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속 가능한 관계가 중요하다는 데에는 다들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런데 노사 협상 실무자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말은 다 좋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회사 규율이 있습니다.
노조 규약이 있습니다.
평가 제도와 조직 정치가 있습니다.
그 안에서 실무자는 쉽게 이런 감각에 놓입니다.
“나는 결국 위에서 내려온 입장을 전달하고, 정해진 수순을 집행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이 감각은 가볍지 않습니다.
주체성, 즉 ‘나’가 어디까지 선택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노사 현장에서 실무자는 늘 두 힘 사이에 서 있습니다.
한쪽에는 회사의 규율, KPI, 평가, 예산 틀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노조의 규약, 총회, 대의원, 투쟁 방향이 있습니다.
실무자는 이 사이에서 이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규정상 어쩔 수 없습니다.”
“조합원들이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윗선에서 이미 방향이 정해졌습니다.”
그러다 보면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어도 내가 직접 결정하기보다는
이미 깔린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이 감각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주체라기보다, 시스템에 묶여 있는 사람 같습니다.”
철학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런 질문을 던져왔습니다.
“우리는 정말 스스로 선택하는가,
아니면 이미 만들어진 규칙과 담론 안에서 조금씩 움직일 뿐인가.”
푸코는 이런 상황을 두고 ‘주체의 죽음’ 같은 말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 말을 어렵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조금 단순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늘 누군가가 만든 언어로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짜놓은 규칙 안에서 움직입니다.
회사·노조·사회가 정한 “좋은 구성원”의 기준에 맞추어 스스로를 조정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결정했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이미 수많은 구조와 규칙이 내 생각과 선택의 폭을 좁혀 놓았을 수 있습니다.
노사 실무자 입장에서 이 말은 이렇게 들립니다.
“당신의 판단과 용기 이전에,
이미 시스템이 당신을 꽤 많이 만들어놓았다.”
이쯤 되면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럼 어쩌라는 건가요.
나는 그냥 구조 속에 있는 사람일 뿐인데요.”
여기서 한 걸음만 더 가보겠습니다.
“나는 완전히 자유로운 주체다.”
이렇게 믿는 태도가 정말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까요.
사실은 그 반대일 때도 많습니다.
규칙과 구조의 힘을 모른 척하고
모든 선택을 “내 책임”으로만 돌리면
실패와 무력감이 모두 나에게만 쌓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렇게 말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나는 회사 규율, 노조 규약, 제도와 문화 안에 꽤 많이 묶여 있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도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이 분명히 존재한다.”
내가 얼마나 묶여 있는지 인정하는 것은 패배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여지를 차분히 확인하는 출발점입니다.
무엇은 내가 바꿀 수 없는지.
무엇은 시간이 걸려도 건드릴 수 있는지.
무엇은 오늘, 내 자리에서 조금 달리 할 수 있는지.
이 구분이 선명해질수록 우리는
“모든 게 시스템 탓”이라는 체념과 “모든 게 내 탓”이라는 죄책감 사이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주체성을 다시 찾는 태도는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내 질문과 태도만큼은 내가 선택하겠다는 결심입니다.”
회사의 규칙을 혼자서 바꿀 수는 없습니다.노조의 노선을 혼자서 뒤집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내가 어떤 질문을 던질지,
어떤 태도로 협상장에 들어갈지는
여전히 내 몫입니다.
이 작은 선택을 반복할 때
“규율에 묶여 있다”는 감각 속에서도
조금씩 주체성을 다시 찾는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아주 구체적인 이야기로 내려와 보겠습니다.
협상 준비를 할 때
우리는 보통 이런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이번 협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어야 하는가.”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는가.”
필요한 질문들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늘 결과와 몫만 등장합니다.
“나”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관계중심 협상의 주체는
한 가지 질문을 더 얹습니다.
“이번 갈등에서,
나는 무엇을 배우고 싶은가?”
처음에는 이렇게 들릴 수 있습니다.
“지금 배울 게 아니라, 따낼 걸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하지만 이 질문을 품는 순간
협상은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됩니다.
이제 협상은
상대를 이기기만 위한 무대가 아니라
나와 우리 조직이 성장하는 연습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좀 더 도구처럼 쓸 수 있도록
메모장에 그대로 옮겨도 좋은 질문들을 적어보겠습니다.
[ ] 이번 협상에서 내가 꼭 연습해보고 싶은 태도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예: 끝까지 경청하기,
감정에 방어적으로 반응하지 않기,
상대의 말을 내 언어로 정리해 다시 확인해보기.
[ ] 이 갈등의 밑바닥에는 내 안에 어떤 두려움과 욕망이 깔려 있나요?”
예: 내가 무능해 보일까 두렵다,
조직에서 소외될까 두렵다,
내 말이 무시당하는 경험이 반복된다 등.
[ ] 상대의 어떤 점을 이번에는 한 번 진심으로 이해해보려 하나요?”
예: 회사의 자금 압박,
노조 집행부의 정치적 부담,
현장 조합원의 피로감.
[ ] 협상이 끝났을 때, 나는 어떤 ‘나’로 기억되고 싶나요?”
예: 각만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 있게 대화하는 사람.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협상 테이블 위에서 바로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협상이 끝난 뒤 돌아보면
분명히 다른 흔적을 남깁니다.
“나는 이번에 단지 결과만 남긴 사람인가.
아니면 나와 관계, 조직을 조금이라도 다르게 만든 사람인가.”
회사의 문서, 노조의 회의 자료는
늘 비슷한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올해 목표는 무엇인가.
이번 안건의 요구 사항은 무엇인가.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선은 어디인가.
이 질문들은 모두 필요합니다.
다만, 이 질문들만으로는
주체는 늘 시스템의 바깥으로 나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윤리적 주체, 공화적 주체는
이 질문들 위에 자기 질문을 하나 더 적어 넣습니다.
이 목표를 향해 움직이면서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만들고 싶은가.
이 안건을 다루는 과정에서 나는 어떤 태도를 연습해보고 싶은가.
이 양보할 수 없는 선 뒤에 어떤 두려움과 상처가 숨어 있는가.
시스템이 던진 질문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나만의 질문을 덧붙이는 순간
우리는 조금 덜 묶인 존재가 되고, 조금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됩니다.
Part 2 전체를 돌아보면
우리가 함께 바라본 주체는 이런 얼굴이었습니다.
2-1에서는
“나는 조직의 대변인이 아니라,
현실을 함께 이해하려는 탐구하는 윤리적 주체입니다.”
2-2에서는
“상대를 배려하는 것은 사기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우리 모두의 관계적 이익을 지키는 일입니다.”
2-3에서는
“우리 조직은 파이를 나누는 집단을 넘어,
파이를 지키고 키우는 공동의 터전을 책임지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번 글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규율과 규약 속에 있는 나일지라도,
여전히 내 질문과 태도만큼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주체입니다.”
관계중심 협상의 주체란 완전히 자유로운 영웅이 아닙니다.
규칙과 압박, 기대와 두려움 속에 있으면서도
상대와의 관계,
조직의 미래,
그리고 나 자신의 성장을 함께 품으려는 사람과 조직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협상 전에 나 혼자 조용히 던지는 이 질문일지 모릅니다.
“이번 갈등에서,
나는 무엇을 얻고 싶은가를 넘어서
무엇을 배우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