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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事萬史 : 중종의 HR 전략

人事萬史 : 중종의 HR 전략

권력의 균형술사 혹은 권력의 노예
영준
유영준Aug 22, 2025
리더,임원,CEO
8536

위기의 CEO는 어떻게 조직을 장악해나가는가

1506년, 조선 제11대 왕 중종은 매우 독특한 상황에서 권력을 잡았다.

연산군을 축출한 반정으로 옹립된 그는 사실상 '외부에서 영입된 CEO'나 다름없었다. 자신을 왕위에 올린 반정공신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그야말로 제약이 많은 리더십을 발휘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여러 매체를 통해 중종은 유약하고 권력이 약한 왕으로 비춰진다. 하지만 과연 그러했을까. 조선을 망하게 한 시초를 마련했다는 평가와 연산군의 폭정으로 망가진 조선을 중흥시켰다는 상반된 평가는 뒤로 하고 HR에서의 중종을 살펴보자.

1단계: 기득권 세력과의 동반자 관계 (1506-1515)

초기의 중종은 유약한 왕이었다. ‘삼대장’으로 대표되는 반정공신들의 막강한 권력 앞에 장인을 죽이고 조강치처를 축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중종 초기의 HR 전략은 한마디로 '현상유지'였다. 박원종을 비롯한 반정공신들이 여전히 조정의 실세였고, 중종은 이들과의 관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인사를 단행했다. 이는 마치 대주주들의 입김이 강한 기업에서 새로 부임한 CEO가 기존 경영진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점진적 변화를 모색하는 것과 같았다.

이 시기 중종의 인사 철학은 '안정성'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급진적 개혁보다는 기존 체제 내에서의 점진적 개선을 추구했고, 훈구파 중심의 인사 구조를 크게 건드리지 않았다.

2단계: 신진 인재 영입을 통한 조직 혁신 시도 (1515-1519)

그러나 박원종 등 기존 실세들인 삼대장이 사망한 후, 중종은 본격적인 인사 혁신에 나섰다. 그의 선택은 조광조로 대표되는 신진 사림 세력의 대거 등용이었다. 이는 현대 기업에서 구조 전환을 위해 젊은 인재들을 대폭 영입하는 것과 유사한 전략이었다.

특히 조광조와 사림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중종에게 매력적인 인재풀이었다.

  1. 청렴성과 도덕성: 부패한 기존 관료들과 차별화

  2. 개혁 의지: 현상유지에 안주하지 않는 추진력

  3. 실무 능력: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전문성

그리고 결정적이게도 이들에겐 막강학 기반 권력이 없었다. 중종은 이들을 통해 조직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자 했다. 현량과 실시를 통한 새로운 채용 루트 개척, 능력 중심의 인사 운영 등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HR 정책이었다. 그들은 아직 남아있는 공신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중종을 대신해 거침없이 개혁을 추진해나갔다.

3단계: 전략적 권력 운용의 마스터클래스 (1519-1544)

하지만 집권 초기의 중종과 조광조 세력의 급진적인 개혁은 부작용을 낳았다. 위훈삭제로 대표되는 기존 기득권 세력에 대한 탄압과 소격서 폐지 등 기존 질서의 파괴는 조광조 세력의 급속한 성장이 낳은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었다. 기반이 없는만큼 사림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결국 공신들의 불만이 팽배해지자 젊은 중종은 놀라운 정치적 감각을 발휘했다. 그는 ‘주초위왕’(조씨가 왕이 된다는 참언)으로 대표되는 기묘사화(1519)를 벌여 조광조와 사림을 몰락시킨다.

기묘사화는 단순한 실패한 개혁의 청산이 아니라, 이후 25년간 이어질 정교한 권력 게임의 서막이었다.

남곤 시대 (1519-1527): 안정화 전략

조광조 숙청 후 중종은 온건 사림파인 남곤을 전면에 내세웠다. 남곤은 이상보다 현실을 우선하는 현실주의자였고, 중종이 원하는 안정적 국정 운영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 시기 중종은 급진적 개혁 대신 점진적 개선에 집중했고, 실제로 강원도(1522), 전라도(1524) 양전 사업과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편찬 등 실질적 성과를 거두었다.

과도기 관리 (1527-1531): 약한 리더십의 전략적 활용

남곤이 죽자 중종은 의도적으로 세력이 약한 정광필을 영의정으로, 평판이 좋지 않은 심정, 이행, 이항을 실세로 배치했다. 이는 강력한 권신의 등장을 막으면서 자신이 주도권을 유지하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정치적 역량 부족이 드러나자, 중종은 다시 한 번 과감한 인사 결단을 내린다. 무능한 토끼들을 몰아내기 위해 사냥개를 불러들인 것이다.

김안로 시대 (1531-1537): 통제된 강력 리더십

중종은 능력 있고 현실주의적인 김안로를 전격 발탁했다. 김안로에게 동지경연사,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등 막강한 권한을 집중시킨 것은 분산된 권력을 집중시켜 효율적으로 국정 운영을 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김안로는 말을 잘듣는 사냥개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집중된 권력을 활용해 부를 축적했고 권력을 남용했다. 충직한 사냥개가 아니라 간교한 여우였던 것이다. 결국 부정부패라는 선을 넘어 김안로는 중종의 정실이었던 문정왕후와 윤씨 형제들을 제거하려 시도했다. 그러자 중종은 즉시 김안로를 축출했다. 이는 권신을 활용하되 통제선을 벗어나지 않게 하는 중종 특유의 권력 운용법이었다.

후기 안정화 (1537-1544): 제도적 개선 집중

김안로 축출 후 중종은 정치적 격변보다는 군적수포제 같은 제도 개선에 집중했다. 평안도 양전(1544), 《대전후속록》 편찬(1543) 등을 통해 행정 효율성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이후 장경왕후의 오라비인 윤임으로 대표되는 대윤과 문정왕후의 오라비인 윤원형으로 대표되는 소윤이 후계자 쟁탈을 벌인 을사사화가 벌어지긴 하였으나 그의 치세에 큰 영향을 주진 못하였다.

중종 HR 전략의 현대적 시사점

1. 상황별 리더십 스타일의 유연한 조정

중종은 25년간 상황에 따라 리더십 스타일을 자유자재로 바꿨다. 조광조 같은 혁신가가 필요할 때는 과감히 등용했고, 안정이 필요할 때는 남곤 같은 현실주의자를 활용했다. 김안로처럼 강력한 추진력이 필요할 때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지만, 선을 넘으면 즉시 제거하는 단호함도 보였다.

2. 권력 분산과 견제의 균형

중종은 권신들을 활용했지만 결코 그들에게 끌려다니지 않았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세력이 약한 인물들을 배치해 자신의 주도권을 유지하거나, 강력한 권신에게는 명확한 한계선을 그어 통제했다.

3. 장기적 성과 중심의 인사

정치적 부침에도 불구하고 중종 시대에는 양전 사업, 법전 편찬, 지리지 증보 등 실질적 행정 성과가 지속적으로 나왔다. 이는 단기적 정치 갈등과 장기적 국가 경영을 분리해서 관리한 결과였다.

4. 실패한 변


영준
유영준
일과 사람을 잇는 한량
일과 사람을 잇는 한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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