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제에 오른지 십 년, 당 태종이 신하들에게 물었다.
"창업과 수성, 어느 쪽이 어려운가."
이때 수십년 간 그를 따른 방현령이 답했다. "천하가 어지러울 때 군웅을 무찌르고 항복을 받아 천하를 평정하였으니, 창업이 어렵습니다." 이에 위징이 답했다. "예로부터 제왕은 어려움 속에서 천하를 얻고 안일함 속에서 천하를 잃었습니다. 수성이 어렵습니다."
태종은 위징의 손을 들었다. "창업의 어려움은 이미 지나갔다. 수성의 어려움은 마땅히 경들과 함께 삼가야 할 것이다."
정관정요의 이 대목은 1,400년이 지난 지금도 경영서에 인용된다. 그런데 정작 이 질문에 대한 가장 극적인 답은 당나라가 아니라 조선에 있다.
이성계는 스스로 칼을 들어 창업했다. 그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의 문을 열었다. 그의 곁에는 정도전이라는 설계자가 있었고 조준이라는 실무자가 있었다. 창업의 팀으로서 이보다 나은 조합은 드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는 수성에 실패했다. 건국 6년 만에 아들의 칼이 참모를 베었고 어렵게 오른 왕좌는 아들에게 넘어갔다. 설계자 정도전은 죽었고 실무자 조준은 그 아들 편에 합류했다. 창업의 팀은 수성의 단계에서 산산이 흩어진 셈이다.
그러나 이방원은 달랐다. 그는 아버지의 창업에 참여한 뒤, 자신의 수성을 완성한 사람이다. 아버지가 쓰지 못한 참모를 쓰고 아버지가 다스리지 못한 공신을 다스렸다. 그의 곁에도 정도전과 조준처럼 두 사람의 뛰어난 참모가 있었다. 바로 하륜과 이숙번. 하나는 곡선이었고 하나는 직선이었다.

1398년, 1차 왕자의 난.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그 밤, 두 사람은 나란히 서 있었다. 하륜은 거사의 밑그림을 그렸고 이숙번은 그 그림 위에서 칼을 휘둘렀다. 그들의 이방원의 머리와 팔이었고 또다른 설계와 실행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8년 뒤, 하륜은 함길도에서 조선 왕가 시조의 무덤을 살피다 일흔에 편안히 눈을 감고 이숙번은 경남 함양의 유배지로 쫓겨나 24년을 더 살다 중앙권력에서 영영 멀어진 채 쓸쓸히 죽었다.
그들은 같은 주인을 섬겼고 같은 공을 세웠으며 모두 1등 공신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은 태종의 조문을 받으며 떠났고 한 사람은 "죽어도 풀어주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게 했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천하를 얻는 것은 칼의 문제지만 천하를 지키는 것은 사람의 문제다.
그리고 수성의 본질은 인사(人事)다.
무엇이 둘을 갈랐을까. 그리고 그 둘을 가른 이방원은 어떤 리더였을까.
하륜이 이방원을 처음 만난 방식부터 곡선이다.

그는 직접 이방원을 찾아가지 않았다. 이방원의 장인 민제에게 먼저 갔다. "제가 관상을 많이 봤지만, 공의 둘째 사위분과 같은 사람은 없었소. 뵙고자 하니 그 뜻을 전해주십시오." 관상이라는 우회로를 깔고 자신과 친한 중간자를 세워 상대가 먼저 문을 열게 만들었다.
1차 왕자의 난을 설계할 때도 마찬가지다. 하륜은 직접 칼을 들지 않았다. 단지 칼이 될 이숙번이라는 인재를 이방원이 귀하게 쓸 수 있도록 이숙번이 안산 군수로서 보유한 사역군을 거사에 동원할 수 있도록 뒤에서 조치를 취했다. 정릉을 수리하는 임무라는 명분을 만들어 병력을 합법적으로 서울에 올린 것이다.

칼은 남이 들게 하고, 자신은 판을 짰다. 그리고 이방원이 사람을 물리치고 계책을 묻자 핵심만 던졌다. "선수를 쳐서 이 무리를 없애는 것뿐입니다. 이것은 다만 아들이 아버지의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니, 비록 태조께서 놀라시더라도 필경 어쩌시겠습니까." 할 말을 하되 마지막 하나, 실행은 남겨두었다.
평생 권력의 변두리에서 떠돌아다니던 하륜은 태종 즉위 이후 불도저가 되었다. 6조 직계제, 호패법, 경제육전 편찬, 태조실록 편찬.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고 속도가 빨랐다. 다른 신하들이 "관련자가 살아 있으니 실록 편찬은 이르다"고 반대하자 "노성한 신하가 살아 있을 때 마땅히 기록해야 되는 거 아니냐"며 얼굴을 붉혀가면서까지 관철시켰다. 친구이자 이방원의 장인 민제조차 "저러다 정도전 꼴 나지"라고 했을 정도다. 이에 대한 하륜의 대답이 걸작이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오. 옛사람들도 바른 도리를 가지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요행이 죽음을 면한 사람도 있소. 후인들이 스스로 공론이 있을 것이니, 내 무엇을 두려워하겠소?" 담대한 말이다. 그러나 이 담대함에는 계산이 있다. 하륜의 불도저에는 브레이크가 달려 있었다.

그와 정도전의 차이는 이처럼 결정적이었다. 정도전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불도저가 되었고 하륜은 주인인 이방원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불도저였다. 그는 태종의 마음을 읽고 그를 실현시키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인 탐욕의 화신이었다. 신덕왕후의 묘였던 정릉을 옮기는 논의가 이루어지자 노른자위 땅을 사위들까지 동원해 가장 먼저 집어삼켰고 국유지를 개간해 꿀꺽하다 탄핵당하기도 했다. 노비들에게까지 벼슬을 팔아먹는다는 욕도 먹었다. 그러나 그가 건드리지 않은 것이 있다. 벓 왕의 영역이다. 고려 시절 권문세족 파당이 일삼던 소작민 수탈이나 사유지 강탈은 태종이 추구하던 중앙집권에 정면으로 반하는 짓이라 하지 않았고 피해자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금품 수수와 부동산 개발로 재산을 모았다. 무엇보다 다른 공신들, 특히 정도전이 입버릇처럼 떠들고 다니던 단골 레퍼토리인 "지금의 주상이 누구 덕에 보위에 올랐느냐"는 말을 죽을 때까지 하지 않았다. 진시황 아래의 노장인 왕전과 한고조 유방의 공신인 소하가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재물을 탐한 듯 연기한 것이 연상되는 처신이다.

경영학자 제럴드 페리스(Gerald Ferris)는 조직에서 오래 살아남는 사람들의 특질을 '조직정치 지능(Political Skill)'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네 가지 요소다. 네트워킹 능력, 대인 영향력, 사회적 기민성,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진정성. 페리스의 연구에 따르면, 조직정치 지능이 높은 사람은 같은 수준의 자기이익 추구를 하더라도 조직 내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빈도가 현저히 낮다. 욕심을 부리되 미움을 사지 않는 기술이다.
하륜은 이 네 가지를 600년 전에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민제를 통한 네트워킹, 풍수와 관상이라는 소프트한 영향력, 태종의 역린을 피하는 사회적 기민성, 그리고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며 당당하게 받아치는 진정성의 표현. 대간이 탄핵해도 태종이 극구 비호한 것은, 하륜이 단순히 유능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심이 왕권의 반경을 넘지 않도록 스스로를 설계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세종의 평가가 정확하다. "재상의 체모는 있지만 청렴결백하지 못하다. 내 생각엔 보전하기 어려울 것인데 태종께서 능히 보전하시었다."
그러나 세종이 하나 잘못 생각한 것이 있다. 하륜의 처신은 태종이 보전한 것이 아니다. 하륜이 보전당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설계한 것이다.
곡선은 구부러지되 끊어지지 않는다. 하륜의 인생이 그랬다.

그런가하면 이숙번 첫마디부터 직선이다.
이방원이 처남이었던 민무구와 민무질의 추천을 받아 이숙번을 만나고 "나를 돕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런 일쯤은 손바닥 뒤집는 일보다 쉽습니다." 그는 거침이 없었고 자신감이 넘쳤다. 이방원은 만족했을 것이다. 거사에는 이런 사람이 필요하니까.
1차 왕자의 난에서 이숙번은 실행의 중심이었다. 경복궁으로 병력을 출동시키고 정도전 일파를 직접 제거했다. 2차 왕자의 난에서도, 조사의의 난에서도 칼을 들었다. 조선 최초의 문과 급제자이면서도 갑주를 입고 전장에 선 사람. 그가 딱히 문무겸비라기보다는 조직에 필요한 일이 있고 자신이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직접 하는 사람이었다. 전형적인 현장형 참모다.
태종이 왕이 된 뒤 이러한 이숙번의 직선은 더 굵어졌다.
한양도성의 서문 위치를 정하는 과정에서 새 문 후보지가 자기 집 앞을 지나가게 되자 이숙번은 압력을 행사하여 문의 위치를 상왕 정종의 궁궐인 인덕궁 앞으로 옮겨버렸다. 아무리 정종이 허수아비 상왕이라 해도 이건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과시다. 내 집 앞이 시끄러울 수 있다면 상왕 집 앞이 시끄러워도 상관없다는 자세. 자기 집 앞의 문을 상왕 집 앞으로 옮길 수 있는 힘, 그 힘을 굳이 숨기지 않은 것이 이숙번이다. 정종과 우애가 남다르던 태종은 이때 처음 이숙번을 노려보지 않았을까.

좌찬성으로 있을 때는 태종이 상왕 정종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고 배웅하러 간 사이에 하륜과 함께 의정부 관리들과 풍악을 울리며 무례하게 굴었다. 사간들이 벌을 주라 간청하자 이숙번은 오히려 자신을 탄핵한 사간들을 벌주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정승인 성석린과 남재에게 탄핵 상소에 이름을 올릴 것을 강요했고 그들이 동참을 거절하자 그날 밤 두 사람의 집을 찾아가 반협박조로 서명을 재촉했다.
그러나 직선에는 의외의 결이 있다.
맹인 중과 과부의 간통 사건이 터졌을 때 온 조정이 참수를 외치는 가운데 이숙번만이 "법에 따르면 곤장이다,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그는 재가녀의 아들이었다. 이숙번의 어머니 남씨는 남편 윤공이 죽은 뒤 아들 둘을 데리고 이경에게 재혼하여 이숙번을 낳았다. 어쩌면 그는 과부와 중을 보며 어머니를 떠올렸을 것이다. 건국 초 성리학적 질서와 간통이라는 패륜의 이유로 여론에 밀려 둘이 참수되자 이숙번은 제멋대로 궁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태종이 불러도 무시했다. 그리고는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찾아가 "여론에 밀려 사람을 억울하게 죽이는 미친 짓이 어디 있냐"며 국정을 비판했다. 뭐 나름대로 소신이 있는 직선이었다. 그러나 그 소신을 펼치는 장소가 문제였다.
조직행동론에 '심리적 특권의식(Psychological Entitlement)'이라는 개념이 있다. 자신의 공헌이 크다고 느끼는 사람이 조직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당연시하고,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일탈 행동으로 나아가는 현상이다. 연구에 따르면 특권의식이 높은 구성원은 초기에 높은 성과를 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규범 이탈, 동료 갈등, 권위 도전의 빈도가 급격히 증가한다.

이숙번의 궤적이 정확히 이것이다. 왕자의 난에서 세운 공이 크니, 성문을 옮기는 것쯤은 당연하다. 법리적으로 맞는 주장이 무시당하면 왕의 부름도 거부할 수 있다. 세자에게 국정을 비판하는 것도 충언이지 불충이 아니다. 이숙번의 주관에서는 모두 제 나름의 논리가 있다. 물론 그 논리가 주인인 태종의 심기를 거스리는 것이문제였다다. 특히 리더가 이를 용인한다해도 조직은 절대 그 논리를 받아주지 않는다. 심리적 특권의식의 함정은 본인은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다고 느끼지만 조직은 이를 이탈로 읽는다는 데 있다. 이숙번은 태종 이방원에 대해 절대 불충하지 않았다. 훗날 세종도 그렇게 평가했다. 그러나 충성과 별개로 그의 행동 패턴은 조직의 안정을 위협하는 구조적 리스크였다.
직선은 꺾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선과 부딪치면 깨지고 만다.
태종 이방원은 하륜과 이숙번을 같은 저울에 올려놓지 않았다.

하륜의 탐욕과 말년의 실언도 태종은 알고 있었다. 하륜은 민무구·민무질 형제를 처리할 때 "가볍게 벌해야 한다"고 했다가 "그건 옳지 못하다"는 태종의 한마디에 기겁한 적도 있고 "세자도 아니고 왕자를 죽이려 한 것이니 죄가 크지 않다"고 했다가 "그런 말 두 번 다시 입 밖에 내지 마라"는 경고를 받기도 했다. 하륜이 아니었다면 목이 날아갔을 말이다. 선위 파동 때는 민제를 찾아가 "전하의 뜻이 정 그렇다면 선위하시라 합시다"라고 했다가 들킨 적도 있고 스승 이색의 비문을 지을 때 조선의 건국 과정을 부정적으로 쓴 것이 발각되어 이번에도 목이 달아날 뻔했다.
그런데도 태종은 끝까지 하륜을 지켰다.
이유는 명쾌하다. 하륜은 이방원보다 스무 살이 많다. 세자가 왕위에 오를 때쯤이면 이미 죽거나 은퇴할 나이다. 그가 아무리 권력이 강한들 다음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시간이 없다. 그리고 실제로 하륜은 일흔이 넘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방원이 왕위에서 내려오기 전 죽었다.

그러나 이숙번은 달랐다. 권력이 한창인 40대. 태종이 죽은 뒤에도 한참을 더 살 나이다. 세자 양녕대군과 이미 엮여 있었다. 양녕 면전에서 태종을 비판했다는 것은, 미래 권력의 귀에 현 권력에 대한 불만을 심은 것이다. 구종수 형제가 유배지에서 세자에게 말과 활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이숙번에게 보낸 것까지 연루되자, 태종의 인내는 마침내 끝났다.
태종이 내릴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판단은 "지금 위험한가"가 아니라 "내가 죽은 뒤에 위험한가." 였다.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권력에 대해 태종은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전략적 인적자원관리(Strategic HRM)는 본래 조직 전략과 인사 전략의 정렬을 핵심 원리로 삼아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인적자본을 정태적 자원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축적되고 재구성되는 자산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인적자원의 ‘시간적 축적’, 인재 구성의 ‘동태적 재구성’, 그리고 역량의 ‘미래가치’가 분석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전통적 인사가 현재의 성과와 역량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았다면, 시간축 인사는 미래 조직 구조를 먼저 설계하고 그 구조에 부합하는 인재 포트폴리오를 역산한다. 질문은 달라진다. “이 사람이 지금 잘하는가”에서 “이 사람이 3년 뒤 조직의 전략 실행에 어떤 영향을 남기는가”로.
이는 현재 성과를 부정하는 접근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를 미래의 잠재력 신호로 재해석하는 관점이다.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시간 위에서 인적자본을 설계하려는 시도다.
그런데 탁월한 리더였던 태종은 600년 전에 이미 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하륜의 탐욕은 현재의 문제다. 현재의 문제는 통제할 수 있다. 이숙번의 권세는 미래의 문제다. 특히 자신이 통제하기 힘든 미래의 문제는 통제할 수 있는 지금 잘라야 한다.
태종은 이숙번을 유배 보내며 말했다. "천성이 거칠어 가끔 무례할 뿐이지 나쁜 놈은 아니다." 그러나 세종에게는 이렇게 당부했다. "이숙번은 내가 죽더라도 절대 유배를 풀어주어서는 안 된다."
나쁜 놈이 아닌데 영원히 가둬라. 이것이 태종식 인사의 냉혹함이다. 이 유배는 단순한 감정적 결정이 아닌 왕권이 안정된 이후 권력을 재편할 수 있는, 누가 뭐라해도 조선의 주인이 태종 이방원이라는 것이 명백해진 후의 권력 구조 설계였다. 즉 인사의 기준이 감정이나 도덕이 아니라 구조라는 뜻이다. 그래도 공에 대한 보답인지 그는 처남들의 목을 베듯 이숙번의 목을 베지는 않았다.
곡선이 구부러지는 것이고 직선이 뻗는 것이라면 원은 그 모두를 안에 품고 도는 것이다.
이방원은 원의 리더였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아버지 이성계의 실패를 봐야 한다.

이성계에게는 정도전이 있었고 조준이 있었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설계도를 그릴 수 있는 참모, 법전을 편찬하고 제도를 세울 수 있는 참모. 개국이라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기에 이보다 나은 팀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성계는 개국 이후 이 팀을 다스리는 데 실패했다. 정도전이 재상 중심의 국가를 설계하며 왕권을 제한하려 할 때, 세자 책봉에서 장성한 아들들을 제치고 막내 이방석을 세울 때, 이성계는 그것이 어떤 파국을 부를지 읽지 못했다. 혹은 읽었지만 제어하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가 직접 초빙했던 핵심 참모인 조준조차 왕자의 난 이후 이방원 편에 합류했다는 것은 이성계의 리더십이 측근의 충성을 끝까지 붙잡아두지 못했다는 뜻이다.
뛰어난 참모를 가졌으나 다스리지 못한 리더. 이성계의 조선은 건국 6년 만에 아들의 칼에 흔들렸다.

그러나 그의 아들 이방원은 달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방원이 세운 조선의 골격은 자신이 죽인 두 사람의 것이다. 정몽주가 추구했던 충절의 이념은 조선의 유교 국가 정체성이 되었고 정도전이 설계한 법전과 제도는 이방원의 손에서 완성되었다. 단순히 죽은 자도 아니고 자신이 직접 죽인 자들의 유산을 취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모순이 아니다. 사람은 버려도 사상은 취하는 것, 그것이 원의 리더십이다. 그는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만드는 통치자였다.
아버지와 다르게 태종 이방원은 공신에 대한 문제도 깔끔했다. 아버지의 공신들이 자신들의 이상을 펴고 손자인 세조도 공신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조선왕조의 시스템을 망가뜨린데 반해 그의 공신정책은 깔끔하다. 개국의 최대 수혜자인 공신 세력은 어느 왕조에서든 왕권의 가장 큰 위협이 된다. 한 고조 유방이 한신을 죽이고, 명 태조 주원장과 그의 아들 영락제가 공신과 반대파를 수만명씩 도륙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방원의 방식은 무차별 학살이 아니었다. 선별적이었고 구조적이었다. 마치 핀셋을 가지고 집도하듯 섬세했다.
그는 먼저 처가인 여흥 민씨의 처남 넷과 훗날 왕이 될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숙청했다. 그는 외척이 왕권을 위협하는 구조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자신과 겹사돈인 이거이 부자마저 유배보냈다. 공신이 세습 권력이 되는 것을 차단했고 자신의 정책을 반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칼이었던 이숙번을 유배 보냈다. 그는 아무리 아끼는 이라도 참모가 미래의 왕을 좌지우지할 가능성을 원천에서 잘랐다.

반면 하륜은 끝까지 품었다. 탐욕을 눈감아준 것이 아니라, 탐욕이 왕권의 반경 안에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하륜이 가져간 땅과 뇌물은 태종이 회수하려면 언제든 회수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숙번이 세자의 귀에 심은 불만은, 태종이 죽은 뒤에는 회수할 수 없는 것이었다.
원은 중심이 있다. 중심이 흔들리지 않으면, 원 위의 어떤 점이든 같은 거리 안에서 움직인다. 이방원은 왕권이라는 중심을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그 중심이 단단했기에 곡선형 참모의 우회도 허용할 수 있었고 직선형 참모의 직언도 한동안은 받아줄 수 있었다. 그러나 원의 바깥으로 벗어나는 순간 곡선이든 직선이든 잘라냈다. 원이 품지 못하는 자질구레한 선은 그에게 필요없었다.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는 원을 그리지 못했지만 태종 이방원은 원을 완성했다. 참모들의 곡선과 직선을 조선이라는 원의 안에 배치하고 그 원의 중심에 자신을 놓았다.
그리고 원의 반경을 벗어나는 자는 처가든 공신이든 동지든 가차 없이 지워버렸다.
개국은 이성계가 했지만 조선을 만든 것은 이방원이다.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것과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것은 다른 능력이다. 이성계는 시작했지만 이방원은 완성했다. 둘의 차이는 무력도 아니고 지략도 아니다. 참모를 다스리는 원의 유무였다.

흥미로운 것은 세종의 평가다.
세종은 하륜에 대해 "학문이 해박하고 정사에 재주가 있어 재상의 체모는 있지만 청렴결백하지 못하고 일을 아뢸 때도 여염의 청탁까지 시간을 끌며 두루 말하곤 했다. 내 생각으로는 능히 보전하기 어려울 것인데도 태종께서는 능히 보전하시었다."
또 이숙번에 대해서는 "광패하고 거친 성격에 상감의 총애를 믿는 마음이 있어 교만방자했지만, 불충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종께서 다시 등용하고자 하셨으나 그 죄가 큰 까닭으로 실행하지 못하셨다."
세종의 눈에 하륜은 "단수가 낮은 탐관"이었고 이숙번은 "거칠지만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태종은 탐관을 보전하고 충신을 버렸다.
세종은 충녕대군 시절 하륜이 "세자도 아니고 왕자를 죽이려 한 것이니 죄가 크지 않다"고 한 말을 직접 들은 사람이다. 그 "왕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었을 수 있다. 하륜에 대한 박한 평가에는 이 기억이 깔려 있다.
반면 이숙번에 대해서는 "공과 과가 동시에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복귀시키지는 않았다. "태종께서 등용하시지 않으신 것을 내가 어찌 다시 등용하겠는가." 아버지의 인사 판단을 뒤집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시간이 흘러 1438년 세종은 헌릉 비문 작업을 위해 왕자의 난을 생생히 기억하던 이숙번을 잠시 유배에서 풀어 서울로 올렸다. 당시 1차·2차 왕자의 난의 생존자가 이숙번뿐이었기 때문이다. 하륜도, 이거이도, 조영무도, 민무구·민무질 형제도 모두 죽은 뒤였다. 이숙번은 매일 경연청에 출근해 당시를 구술했다. 은근히 세종이 자신을 다시 등용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지만 딱 그걸로 끝이었다. 뭐 그때도 그는 후배 관리들에게 안하무인으로 막말을 쏟아냈다고 실록은 전한다. 청취 조사가 끝난 뒤 세종은 이숙번의 함양 유배를 풀어 경기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조치해줬으나 정계 복귀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도 이숙번은 전혀 뉘우치지 않고 안하무인이었다고 한다.
직선은 끝까지 직선이었다.
모든 조직에는 하륜이 있고 이숙번이 있다.
곡선형 인재는 판을 읽는다. 누가 최종 의사결정권자인지 파악하고, 중간자를 통해 접근하며, 실행은 남에게 맡기고 설계에 집중한다. 욕심은 있되 선을 안다. 조직의 역린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탐욕스러울 수 있지만 조직을 뒤흔들지는 않는다. 오래 남는다.
직선형 인재는 일을 한다. 필요하면 직접 칼을 들고, 소신이 있으면 왕 앞에서도 말한다. 재가녀의 아들이 과부의 처형에 반대하듯 자기 경험과 신념에서 나오는 힘이 있다. 그러나 조직을 흐르는 권력의 흐름을 읽지 못한다. 혹은 읽으면서도 굳이 구부리지 않는다. 조직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만, 그 강렬함이 리더의 불안으로 전환되는 순간 끝난다.
태종이 두 사람을 다르게 처리한 기준은 현대 경영에서도 유효하다.

첫째, 인사의 시간축을 현재에서 미래로 옮기자. "지금 성과를 내는가"보다 "내가 없을 때 이 사람이 조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봐야 한다. 태종이 이숙번을 버린 것은 지금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미래의 구조적 위험 때문이었다. 승계를 준비하는 리더라면, 지금의 에이스가 다음 리더에게 독이 될 수 있는지를 먼저 봐야 한다.
둘째, 역린의 종류를 구분하자. 하륜의 탐욕은 "돈"의 문제였다. 돈 문제는 제재하면 된다. 이숙번의 월권은 "권력"의 문제였다. 권력 문제는 제재로 해결되지 않는다. 구조를 바꾸거나 사람을 옮겨야 한다.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경비를 과다 청구하는 직원과, 차기 리더에게 현 리더를 험담하는 직원은 같은 저울에 올릴 수 없다. 전자는 경고로 끝나지만, 후자는 구조적 조치가 필요하다.
셋째, 곡선형과 직선형을 동시에 쓰되 역할을 분리하자. 태종은 하륜에게 제도를 맡기고 이숙번에게 실행을 맡겼다. 설계와 실행이 분리되어 있을 때, 두 유형은 서로를 보완한다. 문제는 이 둘이 같은 영역에서 겹칠 때다. 이숙번이 세자의 정치적 공간에 들어간 순간, 하륜과의 역할 분리가 무너졌다. 실행자가 설계자의 영역으로 넘어오면 충돌은 불가피하다.
넷째, 직선형 인재를 버릴 때는 명분이 아니라 타이밍이다. 태종은 이숙번이 여러 차례 문제를 일으켰을 때도 감쌌다. "천성이 거칠 뿐이지 나쁜 놈은 아니다." 그러다가 세자와 엮이는 순간 잘랐다. 감싼 시간이 길수록, 자를 때의 명분은 단단해진다. "그렇게까지 감싸줬는데도"라는 여론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냉혹하지만 효과적인 인사 전략이다.
1416년. 하륜이 죽었다. 태종은 3일간 조회를 하지 않고 7일간 고기를 먹지 않으며 직접 애절한 조사를 지었다. 같은 해, 이숙번이 유배되었다. 태종은 세종에게 "죽어도 풀어주지 말라"고 했다.
태종은 한 사람에게는 눈물을 한 사람에게는 족쇄를 남겼다.

곡선은 구부러지되 끊어지지 않고, 직선은 곧되 부러진다. 하륜과 이숙번이 그랬다. 그리고 원은 그 모두를 품되, 중심을 잃지 않는다. 이방원이 그랬다.
리더가 인재를 볼 때 능력만 보면 이숙번을 얻는다. 궤적까지 보면 하륜을 얻는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리더는 둘 다 쓰되 언제 누구를 놓아야 하는지를 안다.
정관정요에서 당 태종은 "수성이 어렵다"는 위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의 태종 이방원은 고개를 끄덕이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직접 수성의 답을 썼다. 곡선과 직선, 그리고 자신이 직접 그릴 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