유민이 되었다. 진나라의 법은 극도로 엄격했다. 사소한 죄에도 가혹한 형벌이 가해졌고, 연좌제로 인해 가족 전체가 처벌받았다. 진승과 오광의 난이 시작된 계기도 단지 비가 와서 출발이 늦어졌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나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넷째, 불로초를 찾기 위한 순행이 백성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안겼다. 진시황의 순행은 단순한 시찰이 아니었다. 막대한 수행원과 물자가 동원되었고, 순행 경로의 모든 지역이 황제를 맞이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특히 말년의 순행들은 불로초를 구하기 위한 미신적 행위에 가까웠고, 방사 서복에게 3천 명의 동남동녀와 막대한 재물을 주어 동쪽 바다로 보내기도 했다.
다섯째, 끊임없는 대외전쟁이 국력을 소진시켰다. 북쪽의 흉노 정벌, 남쪽의 백월 정복에 수십만 대군이 투입되었다. 특히 남월 정복 전쟁은 3년간 이어졌고, 혹독한 기후와 풍토병으로 수많은 병사들이 전사했다. 명장 몽염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북방을 지키고 있었지만, 이는 곧 30만 가정이 생계를 잃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분서갱유로 대표되는 사상 통제는 지식인들의 반발을 샀다. 기원전 213년, 진시황은 의학, 점술, 농업서를 제외한 모든 책을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이듬해에는 진시황을 비판한 유생 460명을 생매장했다. 이는 제국의 지적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린 행위였다.

결국 진시황이 죽자 불과 3년 만에 전국이 혼란에 빠졌다. 진승과 오광의 난으로 시작된 반란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졌다. 구 육국의 후예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