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어떤 협상은 숫자로는 성공했음에도 현장에서 실패로 기억되고, 어떤 협상은 큰 양보 없이도 ‘잘 된 협상’으로 회고될까요? 이러한 현장 경험을 출발점으로, 협상 성과를 다뤄온 주요 연구들을 하나씩 면밀히 검토해보는 <좋은 협상은 무엇을 남기는가> 시리즈를 새롭게 시작합니다.
협상 교육이나 코칭을 할 때 늘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를 너무 믿었다가 당했습니다.” “신뢰를 쌓으라는데, 그러다 호구 되는 거 아닌가요?”
많은 사람들이 협상에서 신뢰를 ‘필요하지만 위험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없으면 협상이 버겁고, 많으면 또 불안합니다. “저쪽은 그만큼 나를 믿을까?”라는 질문도 함께 따라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혼란이 실무에서만이 아니라 연구 세계에서도 그대로 벌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연구는 “신뢰가 협력을 이끌어낸다”고 말하고, 다른 연구는 “신뢰와 협력은 별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노벨상 수상자 윌리엄슨은 아예 “상업적 거래에서 신뢰는 무의미하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이번 아티클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노사·HR·조직 협상 현장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느껴왔던 질문들,
“숫자는 맞췄는데 관계는 왜 나빠졌을까?”, “신뢰를 높이면 정말 더 좋은 결과가 나올까?” 같은 고민들을, 기존 연구를 빌려 관계중심 협상의 언어로 하나씩 다시 짚어보려고 합니다.
첫번째 던지는 질문은 아주 단순합니다.
“신뢰가 높으면 협상에서 손해 보는 게 맞는가, 아닌가?”
오늘 같이 살펴 볼 논문은 Kong, Dirks, Ferrin(2014)이 Academy of Management Journal에 발표한 메타분석 연구입니다. 연구자들은 총 38개의 협상 연구를 모아서, 신뢰가 협상에 미치는 영향을 체계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이 연구가 던지는 핵심 질문은 세 가지입니다.
1) 신뢰가 높으면 협상 행동과 결과는 실제로 어떻게 달라지는가?
2) 그 변화는 어떤 경로를 통해 나타나는가?
3) 어떤 조건에서 신뢰의 효과가 강해지거나 약해지는가?
한마디로, “신뢰가 있으면 협상이 좋아진다”는 막연한 주장을 넘어서, “누구의, 어떤 성과가, 어떤 상황에서” 달라지는지를 숫자로 확인해보겠다는 연구입니다.
먼저, 신뢰와 협상 행동 사이의 관계입니다. 연구 결과는 꽤 선명합니다.
신뢰 수준이 높을수록,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해법을 찾는 통합적 행동이 증가합니다 (상관 r≈.32)
반대로, 정보를 숨기고, 극단적 요구를 하고, 버티는 분배적 행동은 감소합니다 (상관 r≈−.30)
이 행동 변화의 결과, 둘이 함께 얻는 공동 성과(전체 파이)는 유의미하게 높아집니다.
연구에서는 신뢰와 공동 성과의 상관을 약 r≈.26으로 보고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상대를 더 믿을수록, 둘이 같이 더 많이 버는 방향으로 협상이 움직인다.”
많은 사람이 가장 궁금해하는 지점은 이 부분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져오는 내 몫은 어떻게 되느냐?”
연구진은 메타분석 경로 모형을 통해, 신뢰가 서로 다른 두 경로로 개인 성과에 영향을 준다고 설명합니다.
경로 1: 신뢰 → 통합적 행동 증가 → 공동 파이 증가 → 내 몫 소폭 증가
경로 2: 신뢰 → 분배적 행동 감소 → 강하게 밀어붙이기 감소 → 내 몫 증가 폭 제한
숫자로 보면, 신뢰와 개인 성과의 상관은 약 r≈.10입니다. 통계적으로는 의미가 있지만, 크기 자체는 상당히 작습니다. 게다가, 신뢰가 공동 성과에 미치는 효과(.26)보다 개인 성과에 미치는 효과(.10)가 유의하게 더 작다는 점도 확인됩니다.
즉, “같이 잘 되는 효과”가 “내가 더 많이 가져오는 효과”보다 훨씬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실제 숫자와 별개로 “이번 협상, 괜찮았다”는 느낌이 신뢰와 매우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신뢰와 협상 결과 만족도의 상관은 약 r≈.48입니다. 이 연구에서 본 결과들 중 가장 큰 값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작동합니다.
신뢰는 협상 과정과 결과를 해석하는 렌즈가 됩니다.
상대를 믿고 들어갔을수록, 같은 결과라도 덜 의심하고,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동시에, 신뢰 덕분에 통합적 행동이 늘고 분배적 행동이 줄어들면서, 협상 과정 자체가 덜 소모적이고, 덜 적대적인 경험이 됩니다. 그래서 숫자만 놓고 보면 비슷해도, “이 협상 다시 해도 괜찮겠다”는 심리적 여유에는 꽤 큰 차이가 생깁니다.
연구는 “언제나 신뢰가 좋은 건 아니다”라는 점도 분명히 보여줍니다.
통합 가능성(협상 구조)
협상 이슈가 다양하고, 서로 교환·조합할 여지가 클수록(통합 잠재력이 높을수록), 신뢰가 통합적 행동과 공동 성과에 미치는 효과가 더 강해집니다. 반대로, 완전히 제로섬에 가까운 순수 분배 협상에서는 신뢰의 효과가 제한적입니다.
상호성(서로의 신뢰)
한쪽만 상대를 신뢰하는 것보다, 양쪽이 서로를 비슷한 수준으로 신뢰하는 쌍 수준(dyadic) 신뢰일 때, 통합적 행동과 공동 성과에 미치는 효과가 훨씬 큽니다. 일방적 신뢰는, 우리가 현장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위험한 구조입니다.
신뢰의 내용(무엇을 믿는가)
“저 사람, 거짓말은 안 하겠지” 수준의 정직성 신뢰는 분배적 행동(속이기, 버티기)을 줄이는 데 특히 효과적입니다. 반대로, 능력과 선의까지 포함한 포괄적 신뢰는 같이 해법을 찾는 통합적 행동을 늘리는 데 더 강하게 작동합니다.

한 IT 기업 A사는 오랜 거래처 B사와 신규 프로젝트 계약을 협상하고 있었습니다. A사 팀장은 관계를 중시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우리 오래 함께 했잖아요. 이번에도 믿고 솔직하게 가봅시다.”
그 말과 함께 A사는 자사의 원가 구조와 목표 마진율을 꽤 구체적으로 공유했습니다. 상대도 비슷한 수준의 정보를 공유해 줄 것이라 기대하면서요.
결과는 어땠을까요. B사는 그 정보를 바탕으로 더 공격적인 가격 인하를 요구했고, A사는 예상보다 낮은 수익률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런데 협상 후 간단한 만족도 설문을 돌려보니, 양측 모두 “이번 협상은 전반적으로 좋았다”고 답했습니다.
A사는 “장기 파트너십을 계속 이어갈 수 있어서”, B사는 “가격 조건을 잘 가져왔다”는 이유였습니다.
이 사례는 연구 결과와 잘 겹쳐집니다. 신뢰는 장기 파트너십 유지라는 공동 성과, 그리고 “괜찮은 협상이었다”는 결과 만족을 높였습니다. 하지만 A사의 즉각적 개인 성과(이번 프로젝트 수익률)는 제한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A사만 많이 연 상태에서 B사가 정보 상호 공유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만약 양측이 비슷한 수준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통합 여지가 큰 이슈들을 더 적극적으로 다뤘다면, 더 창의적인 가치 창출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 연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실천적 질문 몇 가지를 뽑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협상 구조를 먼저 묻기
“이번 협상에는 교환 가능한 이슈가 몇 개나 있는가?”
“이슈를 재구성하거나 묶어서 다룰 여지는 어느 정도인가?”
만약 단일 이슈, 순수 분배 협상에 가까운 구조라면, 신뢰 구축에 과도한 에너지를 쓰기보다 기본 방어선을 먼저 정비하는 편이 합리적일 수 있습니다.
상호성을 확인하기
“나만 이쪽을 더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상대도 나를, 우리 조직을, 비슷한 수준으로 신뢰하고 있는가?”
일방적 신뢰는 위험합니다. 작은 정보부터 교환해 보며, 상대의 반응을 보면서 조금씩 신뢰의 레벨을 올리는 설계가 필요합니다.
어떤 종류의 신뢰가 필요한지 구분하기
순수 분배 협상이라면, “이 사람은 거짓말은 안 하겠다” 수준의 정직성만 확인해도 충분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슈가 복잡하고 장기적 협력까지 염두에 둔 협상이라면, “이 사람은 능력이 있고, 우리 쪽도 진심으로 고려할 사람인가”까지 함께 평가해야 합니다.
성과 기준을 미리 합의해 두기
“이번 협상에서 우리에게 성공은 무엇인가?”
이번 연도 숫자인가, 향후 3년 관계인가, 팀이 느끼는 협상 경험의 만족도인가? 무엇을 성과로 볼지에 따라, 어떤 수준의 신뢰를 감수할지, 어디까지 정보를 열지, 전략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메타분석이 말해주는 것은 의외로 솔직합니다.
신뢰는 내 몫을 극적으로 키워주지는 않지만, 협상을 ‘다시 해볼 만한 경험’으로 만들어 줍니다.
관계중심 협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합니다.
한 번의 라운드에서 끝나는 숫자 싸움이 아니라,
다음 라운드에도 다시 마주 앉을 수 있는지,
조직 안에서 신뢰가 쌓이는지, 아니면 냉소가 쌓이는지,
노사와 구성원 전체에게 어떤 공기와 문화를 남기는지까지 협상의 성과로 보자는 관점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사람들이 협상에서 가치있게 여기는 게 과연 숫자뿐일지, 협상에서 정의하는 성과에 대해 다시 살펴보는 연구에 대해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