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봄, 기업의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는 이들은 늘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밀리지 않겠다”는 긴장감과 “또 이 싸움을 해야 하나” 하는 피로감이 뒤섞인 얼굴입니다.
회사 측은 말합니다. “지금 시장 상황에서 이 정도 제시는 쉽지 않습니다.” 노조는 맞섭니다. “밤낮없이 만들어 낸 성과인데, 이 정도 보상으로는 설득할 수 없습니다.” 이 공방 끝에 합의서에는 숫자가 적히지만, 마음속에는 묘한 상처와 깊은 불신이 남습니다. 노사 모두에게 협상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매번 소모적인 의식”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저 역시 17년 동안 HR·노무 현장에서 이런 장면을 수없이 지켜봤습니다. 성과급과 인상률을 두고 밤새 싸운 뒤 남는 것은, 겨우 좁아진 숫자 간극과 오히려 더 벌어진 신뢰의 간극이었습니다. 협상은 승패를 떠나 모두를 지치게 만드는 전쟁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협상을 분배적 협상(Distributive Negotiation), 즉 고정된 파이를 누가 더 많이 가져갈지 다투는 ‘이익 나누기’로만 배워왔습니다.
이 방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통합 협상(Integrative Negotiation)입니다. 1980년대 하버드 협상론에서 시작된 이 이론은 이렇게 말합니다. “파이를 더 크게 키우면 모두가 더 많은 몫을 가질 수 있다.”
통합 협상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피자 나누기와 귤 껍질 비유입니다.
피자 나누기: 한 사람이 피자를 자르고, 다른 사람이 원하는 조각을 선택하면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진다는 아이디어.
귤 껍질 사례: 한 사람은 껍질(복지)이 필요하고, 다른 사람은 알맹이(임금)를 원할 때 서로 다른 것을 주고받아 ‘윈윈’을 달성하는 그림.
노사 관계에서 “임금 대신 복지 확대”나 “고용 유연화 대신 고용 안정”을 찾는 절충 모델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익의 충돌’ 대신 ‘이익의 통합’을 말하는 이 약속은 매우 달콤합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론의 이상은 종종 현실의 불신 앞에서 무너집니다. 실무자의 관점에서 통합 협상은 전제 조건 없이는 공허한 선언으로 끝날 위험이 큽니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단순한 분배적 사고만이 아닙니다. ‘통합 협상’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는 위험 그 자체입니다.
피자 나누기 모델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정보 비대칭입니다. 피자를 자르는 사람은 모양과 부피를 다 알지만, 고르는 사람은 겉만 볼 수밖에 없습니다. 겉으로는 공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보를 쥔 쪽이 주도권을 갖는 게임입니다.
기업의 노사 관계에서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사측은 재무 상태, 투자 계획, 신사업 정보를 독점하는 반면, 노조는 사측의 제한된 설명만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측이 “미래 투자 필요”를 이유로 인상률을 낮추면서 “장기 성과 공유제”를 제안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노조는 미래의 과실을 기대하며 합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면에 대규모 구조조정 계획이 있었다면 어떨까요? 노조는 미래를 누릴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통합’이라는 이름에 기대어 합의한 셈이 됩니다.
노측도 그렇습니다. 사측이 희망 인상률에 거의 다 맞춰줬는데 "한가지 더"를 요구하며 협상을 지연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측은 "이미 최선"이라고 믿지만, 노조가 쥐고 있는 내부 정보 (예: 실제 불만 수준, 타사 제안 현황)를 모르니 계속 양보하게 됩니다.
이때 통합 협상은 더 이상 공정한 조정이 아니라, 신뢰 없는 상태에서 정보 비대칭을 이용한 구조적인 사기에 가까워집니다.
귤 껍질과 알맹이 사례를 잘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애초에 서로 다른 것을 원했기 때문에 합의가 쉬웠던 것입니다. 진정한 갈등(이익의 충돌)이 겹치지 않았으니, 협상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던 셈입니다.
노사 현실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됩니다. 고용 구조, 평가 제도, 경영 투명성 같은 핵심 쟁점은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습니다. 대신 복지 포인트, 식사 지원처럼 합의하기 쉬운 항목만 다룹니다. 껍질은 나눴지만 알맹이는 비어 있습니다.
노사는 “분위기가 좋아졌다”, “노사 관계가 개선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갈등은 내부에 그대로 쌓여 갑니다. 이것이 바로 통합 협상의 두 번째 함정, ‘표면적 합의의 착시’입니다.
협상의 본질인 갈등 해결을 회피하고 당장의 평화에 만족하는 순간,
조직의 에너지는 서서히 소진됩니다.
우리는 협상을 ‘얼마를 나눌까’라는 숫자의 문제로만 바라보며, 조직의 신뢰를 무너뜨려 왔습니다. 통합 협상론이 제시한 ‘파이 키우기’ 역시 그 달콤함 뒤에 정보 비대칭과 갈등 회피라는 독을 품고 있습니다. 결국, 협상은 이익 확대의 기술이 아니라 관계의 품질을 테스트하는 장입니다.
숫자는 결과입니다. 관계는 과정입니다. 조직은 과정을 잃을 때 무너집니다.
이제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얼마를 나눌까”에서 “어떤 관계를 만들까”로.
관계중심 협상은 이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믿음이 쌓여야 정보가 공유되고, 과정이 투명해야 비로소 진정한 윈윈이 가능합니다.
이 시리즈에서는 앞으로,
어떤 주체가 이런 협상을 가능하게 만드는지,
어떤 대화의 방식이 관계를 지키는지,
그리고 이것이 조직의 생존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차례로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이 깨달음을 기억하는 순간, 협상 테이블의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