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년 동안 HR·노무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협상이 결렬됐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정작 더 견디기 힘든 때는, 극적으로 합의서에 서명한 바로 다음 날이었습니다.
한 번은 노사 갈등이 장기화된 끝에, 치킨 게임 같은 공방 끝에서야 임금 협상이 타결된 적이 있습니다. 회사 쪽은 “핵심 요구를 받아줬으니 이번 판은 우리가 이겼다”고 말했고, 노조도 “파업 직전까지 밀어붙여서 결국 일부를 쟁취했다”고 자평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임원진은 “또 끌려다녔다”며 내부를 질책했고, 노조 게시판에는 “대표단이 밀실에서 합의했다”는 비난 글이 쏟아졌습니다. 합의문은 존재했지만, 승자는 사라지고 서로에 대한 불신만 조직 곳곳에 남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는 협상을 '이겨야 하는 전략 게임'처럼 준비하고, 모든 전술을 동원해 판을 치렀는데, 왜 게임이 끝난 뒤에는 모두가 패배자처럼 느끼는 걸까요?
앞선 글에서, 협상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이익만 계산하는 기계가 아니라 감정과 편향을 가진 인간이라는 점을 살펴봤습니다. 이번에는 그 사람들이 사용하는 협상 방식, 즉 과정을 들여다보려 합니다.
전통적인 협상 이론은 협상을 '전략적 상호작용'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전략이란, 1950년대 존 내쉬(John Nash)가 제시한 내쉬 균형에서 가져온 개념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 계산할 때, 더 이상 누구도 전략을 바꾸지 않는 상태'를 말하죠.
협상에서도 서로의 선택을 예상하며,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상대도 자기 이익을 계산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손해를 보지 않을까?" 이러한 접근에는 분명 장점이 있지만, 치명적인 한계도 있습니다.
목표가 고정됩니다: 전략 게임에서는 이미 '나눌 파이의 크기'가 정해져 있다고 가정합니다. 과정은 그 파이를 얼마나 유리하게 가져올지 계산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상대가 ‘파트너’가 아니라 ‘장애물’이 됩니다: 전략적 사고에 빠지면, 상대는 함께 문제를 풀 사람이 아니라 '내 전략을 통과해야 할 대상' 혹은 '이용할 자원'이 됩니다.
결국 협상은, “이 위기를 어떻게 함께 넘길까?”가 아니라 “이번 판을 어떻게 이길까”를 고민하는 게임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그 게임이 끝나고 나면, 남는 것은 숫자 몇 줄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깊은 피로와 불신입니다.
협력이 생명인 기업에서 이런 전략 게임은 끝나도 끝나지 않습니다. 협상 후에도 독 같은 잔여물이 남습니다.
전략 협상의 핵심 무기가 BATNA입니다. '협상이 결렬되면 내가 택할 최선의 대안'이죠. 노사 관계에서는 파업, 직장 폐쇄, 외주 전환 같은 형태로 나타납니다.
어느 기업에서는 노조가 '단체 행동'을, 회사는 '주요 사업 외주 전환' 가능성을 은근히 꺼내 들었습니다. 양쪽 모두 BATNA로 서로를 압박했고, 결국 합의는 이뤄졌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노조쪽에는 “언제든 회사가 우리를 외주 인력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깊은 고용 불안이 그림자처럼 남습니다. 회사쪽에는 “언제든 노조가 파업으로 회사를 멈출 수 있다”는 상시적인 영업 불안이 남습니다.
BATNA는 협상장에서만 쓰고 버리는 카드가 아닙니다. 한 번 꺼내든 위협은, 협상이 끝난 뒤에도 서로의 기억 속에서 계속 작동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잔여물입니다.
전략 게임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문제 해결보다 전술적 승리 그 자체에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한 노조 실무자는, 협상 중 회사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슈(특정 임원의 책임론)를 ‘인질 카드’처럼 사용했습니다. 회사는 다급해졌고, 결국 노조에 유리한 합의를 이끌어냈습니다. 겉으로는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협상 후 묵직한 죄책감과 피로감에 그는 “우리가 조직을 팔아서 이익을 얻은 건 아닌가” 하는 후회를 남겼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잔여물입니다. 관계를 소모해서 얻어낸 승리는, 결국 자신을 소모시킵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요? 전략적 상호작용 자체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위에 관계중심의 관점을 덧입혀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결과(숫자)가 전부였습니다. 관계중심 협상에서는 과정도 중요한 성과로 봅니다. “이번 협상에서 몇 %를 더 가져왔는가”보다 “이번 협상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조금이라도 높아졌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실무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전환은 이런 것입니다. 숫자 협상에 들어가기 전, “이번 협상이 우리 조직의 3년 뒤 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지” 노사가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마련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수학적 논의가 아니라, 조직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대화입니다.
전략 게임에서는 정보를 숨기고, 약점을 감추는 것이 미덕입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진짜 관심사는 끝까지 드러나지 않습니다. 관계중심 협상에서는 반대로, 상대에게 공명할 수 있는 정보를 의도적으로 꺼냅니다.
예를 들어, 회사는 “다음 분기 실적이 무너지면 어떤 리스크가 생기는지”를 솔직히 나눕니다. 노조는 “조합원이 느끼는 실제 생활비 압박과 고용 불안”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이런 순간에 생기는 감정은 단순한 정보 교환이 아닙니다. “우리는 같은 현실을 살고 있구나”라는 감각입니다. 이 감각이 쌓이면, 협상은 더 이상 한 번의 전투가 아니라 같은 문제를 함께 숙고하는 시간이 됩니다.
이 글에서 다룬 것은 거창한 이론이 아닙니다. “전략 게임처럼 협상할수록, 협상 후 조직은 더 약해진다”는
현장의 반복된 경험입니다.
협상의 진짜 성과는 합의문에 적힌 숫자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쌓이거나 혹은 닳아버린 관계의 질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AI 전환이라는 초불확실성 속에서, 노사 협상이 더 이상 '기술'이 아닌 '조직 생존을 위한 관계 전략'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기술 변화 앞에서, 서로의 손을 붙잡을 수 있는 그 관계적 기반이야말로, 앞으로 우리가 말하게 될 '새로운 성과'의 토대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