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사 협상 테이블에 앉는 사람들은 비슷한 말을 듣습니다.
“당신은 우리 편이잖아.”
회사에서는 말합니다. “당신은 회사 사람입니다. 회사 입장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노조에서도 말합니다. “당신은 조합을 위해 있는 사람입니다. 한 치도 물러서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이렇게 자기소개를 합니다. “저는 회사(혹은 노조)를 대표해서 나온 사람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 속에는 한 가지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사람’이 아니라 ‘도구’로 스스로를 인식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대표자로서의 자의식은 이런 감각을 만듭니다.
나는 내 생각보다 조직의 입장을 말해야 한다.
내 감정보다 조직의 전략이 우선이다.
내 이름보다 ‘사측/노측’이라는 라벨이 앞선다.
그러다 보면 협상장은 점점 이런 풍경이 됩니다.
사람은 사라지고, 입장만 남습니다.
관계는 사라지고, 논리와 힘만 남습니다.
질문은 사라지고, 정해진 대본만 반복됩니다.
이 상태에서 협상가는 자기 안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나는 여기에 생각하러 온 것이 아니라, 전달하러 왔다.”
이 순간, 우리는 이미 ‘주체’라기보다 ‘매개체’에 가깝습니다.
이익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지만, 정작 스스로를 지키는 감각은 서서히 희미해집니다.
윤리적 주체의 첫 번째 적은, 바로 이 감각입니다.
“나는 도구일 뿐이다.”
이 글에서 제안하고 싶은 이름은 조금 다릅니다.
“나는 노사 협상을 탐구하는 윤리적 주체인가, 아니면 조직의 대변인인가?”
여기서 말하는 윤리적 주체는 “착한 사람”이나 “양보 잘하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윤리적 주체는 이렇게 자신을 정의합니다.
"나는 우리 편의 이익을 지키려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이 협상이 관계와 조직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함께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얹습니다.
“나는 정답을 가진 심판이 아니라, 이 변화를 함께 탐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윤리적 주체를 이렇게 정의하고자 합니다.
“이익을 위해 싸우되, 관계와 미래에 대한 책임을 잊지 않는 탐구자.”
윤리적 주체는 입장을 지키는 것과 현실을 탐구하는 일을 동시에 해내려는 사람입니다.
AI 전환기 협상 환경의 특징은 분명합니다. 아무도 정답을 모른다는 점입니다.
어떤 직무가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어떤 기술이 조직을 살리고, 어떤 기술이 사람을 밀어낼지.
재교육과 전환에 얼마나 투자해야, 어느 정도 효과를 낼지.
수많은 보고서와 숫자가 있어도, “이제 이렇게 하면 된다”는 확실한 해법은 없습니다.
이때, 단순한 “대변인” 자의식만으로 협상장에 들어가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입니다.
바로 기존 입장을 반복해서 방어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윤리적 주체, 특히 “탐구하는 윤리적 주체”의 자의식으로 들어가면
가능한 행동의 스펙트럼이 달라집니다.
상대의 주장 속에서 새로운 정보를 포착합니다.
서로의 두려움과 한계에서 공통의 질문을 발견합니다.
지금의 합의가 아니라, 다음 협상의 발판을 함께 설계합니다.
여기서 윤리란,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선악”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이 선택이 나와 우리 편을 넘어서,
이 관계와 조직의 미래에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를 함께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AI 전환기처럼 예측 불가능한 시대에는
이 윤리적 질문을 품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협상가가 됩니다.
자의식은 언제나 내부 대화로 드러납니다.
협상 직전에 머릿속을 지배하는 말이 무엇인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변인의 내부 대화는 대체로 이렇습니다.
“이번에 밀리면 안 됩니다.”
“실수하면 조직에서 뭐라고 할까요.”
“상대에게 한 마디라도 더 빼앗기지 말자.”
이 질문들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만 붙잡혀 있으면, 나는 결국 조직의 방패가 됩니다.
윤리적 주체, 탐구자는 여기에 다른 질문을 하나 더 얹습니다.
“이번 협상에서 내가 가장 잘 이해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이 갈등의 밑바닥에는 어떤 두려움과 욕구가 깔려 있을까.”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나는, 어떤 태도를 연습해보고 싶은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이 협상에서 무엇을 ‘얻어낼 것인가’보다 무엇을 ‘배우고 돌아올 것인가’를 먼저 묻고 있는가?”
이 한 가지 질문이 협상가를 조직의 도구에서 관계와 미래를 함께 책임지는 윤리적 주체로 이동시킵니다.
앞선 글에서, 관계중심 협상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협상의 주체를 개인·집단이 아니라 관계로 보고.
협상의 과정을 거래가 아니라 함께 예측하고 배우는 여정으로 이해하며.
협상의 성과를 합의안뿐 아니라 더 나은 관계와 더 나은 나의 형성까지로 확장하는 패러다임.
이 틀 안에서 윤리적 주체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요. 한 문장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관계를 협상의 주체로 인정하고,
이 관계가 앞으로도 버틸 수 있게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려는 사람.”
그래서 윤리적 주체는 다음 두 가지를 동시에 붙잡습니다.
우리 편의 정당한 이익: 임금, 고용, 조건, 안전. 이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일입니다.
관계와 조직의 지속 가능성: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신뢰를 어떻게 바꿀지, 이 합의가 다음 협상 테이블을 어떻게 만들지까지 함께 보는 일입니다.
윤리적 주체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늘 이 둘을 함께 쥐고, 현실 속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이제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윤리적 주체로 선다는 것, 말은 좋은데 실제로 가능한 일인가?”
특히 이런 의문이 따라붙습니다.
“상대를 배려하는 것은, 결국 우리 편을 약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상대의 이익을 고려하면, 나와 우리 편의 몫이 줄어드는 것 아닌가?”
다음 글에서는 이 질문에 정면으로 답해보려 합니다.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 사기가 아니다.”
상대의 이익과 감정을 고려하는 것이 어떻게 나와 우리 편의 손해가 아니라,
관계를 위한 이익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익만을 계산하는 사람에서, 관계와 미래에 책임을 지는 윤리적 주체로 나아가는 길.
그 변화의 첫 장면을, 다음 글에서 함께 그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