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협상이 잘 끝났는지 물을 때, 우리는 거의 자동으로 이렇게 답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따냈는가.”
임금은 얼마나 올랐는지,
고용은 얼마나 지켰는지,
복지는 얼마나 늘렸는지.
이 숫자들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숫자만으로 협상의 성패를 온전히 말할 수 있을까요?
전통적인 노사 협상에서 성과는 대체로 이렇게 정리됩니다.
임금 인상률
인력 감축 규모
각종 수당과 복지의 개선 폭
보고서에 적기 좋고, 주주·조합원에게 설명하기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험도 한 번쯤 있으실 겁니다.
숫자로만 보면 “이번에는 꽤 성과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현장 분위기는 이상하게 싸늘해진 경우
협상은 끝났는데, 서로에 대한 불신과 피로감은 더 커진 경우
그 해에는 이긴 것 같지만, 다음 해 협상에서 훨씬 더 큰 저항과 방어가 돌아온 경우
이럴 때 드는 생각은 비슷합니다.
“조건은 나쁘지 않은데, 무언가 근본적인 것은 나아지지 않았다.”
관계중심 협상은 이 지점을 파고듭니다.
우리가 성과라고 부르는 것 안에
빠져 있는 층위가 있지 않은가.
머리로만 알던 이 구분을 몸으로 배운 순간이 있었습니다.
경력 6년 차에 최연소 ER 매니저가 되어 임단협을 맡았을 때였습니다.
그때 저는 “정석대로” 협상했습니다.
시장 데이터를 꼼꼼히 모으고
회사의 재무 상황을 분석하고
경쟁사 인상률과 비교해 전략을 수립하고 가능한 최저 수준의 숫자를 제시했습니다.
결과는 “역대급”이었습니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그랬습니다.
역사상 유례없이 낮은 임금 인상률로 합의를 끌어냈습니다.
숫자만 놓고 보면 분명 제가 잘한 협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2~3년 뒤, 법정 최저임금이 10% 이상 오르는 해가 찾아왔습니다.
기본급 수준이 매우 낮았던 현장 구조에서
그 인상분은 고스란히 한 해에 몰려 회사에 부담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나는 인상률이라는 퍼센트 숫자에만 매달려 있었지,
“이 금액으로 이 사람들이 일상을 버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충분히 묻지 못했다는 것.
그 협상은 단기적으로는 회사의 외적 성과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현장의 생활을 더 팍팍하게 만들었고,
나중에 훨씬 큰 폭의 보정을 한꺼번에 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숫자로만 보면 성공한 협상도,
사람의 삶과 시간의 축 위에서 보면 꼭 성공이 아닐 수 있다.”
이 경험은 성과의 층위를 나눠서 보아야 한다는 감각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깨닫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관계중심 협상은 성과를 세 층위로 나누어 봅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성과입니다.
임금, 복지, 고용, 근로조건
회사 입장에서는 비용, 생산성, 재무 지표
이 층위는 필수입니다.
이것이 무시되면 협상은 현실에서 붕 떠버립니다.
두 번째 층위는 관계입니다.
이번 협상으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이전보다 두터워졌는가
다음 위기가 왔을 때 “그래도 저쪽과는 한 번 이야기해볼 수 있다”는 감각이 남아있는가
갈등 이후에도 연락할 수 있는 창구와 사람이 유지·확대되었는가
이 층위는 보고서에 잘 적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음 협상, 다음 위기, 다음 세대의 노사 관계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세 번째 층위는 가장 안쪽에 있습니다.
이번 협상을 통과하면서, 우리 조직의 구성원들은 어떤 태도를 익혔는가.
“우리는 갈등을 이렇게 다루는 사람들이다”라는 집단적 기억이 형성되었는가.
“우리 회사/우리 노조는 이 터전을 함께 책임지는 집단이다”라는
시민적·공화적 감각이 조금이라도 자랐는가.
이 층위의 성과는 바로 눈앞에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쌓이면 조직 문화와 사회적 신뢰의 차이로 돌아옵니다.
관계중심 협상의 관점에서 이 질문은 이렇게 확장됩니다.
“이번 협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는가?”를 넘어,
“우리는 어떤 관계가 되었는가, 어떤 ‘우리’가 되었는가?”로 말이죠.
예를 들어 이런 두 협상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A 협상: 임금은 많이 올렸지만 서로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상대”로 기억하게 된 협상
B 협상: 수치상으로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 남았지만 “그래도 저쪽은 우리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려 한다”는 경험을 남긴 협상
전통적 성과 기준만 보면 A가 더 나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3년, 5년, 10년 뒤를 생각하면 이 질문을 다시 던지게 됩니다.
“어떤 협상이 우리 조직과 터전을 더 오래 버티게 했는가.”
“어떤 협상이 다음 세대의 노사관계에 더 나은 출발선을 남겼는가.”
그때부터 관계 성과, 시민적 성과의 중요성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앞서 우리는 “공화적 주체”와 “공동의 터전을 책임지는 태도”를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그것을 성과의 언어로 옮겨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과를 볼 때, 우리 편의 이익뿐 아니라 이 조직과 공동체 전체가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함께 묻는 감각.
예를 들어 이런 질문들입니다.
이번 협상이 회사의 3년, 5년 뒤 재무 구조에 어떤 부담과 기회를 남기는가
이번 합의가 현장 구성원들의 사기를 올리는 방식으로 작동하는가, 아니면 ‘버티다 지쳐서 받아들인 결과’로 남는가
이번 갈등 처리 방식을 사회와 시민들은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공화적 감각을 성과 평가에 끌어들이는 순간, 협상 결과를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임금·복지·고용만이 아니라
신뢰 자본,
조직 문화,
시민적 신뢰라는 층위까지
함께 고민하게 됩니다.
관계중심 협상을 꾸준히 시도할 때 성과의 얼굴은 조금씩 이렇게 달라집니다.
“이번에 얼마나 따냈나”에서
→ “이번에 우리가 어떤 관계를 남겼나”로.
“이번에 얼마나 버텼나”에서
→ “이번에 우리가 어떤 ‘우리’가 되었나”로.
그리고 이런 문장을 조금씩 실제로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이번에는 숫자로만 보면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이해가 분명히 쌓였습니다.”
“이 합의는 우리 편의 이익뿐 아니라, 이 조직이 5년 뒤에도 버틸 수 있는 구조를 함께 고민한 결과입니다.”
그 순간, 성과는 단순한 결과 보고서의 숫자가 아니라
“우리 조직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려 하는지 보여주는 미래의 단서”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