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클
밋업
컨퍼런스
커뮤니티
人事萬史 : 조선참모실록1. 설계자와 실무자

人事萬史 : 조선참모실록1. 설계자와 실무자

정도전과 조준, 그 갈림길
리더십시니어리더임원CEO
영준
유영준Feb 21, 2026
2903

1. 설계자와 실무자

1392년 7월 17일, 조선이 건국된 바로 그날 저녁. 태조 이성계는 몰래 한 사람을 자신의 집으로 불렀다. 정도전이 아니었다. 조준이었다. 이성계는 대뜸 말했다. "5도 병마를 모두 경에게 위임하여 통솔하게 하겠다." 새 나라의 군권을 맡긴 것이다. 조준은 사양했지만 이성계는 듣지 않았다.

같은 날, 정도전은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그러나 재상의 자리는 배극렴과 조준이 차지했다. 다만 이성계의 총애에도 정도전의 관직은 그들보다 낮았다. 실질적인 권력보단 이성계의 심복이라는 관직 너머의 힘, 그것이 정도전의 권력이었고, 동시에 한계였다.

정도전과 조준은 이렇듯 조선 건국의 양대 참모로 불린다. 흔히 정도전이 모든 것을 설계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록을 들여다보면 풍경이 달라진다. 이 두 사람은 이성계라는 1인자 아래에서 대등한 2인자로 각자의 역할을 다하던 인물들이었다. 정도전이 조선이라는 회사의 큰그림을 그린 COO였다면 조준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숫자를 만드는 CFO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이성계를 만나는 방식부터 이미 달랐다.

정도전은 스스로 찾아간 참모였다.

권문세족에게 밀려 유랑하던 시절, 그는 북방의 영웅 이성계의 함주 진영을 직접 찾아갔다. 호령이 엄숙하고 군대가 정제된 것을 본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말한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놀란 이성계가 "무엇을 이름인가?" 하자 "왜구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라고 답했다. 왜구 토벌을 빌미로 대업을 넌지시 떠본 것이다.

첫 만남부터 혁명을 도모한 셈이다. 개국 후에도 정도전은 술에 취하면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한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고조를 쓴 것이다." 자신이 이성계를 써서 조선을 만들었다는 자부심. 설계자의 오만이자 자존심이었다.

그에 반해 조준은 초빙된 참모였다.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쌓인 폐단을 혁파하며 쿠데타의 정당성을 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까지는 그저 젊고 객기있던 사대부들이었던 자신의 참모들만으로는 이를 행할 수 없었다.

마침 조준의 명성을 들었던 이성계가 그를 초빙하고 이야기했다. 그는 조준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아차리자 크게 기뻐하며 마치 오랜 친구처럼 대하였다. 조준도 여태까지 고려의 썩은 권문세족들만 상대하다가 드디어 제 주인을 만났다. 그리고 그 첫 프로젝트가 바로 과전법이었다.

2. 비전을 그리는 자와 숫자를 만드는 자

정도전은 전형적인 정치철학자이자 설계자였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청사진을 구상한 사상가.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불씨잡변》 등 그가 남긴 저술은 새 나라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 왕권을 견제하는 재상 중심의 정치 질서, 성리학에 기반한 통치 철학, 불교 세력과의 단절. 정도전이 그린 것은 조선의 운영체제 그 자체였다.

그러나 운영체제만으로 나라가 돌아가지는 않는다. 코드를 실행할 하드웨어가 필요하다. 그 하드웨어를 만든 것이 조준이었다. 조준의 대표적인 작품은 과전법이다. 고려 말 토지 겸병의 폐단을 일소하고, 전국의 토지 소유 관계를 전수 조사하여 새로운 분배 체계를 설계한 것. 이것은 구상이 아니라 실행이었다. 조준은 1388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리며 토지 개혁을 밀어붙였다. 권문세족의 조직적 반대, 유언비어 공작, 창왕의 묵살 등 이 모든 저항을 뚫고 마침내 공양왕 2년, 토지대장이 시가지에서 불태워졌다. 그 불씨가 며칠간이나 꺼지지 않았다고 실록은 전한다.

물론 정도전도 토지 개혁을 구상했다. 국가가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 개인에게 균등 분배하는 계민수전(계구수전). 이는 이상적이었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생각이었기에 개혁파 내부에서조차 큰 이슈가 되지 못했다. 정도전 본인도 이를 인정했다. "백성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일이 비록 옛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조선경국전》 부전의 이 문장은 자신의 안이 실현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이 아닐까. 당시 실제 토지 개혁의 공적은 조준에게 있었고 명실상부 혁명파의 2인자는 조준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여기서 경영학의 고전적 프레임이 떠오른다. 헨리 민츠버그(Henry Mintzberg)의 전략 이론이다. 민츠버그는 전략을 '의도된 전략(Intended Strategy)'과 '실현된 전략(Realized Strategy)'으로 구분했다. 조직이 처음 기획한 전략이 그대로 실현되는 경우는 드물다. 현실의 제약과 기회 속에서 변형되고, 때로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창발적 전략(Emergent Strategy)'이 나타나기도 한다.

정도전의 계민수전은 의도된 전략이었으나 실현되지 못했지만 조준의 과전법은 현실의 저항 속에서 수정되고 타협을 거쳐 실현된 전략이었다. 조직에서 진짜 가치를 만드는 것은 아름다운 비전이 아니라, 비전을 현실로 바꾸는 실행력이다.

3. 적을 만드는 참모와 적을 만들지 않는 참모

두 사람의 차이는 성격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정도전은 감정적이고 과격했다. 스승 이색을 외딴 섬으로 유배 보내려 하면서 "섬에 귀양 보내자는 것은 바로 바다에 밀어넣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작 이에 대해 너무 심하다고 이색을 육지로 유배 보내준 것은 태조 이성계였다. 동문 후배 하륜에게는 "술수하는 자 따위"라고 면박을 주었고, 자신을 모욕한 우현보 집안은 작정하고 멸문시켰다. 기밀 사항을 실수로 주변에 흘리는 바람에 유배까지 당한 적도 있다.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외출하면서 태연하게 웃던 그 덜렁거림이 정치에서도 그대로 나온 것이다. 1차 왕자의 난 때 이 성격으로 미움받아 죽었다는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장 가까운 동지인 남은이 했을 정도였다.

조준은 이 달랐다. 졸기의 평가가 이렇다. "국량이 너그럽고 넓으며 풍채가 늠연하였다. 같은 나이의 친구를 만나면 문에서 영접하여 관곡히 대하고 조용히 손을 잡으며 친절히 대하되 포의(벼슬하지 않던 재야) 때와 다름이 없이 하였다." 이미 귀해진 뒤에도 옛 친구에게 변함없이 대했다는 것이다. 물론 조준에게도 흠은 있었다. 기생첩 국화를 버린 일, 호화로운 집을 지은 일, 남의 노비를 차지하려 소송을 벌인 탐욕.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도덕성 문제였지, 정치적으로 적을 만드는 일은 아니었다.

그는 8년간 우정승 김사형과 호흡을 맞추었다. 조준이 우직하고 강직하게 밀어붙이면 김사형이 관대함으로 보충하는 콤비를 이뤘다는 기록은 조준이 적어도 함께 일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선을 지킬 줄 알았음을 보여준다. 정도전이 과격했다면 조준은 과감했고 김사형은 관대했던 셈이다.

경영학의 구루라 할 수 있는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올바른 일을 하는 것(Doing the right things)'과 '일을 올바르게 하는 것(Doing things right)'을 구별했다. 전자가 리더십이라면 후자는 매니지먼트다.

정도전은 ‘올바른 일’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물었다. 성리학 국가의 건설, 재상 중심의 정치 체제, 불교 세력의 척결 등 새 조직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자 의무였고 책임이었다. 조준은 그 일을 올바르게 실행하는 데 집중했다. 토지대장을 일일이 파악하고 분배 기준을 수립하는가하면 위반자에 대한 처벌 조항까지 세밀하게 설계했다. 조선이라는 조직에는 둘 다 필요했다. 문제는 그 균형이 깨졌을 때 일어났다.

4. 갈라서는 두 개의 분기점

두 참모 사이에는 사적 친분이 없었다. 서로의 시문에도 교우의 흔적이 없다. 정도전이 주도한 척불 운동에 조준은 참여하지 않았고 조준이 주도한 토지 개혁에 정도전은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다. 여타 사극에서 보여주는 모습과는 달리 각자의 영역이 분명한 철저히 비즈니스적인 사이였다. 그러나 친하지도 적대적이지도 않던 그 거리가 무너진 것은 두 개의 분기점 때문이었다. 바로 요동 정벌과 세자 책봉이었다.

1397년, 정도전이 요동 공격 의지를 공개적으로 천명하면서 균열이 시작되었다. 조준과 김사형은 정면으로 반대했다. 이에 병중에 휴가를 청하고 있던 조준의 집에 정도전과 남은이 직접 찾아와 "요동을 공격하는 일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공은 다시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못을 박았다. 조준의 대답은 단호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후로 국도를 옮겨 궁궐을 창건한 이유로써 백성이 토목의 역사에 시달려 원망이 극도에 이르고, 군량이 넉넉지 못하니, 어찌 그 원망하는 백성을 거느리고 가서 일을 성취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정도전에게 직접 말했다. "만일 내가 각하와 더불어 여러 도의 백성을 거느리고 요동을 정벌한다면 그들이 우리를 흘겨본 지가 오래 되었는데 어찌 즐거이 명령에 따르겠습니까? 요동에 도착하기 전에 나라가 망할까 염려됩니다."

비전이 아닌 숫자, 이상이 아닌 현실. 그것이 조준의 언어였다. 조준은 정도전과 남은을 보고는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여겨 병중에서 일어나 이성계를 직접 찾아가 반대 의견을 재차 올렸다. 조준은 “옛날부터 사대의 예를 잃지 않았고 또 새로 개국한 나라로서 경솔히 군사를 출동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이해로 말하더라도 천조가 당당하여 도모할 만한 틈이 없으니 신은 그저 뜻밖에 변이 생길까 염려되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즉, 사대의 예를 잃지 않았고(이는 위화도 회군의 명분과도 통한다.) 명분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실록은 이를 들은 이성계가 기뻐하였다고 하나 이는 훗날 실록을 편찬한 이방원 세력의 윤색일 것이다. 문제는 남은이었다. 정도전의 동지였던 남은은 분노하여 "두 정승(조준과 김사형)은 쌀 몇 말이나 몇 되를 출납하는 건 잘할지 몰라도 큰 일을 더불어 도모할 수 없다”고 쏘아붙였다. 이때부터 정도전 측과 조준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이 벌어졌다.

로버트 카츠(Robert Katz)는 1955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발표한 논문에서 관리자에게 필요한 역량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 기술적 스킬(Technical Skill) — 특정 분야의 전문 지식과 실무 능력

  • 인간관계 스킬(Human Skill) — 사람을 다루고, 협력을 이끌어내는 능력

  • 개념적 스킬(Conceptual Skill) — 조직 전체를 조망하고 비전과 전략을 구상하는 능력

카츠의 모델로 보면, 정도전에게는 개념적 스킬이 넘쳤으나 인간관계 스킬이 결정적으로 부족했다. 조준은 기술적스킬이 다른 스킬보다 높았지만 다른 두 가지 스킬과의 균형을 유지한 참모였다. 비전만으로는 조직을 이끌 수 없고 사람을 잃으면 비전도 죽는 셈이다.

5. 설계자의 최후, 실무자의 생존

둘의 사이를 가른 일이 요동정벌이었다면 둘의 운명을 가른 것은 세자 책봉이었다. 《태조실록》과 《태종실록》의 기록을 종합하면 이렇다.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은 태조에게 "태평할 때는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있는 아들을 세우는 것이 옳다"고 주청했다. 사실상 이방원을 세자로 추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조는 자신이 총애하던, 그리고 정치적 동반자였던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을 밀었다. 태조는 강씨 소생의 장자인 이방번을 왕위에 세우고자 하였으나 방번의 아내는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조카였기에 사실상 왕위를 이을 수 없었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이러한 세자 책봉 논의를 엿듣고 신덕왕후 강씨가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고 한다. 다 들리게 정치적인 압박을 가한것이다. 이에 태조가 조준에게 종이와 붓을 주며 이방번을 쓰라고 했지만 조준은 거부했다. 결국 재상들은 꼭 신덕왕후의 소생이 되어야 한다면 고려와 관련없는 이방석이 낫다고 의견을 모았고 당시 재상이던 배극렴이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시라고 주청을 올렸다.

여기서 두 참모의 선택이 갈린다. 조준은 이방석 세자 책봉이 결정된 후에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태자 책봉에 찬성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뜻에 따랐고 이방석의 후견인이 되었다.

이 선택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정도전은 어린 세자 이방석을 지키기 위해 사병 혁파를 서둘렀고 요동 정벌을 명분으로 군제 개혁을 밀어붙였다. 조준을 비롯한 다른 공신들과의 갈등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반면 조준은 요동 정벌을 반대하며 정도전과 거리를 두었고 적장자 원칙을 지지했던 만큼 사실상 이방원 쪽에 서 있었다.

1398년 8월 26일, 운명의 그날이 밝았다.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태조실록》의 기록은 이렇다. 정도전은 이웃집 전 판사 민부의 집으로 도망쳤고, 민부가 "배가 볼록한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습니다"라고 이방원에게 고발했다. 침실에서 단검을 쥐고 있던 정도전은 이방원의 종자 소근에게 끌려나와 "태조 즉위년에 공이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 주소서"라고 빌었고, 이방원은 "네가 조선의 봉화백이 되었는데도 도리어 부족하게 여기느냐"라며 참수시켰다고 한다.

다만 이 기록은 곧이곧대로 읽기 어렵다. 《태조실록》의 왕자의 난 부분은 이방원 측이 편찬을 주도한 기록이다.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다는 사람이 왜 단검을 쥐고 있었는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실록 바로 뒤에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장면이 실려 있다. 아들 정담이 "정안군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자, 정도전은 "내가 이미 고려를 배반했거늘 또 이 쪽을 배반하고 저 편에 붙는다면 사람들이 말하지 않아도 홀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느냐"라고 거절했다. 비굴한 최후와 의연한 거절이 같은 실록 안에 공존한다. 승자가 쓴 기록에는 늘 이런 균열이 있다.

같은 날 밤, 이방원은 사람을 보내 조준을 불렀다. 조준은 점을 치며 시간을 끌었다. 그저 관망이었다. 이방원은 이숙번을 보내 억지로 데려왔다. 조준은 갑옷으로 무장한 가병을 거느리고 나왔으나 상황이 이미 기울었음을 파악하고 이방원에게 합류했다. 쿠데타의 명분을 위해 그는 별 일을 하지 않았지만 정사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세자 책봉의 그날, 조준은 왕의 뜻 앞에서 붓을 들지 않았고 정도전은 왕의 뜻에 따랐다. 조준의 거부는 이방원에게 신뢰의 근거가 되었고 정도전의 순응은 이방원에게 제거의 명분이 되었다.

무엇보다 조준은 권력 자체를 탐하지 않았다. 이성계가 군권을 맡기면 사양했고 식읍을 주면 거부했다. 정승 자리에서 밀려날 때는 먼저 사직서를 냈다. 실무자로서의 선을 지킨 것이다. 개인의 욕망은 있을지라도 그는 권력이라는 독이 든 성배를 탐하지 않았다. 조직이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은 것이다. 반면 조직을 스스로 만들었다 자부한 정도전은 결국 성배를 마시고 죽음을 맞았다.

6. 오늘의 정도전, 오늘의 조준

정도전과 조준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조직에는 어떤 참모가 필요한가.

비전을 설계하는 참모와 실행을 균형잡는 참모. 조선에는 둘 다 있었기에 건국이 가능했다.

그러나 설계자가 실행까지 독점하려 했을 때, 그릭호 실행자와의 균형이 깨졌을 때 조직은 위험해졌다.

정도전이 요동 정벌과 사병 혁파와 세자 후견을 동시에 밀어붙인 것은 전략적 과부하였다. 조준이 그 모든 것에 반대하며 거리를 둔 것은 실무자의 현실 감각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인 뒤 정도전이 추진했던 정책들을 시행했다.

사병 혁파도, 왕권 강화도, 제도 정비도 모두 정도전의 구상을 이방원이 실현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도전의 비전은 정도전을 죽인 자의 손에서 완성되었다.

한편 조준이 만든 경제육전은 경국대전의 뿌리가 되어 조선 500년의 법적 기반이 되었다.

설계와 균형. 조선의 두 참모가 남긴 교훈은 단순하다.

비전 없는 실행은 방향을 잃고 실행 없는 비전은 공허하다.

그리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조직은 대개 실행을 택한다.

그것이 정도전이 죽고 조준이 살아남은 이유다.

스스로 참모임을, 또 킹메이커를 자처한다면 정도전과 조준이 걸은 길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영준
유영준
일과 사람을 잇는 한량
일과 사람을 잇는 한량입니다.

댓글0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주)오프피스트 | 대표이사 윤용운
서울특별시 서초구 사임당로8길 13, 4층 402-엘179호(서초동, 제일빌딩)
사업자등록번호: 347-87-03493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25-서울서초-2362호
전화: 02-6339-1015 | 이메일: help@offpiste.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