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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事萬史: 조직을 벤 개혁의 칼날

人事萬史: 조직을 벤 개혁의 칼날

왕안석이 부른 송나라의 멸망
기타리더
영준
유영준Dec 2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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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송나라의 위기, 그리고 개혁가의 등장

1067년, 스무 살의 젊은 이가 황제의 옥좌에 앉았다. 바로 송나라 신종이다. 그가 물려받은 송나라는 겉으로는 화려했지만 속은 곪아 있었다. 북으로는 요나라, 서쪽으로는 서하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고, 해마다 막대한 세폐를 바쳐야 했다. 국고는 텅텅 비어가고, 군대는 약했으며, 관료 조직은 비대해져 있었다.

신종은 답답했다. 개국 100년, 문치주의로 번영을 구가했지만 이제 그 시스템이 한계에 다다랐다. 쓸데없는 관직은 많고, 군대는 약하며, 재정은 파탄 직전이었다. 누가 이 나라를 살릴 수 있단 말인가.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왕안석이었다. 강직하고 학식이 높으며, 무엇보다 이 나라를 바꿀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가진 사람. 1069년, 왕안석은 참지정사(參知政事), 부재상 격인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곧바로 칼을 뽑았다.

"이 나라를 처음부터 뜯어고쳐야 합니다."

신종은 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개국한 지 어언 백여년. 송나라에 개혁의 시대가 열렸다.

2. 신법, 그리고 조직의 분열

왕안석은 파격적인 정책들을 쏟아냈다.

흔히 신법이라 말하는 법들은 균수법, 청묘법, 보갑법, 시역법, 모역법, 보마법, 방전균세법 등이 꼽힌다.

이중 청묘법은 농민들에게 곡신을 저리로 빌려주어 고리대금업자의 착취를 막는 법이고 모역법은 부역 대신 돈을 내면 부역을 면제해주고 그 돈으로 실업자를 고용하고 품삯을 주는 법이었다.

시역법은 국가가 소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주어 대상인들의 이익 독과점을 막는 법이었고 보갑법은 10집을 1보로, 5보로 대보 등으로 편성하고 장정을 징집, 유사시 군인으로 쓰게 하는 법이었다. 보마법은 군마가 부족한 송나라에서 각 집마다 말을 기르게해 평소에는 농사에 쓰게하고 전쟁이 나면 징발하는 법이었고 방전 균셉버은 비옥도에 따라 세액을 나누어 부과하도록 하는 법이었다.

이론적으로는 완벽했다. 국가 재정을 늘리고, 백성의 부담을 줄이며, 군사력도 강화하는 일석삼조의 묘수. 왕안석은 여혜경, 증포, 장돈 같은 개혁 성향의 인재들을 대거 등용했다. 이른바 '신법당'이 구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따르는 이가 생기니 조정은 순식간에 둘로 갈라졌다.

한쪽에는 왕안석의 신법당. 다른 한쪽에는 개혁에 반대하는 구법당이 들어섰다. 구법당의 중심에는 사마광이 있었다. 『자치통감』을 편찬한 대학자이자, 왕안석보다 두 살많은 동년배였다. 한기, 부필, 구양수 같은 원로 대신들도 구법당에 섰다.

사마광은 조목조목 신법을 비판했다. "청묘법은 결국 국가가 고리대금업을 하는 것입니다. 모역법은 부자들에게만 유리합니다. 지방 관리들이 실적을 올리려고 백성들에게 강제로 돈을 빌려주고 있습니다."

그의 비판은 정곡을 찔렀다. 실제로 지방에서는 청묘법이 변질되어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심지어 구양수처럼 신법을 지지했던 이들마저 청묘법의 부작용을 보고 반대로 돌아섰다. 소식(소동파)도 점진적 개혁은 찬성했지만 왕안석의 강경한 방식에는 반대했다.

왕안석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반대하는 자들을 조정에서 내쫓았다. 사마광은 낙양으로, 소식은 항주로 좌천되었으며 구양수는 사실상 은퇴를 강요당했다. 소식이 좌천된 후 만든 것이 동파육이니 어찌보면 지금까지도 신구당쟁이 길이길이 보전되는 셈이다.

조직이 쪼개지고 건전한 정책 논쟁이 더러운 파벌 싸움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조정은 왕안석과 신법당의 일당독재화가 되었고 왕안석이 지닌 영향력이 점차 거대해졌다.

3. 당쟁의 악순환, 조직의 붕괴

1074년, 하북에 큰 가뭄이 들었다. 구법당은 이를 신법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고 공격했다. 1076년, 왕안석은 결국 재상 자리에서 물러났다. 신법을 시행하던 관리들 중 일부는 부패했고,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졌다. 신종의 지지는 여전했지만, 조직 내부의 반발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고 1085년, 신종이 죽었다.

어린 철종이 즉위하고, 선인황태후가 섭정을 맡았다. 그녀는 즉시 사마광을 불러들였다. 사마광은 재상이 되자마자 왕안석의 신법을 모두 폐기했다. 15년간의 개혁이 몇 달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086년, 왕안석은 강령의 집에서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구법당의 영수, 사마광도 같은 해에 죽었다.

하지만 당쟁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1093년, 철종이 친정을 시작하자 신법당이 다시 집권했다. 이번에는 구법당을 대거 숙청했다. 1100년 휘종이 즉위하자 신법당의 극단파인 채경(수호지에 나오는 그 채경이다.) 이 권력을 잡았다. 채경은 원로 대신 120명을 '간신'으로 몰아 탄압했다. 사마광, 소식 같은 이들의 이름이 '원우당적비(元祐黨籍碑)'에 새겨져 조정 곳곳에 세워졌다.

정책 논쟁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였다. 오직 파벌 싸움만 남았다. 신법이냐 구법이냐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권력을 잡느냐만이 중요했다. 승자는 패자를 숙청하고, 패자는 복수를 꿈꿨다. 송나라 최고의 인재들이 유배와 좌천을 반복하며 소모되었다. 실무 능력은 바닥을 쳤다. 그리고 조직 안에서는 부패가 만연했다. 채경을 비롯한 신법당 극단파는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권력을 휘둘렀지만, 정작 그들이 한 일은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뿐이었다.

4. 망국의 그림자 - 정강의 변

1127년, 여진족의 금나라 군대가 송나라의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고 휘종과 흠종 두 황제를 포로로 끌고 갔다. 북송은 멸망했다. 이것이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다.

송나라가 당쟁에 몰두하는 동안, 북방에서는 금나라가 급부상했다. 하지만 송나라 조정은 보지 못했다. 아니, 보려 하지 않았다. 금나라는 북방의 요나라를 송나라와 함께 멸망시켰지만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송은 동맹국이었던 금의 뒤통수를 쳤다. 이미 국제정세를 냉철히 읽을 사람은 없었다. 조정은 오래전부터 신법당과 구법당으로 나뉘어 서로를 공격하는 데만 몰두했다. 국방은 진작 무너졌다. 왕안석이 그토록 강조했던 부국강병은 어디로 갔고 사마광이 지키려 했던 송나라의 전통은 어디로 갔을까.

50년간의 당쟁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역사는 냉혹하게 기록했다. 왕안석의 신법은 북송 멸망의 씨앗이었다고. 그의 개혁이 당쟁을 낳았고, 당쟁이 조직을 썩혔으며, 썩은 조직이 나라를 망쳤다고.

5. 개혁인가, 독선인가 - 왕안석이 놓친 것

왕안석은 천재였다. 그의 정책은 이론적으로 타당했고, 실제로 단기간에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그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첫째, 반대를 불충으로 취급했다.

사마광은 왕안석의 적이 아니었다. 한기도, 구양수도, 소식도 모두 송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었다. 단지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하지만 왕안석은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논리로 조직을 양극화시켰다. 반대 의견을 경청하지 않았다. 비판자를 내쫓았다. 그 결과는 당연하게도 조직의 분열로 이어졌다.

둘째, 실행을 검증하지 않았다.

청묘법은 본래 백성을 위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지방 관리들이 실적을 올리려고 강제로 돈을 빌려주면서 오히려 부담이 되었다. 왕안석은 '무엇을' 할지만 생각했지, '어떻게' 실행되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그결과 지방관리들은 억지로 백성들에게 필요없는 재물을 빌려주고 다시 이자를 받아 국고를 채웠다. 말을 기를 수 없는 백성들도 억지로 말을 한 필씩 기르게 해 폐단이 쌓이고 말았다.

좋은 정책도 나쁜 실행 앞에서는 무력하다.

셋째, 시스템이 아닌 권력에 의존했다.

왕안석의 개혁은 오직 신종의 신임에만 의존했다. 신종이 죽자 모든 것이 무너졌다. 후계 구도도, 제도적 장치도 없었다. 강력한 리더십은 있었지만, 그것을 이어갈 시스템은 없었다.

넷째, 승자독식의 문화를 만들었다.

왕안석이 구법당을 내쫓았다. 사마광이 집권하자 신법을 모조리 폐기했다. 신법당이 재집권하자 구법당을 대거 숙청했다. 이 악순환이 50년간 계속되며 조정의 능력있는 신하는 남지않고 선비들은 조정을 향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건전한 정책토론은 사라지고 적에 대한 복수만 남았다. 개혁은 퇴색하고 권력 투쟁만 남은 셈이다.

6. 개혁의 역설 - 나라를 살리려다 망치다

왕안석은 송나라를 살리려 했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조직을 둘로 쪼갰고, 당쟁을 낳았으며, 결국 나라를 망쳤다. 현대 조직도 다르지 않다. 새로운 CEO가 부임한다. "이 회사를 혁신하겠습니다." 기존 임원들을 대거 교체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내보낸다. 단기적으로는 성과가 나며 주가도 오를 수 있다.

하지만 그 CEO가 떠나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다. 왕안석의 신법처럼. 그리고 조직에는 상처만 남는다. 신법당과 구법당의 당쟁처럼 그저 흉터만 조직에 남아 서로 으르렁 거릴 뿐이다.

진정한 개혁은 조직을 쪼개지 않는다. 반대파를 포용하며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성과가 아닌 시스템을 만들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검증하고 수정한다. 왕안석은 이 모든 것을 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한 방향이 옳았을지 모르지만 그는 지나치게 독선적이었다. 그에게 비전은 있었지만 포용력은 없었다. 그는 홀로 개혁을 추진했지만 조직은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사마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법을 전면 폐기하며 또 다른 극단을 보여줬다. 왕안석의 독선에 맞선 것이 사마광의 복수였다. 결국 반세기를 이어갈 망국의 악순환을 만든 것은 두 사람이었다. 결국 북송은 망했다. 왕안석도, 사마광도 원했던 결과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만든 당쟁의 구조가 나라를 집어삼켰다.

7. 900년 후, 우리는?

왕안석은 900년 전 강령의 집에서 홀로 눈을 감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이 바꾸려 했던 세상? 아니면 자신이 쪼갠 조직?

불과 반세기가 지나기 전인 40여년 후 금나라 군대가 개봉성을 함락할 때, 만약 왕안석이 살아 있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 개혁이 잘못되었나?" 아니면 "그들이 내 뜻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했다"고 했을까.

스스로 회사의 혁신을 이끈다고 생각한다면 왕안석의 무덤 앞에 서보자. 그리고 물어보자.

내가 말한 개혁과 혁신은 우리 조직을 살리고 있는가, 쪼개고 있는가.

내가 말한 비전은 사람들을 모으고 있는가, 몰아내고 있는가.

내가 떠난 후에도 당신의 개혁이 살아남을 시스템이 있는가.

물론 왕안석은 대답하지 않아 줄 것이다. 다만 900년 전 역사가 경고할 뿐이다.

스스로 개혁가의라 칭하는 이들의 독선이 조직을 썩히고, 썩은 조직은 결국 나라를 망친다고.


영준
유영준
일과 사람을 잇는 한량
일과 사람을 잇는 한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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