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남극 웨들해. 탐험선 인듀어런스호는 거대한 유빙에 갇혀 서서히 파괴되고 있었다. 인류 최초의 남극 대륙 횡단이라는 원래의 목표는 점점 현실성을 잃어갔다. 결국 배를 포기하게 되자 대장 어니스트 섀클턴의 우선순위도 바뀌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탐험의 성공이 아니라 대원들의 생존이었다. 대원 28명은 펭귄과 물개를 사냥하며 혹독한 환경을 버텼고, 1년 반이 넘는 사투 끝에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모두 살아 돌아왔다.
나는 이 장면이 HR이 무엇으로 시작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할지 묻기 전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먼저 묻는 것이다.
2013년 여름, 나는 네이버의 인사쟁이 카페 내의 소모임인 HR 북스터디 3기 멤버들과 함께 데이브 얼리치(Dave Ulrich)의 ‘HR챔피언‘을 읽었다[1]
‘인듀어런스’는 HR 챔피언 책의 두께를 보며 두려워하는 스터디 멤버들에게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이라고 L사의 류동일님이 추천하여 함께 곁들여 읽은 책이었다. 멤버 대부분은 HR 및 관련부서의 사원부터 과장급까지였다. 우리가 매월 주제로 나오지만 어려워서 피하던 질문들이 있었다. “인사는 왜 존재하는가?”, “인사(라는 業)의 본질은 무엇일까?”

당시 노트에는 이런 생각들이 적혀 있다.
업(業)의 본질이란 고객에게 궁극적으로 제공하고자 하는 가치다.
HR의 고객은 일단 구성원이다.
HR의 일은 구성원이 각자 속한 업의 본질을 고민하고 그에 맞게 의사결정하도록 돕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능력이 있다. HR은 그것을 꺼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HR 담당자에게는 실무 역량 위에 감정을 다스리는 힘, 인간에 대한 통찰, 인문학과 심리학의 소양, 그리고 자신만의 '관(觀)'이 필요하다.
10여 년 만에 이 노트를 다시 펼쳤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우리 멤버들 다시 보고싶다'였다. 두 번째로 든 생각은 '다시봐도 흥미롭다'였다. 이 노트에는 2013년이라는 시대가 담겨 있다. 평생직장의 감각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인문학 열풍이 한창이었다. '행복한 조직'이라는 말로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던 때였다. 그리고 이 노트에는 현업 한가운데 있던 젊은 실무자들이 HR의 존재 이유를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이 있다.
이 글은 그 노트에 지금의 생각을 덧대어 보려는 시도다.
데이브 얼리치는 HR이 무엇을 '하는가(doables)'가 아니라 무엇을 '만들어 내는가(deliverables)'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HR의 역할을 두 개의 축으로 설명했다. 하나는 전략적 초점과 운영적 초점의 축, 다른 하나는 사람과 프로세스의 축이다. 이 두 축이 교차하면서 네 가지 HR 역할이 도출된다. 여기서 네 가지 역할이 나온다.[1]
역할 | 핵심 질문 |
|---|---|
전략적 파트너 (Strategic Partner) | HR 전략이 사업 전략과 맞물려 있는가 |
행정 전문가 (Administrative Expert) | 제도와 행정이 효율적이고 정확한가 |
구성원 옹호자 (Employee Champion) | 구성원의 목소리를 듣고 대변하는가 |
변화 촉진자 (Change Agent) | 조직이 변화에 적응하도록 이끄는가 |
이 HR 역할모델이 나온 지 거의 30년이 되었다. 낡은 이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네 가지 역할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본다. 바뀐 것은 역할 자체가 아니다. 역할을 움직이는 입력값, 즉 HR이 읽어내야 할 세상이 바뀌었다.
2013년의 우리는 HR의 고객을 '구성원'이라고 답했다. 지금 보면 반만 맞은 답이다.
회사는 하나의 법인격이다. 그리고 존재 이유를 외부에서 증명해야 한다. 데이브 얼리치 역시 이후 ‘HR from the Outside In’에서 HR의 기준을 조직 바깥으로 옮겼다.[2] HR의 성과는 고객, 투자자, 지역사회가 체감하는 가치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구성원은 HR이 매일 만나는 1차 접점이다. HR의 최종 고객은 외부 고객과 투자자, 그리고 사회다.
그럼에도 나는 하나의 믿음을 놓지 못한다.
지금 우리 팀원이 행복하지 않다면, 우리 팀이 만드는 서비스와 가치는 고객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문득 이것이 나의 감상이 아닐까 검증되지 않은 생각일 수 있겠다 싶어 관련 연구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다행이도 이는 오래 검증된 명제다. 슈나이더와 보웬은 은행 지점 연구에서 구성원이 인식하는 서비스 풍토와 고객이 경험하는 서비스 품질이 유의하게 연결된다는 것을 보였다.[3] 헤스켓 등은 이를 '서비스 이익 체인(Service Profit Chain)'으로 정리했다.[4] 내부 서비스 품질이 구성원 만족을 낳고, 구성원 만족이 고객 충성도를 거쳐 수익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하터 등이 36개 기업, 약 8천 개 사업 단위를 메타분석한 결과도 같았다. 구성원 몰입은 고객 만족, 생산성, 수익성과 의미 있게 연결되어 있었다.[5]
그래서 두 관점은 충돌하지 않는다. 최종 고객을 바라보기 때문에 1차 고객을 소홀히 할 수 없다. 2013년의 답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 답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아직 몰랐을 뿐이다.
2022년 영국에서 HRM 석사 과정을 밟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통찰은 이 한마디였다.
What's going on?
HR의 첫 번째 질문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복직 후 PwC EMEA HC Connect (PwC에서 매년 여는 대규모 온라인 HR 학습 컨퍼런스)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양한 세션이 열리지만 초반에 빠지지 않는 세션이 있다. 인구 구조의 변화, 지정학적 긴장, 국제 질서의 재편과 그 이면의 파워게임을 먼저 다룬다. 채용이나 보상 올 해를 뒤흔드는 이슈와 이야기는 그다음이다.
순서에는 이유가 있다. 세계의 변화는 우리 사회를 바꾼다. 그 변화는 국가와 정부를 거쳐 지역사회로, 산업으로, 결국 한 기업의 한 팀으로 흘러든다. 조직은 환경과 끊임없이 교류하는 개방 체계(open system)이고, 어떤 조직도 이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6] 코로나는 일하는 장소와 방식을 바꿨다. AI는 일하는 구조와 시스템 그리고 직무의 경계를 바꾸고 있다.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생산인구 감소추이는 인재 시장의 구조를 바꾸고 있다.
조직 이론가 칼 웨익은 이 과정을 '센스메이킹(sensemaking)'이라 불렀다.[7]
센스메이킹은 결국 두 가지 질문으로 풀어볼 수 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리고 "그렇다면 나는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8] 얼음에 갇힌 섀클턴이 그랬듯이 말이다.
HR은 조직 안에서 이 질문을 가장 기민하게 던져야 하는 부서다. 여기서 ‘HR 챔피언(Human Resource Champions)’의 네 가지 역할이 다시 살아난다.
변화를 읽고 해석하여 전략적 방향을 제언한다 → 전략적 파트너
변화를 정책에 반영하고 제도를 정비하고 행정한다 → 행정 전문가
달라진 구성원의 욕구를 파악하고, 변화 속에서 구성원을 보호한다 → 구성원 옹호자
구성원을 바라보는 관점과 조직이 일하는 방향을 바꾼다 → 변화 촉진자
네 가지 역할은 그대로다. 다만 역할들 앞에 'What’s going on?'이라는 출발점이 놓여야 한다.
세상을 읽으면 HR에 요구되는 것이 달라졌다는 사실이 보인다. 고객의 범위가 넓어졌듯 요구의 내용도 바뀌었다. 그 가운데 가장 극적으로 무게가 달라진 단어가 공정이다.
공정은 2013년에도 화두였다. 조직 공정성은 분배, 절차, 상호작용의 차원에서 오래 연구되어 왔다. 공정성에 대한 인식이 신뢰와 몰입, 성과와 깊이 연결된다는 것도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9] 그런데 지금의 공정은 무게가 다르다.
나는 그 차이를 이렇게 본다. 경쟁은 치열해졌고 나눌 수 있는 파이는 줄어들었다. 그 속에서 조직의 대부분을 이루는 세대에게 공정은 더 이상 '좋은 조직의 조건'이 아니다. 공정은 나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가 되었다. 평가 한 번, 승진 한 번, 성과급 한 번(관련 글: 성과급이 많아지면 우리는 정말 만족할까?)이 커리어 전체의 궤적을 바꿀 수 있다고 느낀다. 그러니 그 결과뿐 아니라 과정과 설명까지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공정은 심리적 안전감과도 연결된다. Amy Edmondson은 심리적 안전감을 "대인관계의 위험을 감수해도 안전하다고 느끼는 팀 차원의 공유된 믿음"으로 설명했다. 구성원들이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고 기준이 불투명하다고 느끼는 조직에서는 의견을 내거나 실수를 드러내는 데 따르는 위험 역시 커질 수 있다. 그래서 공정성은 심리적 안전감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 공정이 담보되지 않는 곳에서 심리적 안전감이 자라기 어려운 이유다. 오늘날 HR이 제도를 설계하고 설명하는 방식은 결국 조직의 안전감을 설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AI Transformation 과 AGI의 출현은 분명 지금 HR의 가장 큰 화두다. 하지만 기술이 많은 일을 대신할수록 질문은 오히려 선명해진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사람이기에 할 수밖에 없는 일은 무엇인가.
이 질문 앞에서 2013년 노트의 한 줄이 다시 보인다. "인문학, 심리학, 철학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 당시에는 유행어처럼 적어둔 말이었다. 지금은 그 말이 더 무겁게 읽힌다. 기술이 '어떻게'를 대신해 줄수록, 사람과 조직이 '왜'와 '무엇을'에 답하려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심리적 안전감을 예로 들어보자. 에드먼드슨이 처음 발표한 것은 1999년이다. 2010년대 중반 구글의 연구로 널리 알려진 뒤, 이제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개념이 되었다. 10년 뒤에도 그럴까. 어떤 개념은 남고 어떤 개념은 잊힐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가려내는 힘도, 새로운 개념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힘도 결국 과거로부터 배운 것에서 나온다. 2013년의 노트가 지금 나에게 질문을 던지듯이 말이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이 있다.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의 노력이 담긴 것에 더 큰 가치를 둔다. 사람들은 같은 결과물이라도 더 많은 노력이 들었다고 인식할 때 더 높이 평가한다. 이른바 '공들임 효과 (effort heuristic)'이다.[11]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AI가 생성한 결과물보다 사람이 직접 고민하고 작성한 결과물에 더 큰 진정성과 가치를 부여한다.
신뢰도 마찬가지다. 조직 신뢰 연구에서 신뢰를 이루는 핵심 요소로 꼽히는 것은 능력, 선의, 진실성이다.[12] 이 가운데 상대가 나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무언가를 감수했다는 사실은 '선의'를 보여주는 중요한 신호가 된다. 맥칼리스터는 이처럼 상대의 배려와 관심에서 비롯되는 신뢰를 '정서 기반 신뢰'라 불렀다.[13]
AI가 효율을 높여줄수록 HR이 직접 시간을 들여 만나고 듣고 설명하는 일의 가치는 더 커질 것이다. 신뢰의 형성만큼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10년 전 주니어들의 노트는 틀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답들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아직 몰랐다. 오늘의 나는 그 노트에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인사의 본질은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먼저 읽고, 그 변화 속에서 구성원이 공정하게 대우받으며 각자 일의 본질을 찾도록 돕는 것이다. 그렇게 행복한 구성원이 만든 가치가 고객과 사회에 닿게 하는 것이다.
2013년에 우리는 HR이란 무엇인가를 탐색해볼 수 있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네 가지 질문을 토론 끝에 도출해 보았었다. 어쩌면 HR만 빼면, 누구든 한번 곰곰히 앉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모두의 고심 끝에 겨우 합의에 이르렀던 기억이 난다. 이제 나는 그 앞에 질문 하나를 더 놓는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내가 속한 HR 업(業)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 HR의 1차 고객과 최종 고객은 누구인가?
우리는 HR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내일 우리는 무엇을 다르게 해야 하는가?
얼음이 배를 조여올 때 섀클턴은 먼저 상황을 읽었고, 그 다음에 목표를 다시 썼다.
이제, 우리 HR은 어떻게 해야 할까?
10년 전 저장해둔 PDF를 꺼내어 보니 당시 스터디 멤버들이 보고싶어지네요. 제 경우 원고를 AI로 다듬었는데, AI 덕분에 당시의 생각과 지금 다시 하는 고찰에 대하여 하나하나 이론적으로 검증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센스메이킹 관련해서는 조직문화 실라버스를 준비해서 16주간 여러 연구논문을 함께 읽고 탐구하게 해주셨던 김성준 선생님도 부쩍 생각나는 하루입니다.
[1] Ulrich, D. (1997). Human resource champions: The next agenda for adding value and delivering results. Harvard Business School Press.
[2] Ulrich, D., Younger, J., Brockbank, W., & Younger, M. (2012). HR from the outside in: Six competencies for the future of human resources. McGraw-Hill.
[3] Schneider, B., & Bowen, D. E. (1985). Employee and customer perceptions of service in banks: Replication and extension. Journal of Applied Psychology, 70(3), 423–433.
[4] Heskett, J. L., Jones, T. O., Loveman, G. W., Sasser, W. E., & Schlesinger, L. A. (1994). Putting the service-profit chain to work. Harvard Business Review, 72(2), 164–174.
[5] Harter, J. K., Schmidt, F. L., & Hayes, T. L. (2002). Business-unit-level relationship between employee satisfaction, employee engagement, and business outcomes: A meta-analysis. Journal of Applied Psychology, 87(2), 268–279.
[6] Katz, D., & Kahn, R. L. (1978). The social psychology of organizations (2nd ed.). Wiley.
[7] Weick, K. E. (1995). Sensemaking in organizations. Sage.
[8] Weick, K. E., Sutcliffe, K. M., & Obstfeld, D. (2005). Organizing and the process of sensemaking. Organization Science, 16(4), 409–421.
[9] Colquitt, J. A., Conlon, D. E., Wesson, M. J., Porter, C. O. L. H., & Ng, K. Y. (2001). Justice at the millennium: A meta-analytic review of 25 years of organizational justice research. Journal of Applied Psychology, 86(3), 425–445.
[10] Edmondson, A. (1999). Psychological safety and learning behavior in work teams. Administrative Science Quarterly, 44(2), 350–383.
[11] Kruger, J., Wirtz, D., Van Boven, L., & Altermatt, T. W. (2004). The effort heuristic. Journal of Experimental Social Psychology, 40(1), 91–98.
[12] Mayer, R. C., Davis, J. H., & Schoorman, F. D. (1995). An integrative model of organizational trust. Academy of Management Review, 20(3), 709–734.
[13] McAllister, D. J. (1995). Affect- and cognition-based trust as foundations for interpersonal cooperation in organizations. Academy of Management Journal, 38(1), 24–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