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까지 노사 협상에서 익숙하게 다뤄져 온 분배적 협상과 통합적 협상의 한계를 짚어보고,
그 너머에서 관계를 중심에 두는 새로운 협상 패러다임의 가능성을 살펴보았습니다.
협상의 주체를 개인·집단이 아니라 관계로 보고,
과정을 거래가 아닌 ‘함께 예측하고 배우는 여정’으로 바라보며,
성과의 기준을 숫자를 넘어 신뢰와 성장까지 확장해 보자는 제안을 이어왔는데요.
이제 마지막으로, 그런 관계중심 협상이 AI 전환기의 조직에서 ‘성과’라는 이름을 어떻게 다시 쓰게 만드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HR·노사 실무자 한 사람의 선택과 어떤 연결을 맺는지 이야기해보며 시리즈의 끝을 맺어보고자 합니다.
관계중심 협상의 마지막 질문은 결국 하나입니다.
“앞으로 이 조직에서 무엇을 성과라고 부를 것인가.”
AI 전환이 본격화되는 지금, 전통적인 성과의 얼굴만으로는 조직을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임금·비용·이익으로만 성패를 나누는 협상은 짧게는 이길 수 있지만, 길게는 조직의 체력을 갉아먹습니다.
노사 협상 테이블에 서 있는 HR 실무자들에게 익숙한 질문은 대개 이런 것들입니다.
“이번에 몇 %까지 줄 수 있나.”
“이 비용 구조로 내년 버틸 수 있나.”
“얼마나 덜 내어주고 끝낼 수 있나.”
이 질문들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분명히 남습니다.
숫자로 보면 나쁘지 않은 합의였는데, 현장 분위기는 더 싸늘해지는 경우.
협상은 끝났는데, 다음 회의에서 서로를 더 경계하게 된 경우.
그때 마음 한편에서 이런 생각이 지나갑니다.
“조건은 틀리지 않았는데, 뭔가 근본적인 건 괜찮지 않다.”
이 글은 그 “근본적인 것”을 성과의 언어로 다시 붙잡아 보려는 시도입니다.
노사 협상에서 성과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보통 한 층위만 봅니다.
임금, 복지, 고용, 비용 같은 숫자로 환산 가능한 외적 성과입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오래 있다 보면, 성과를 적어도 세 층위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는 감각이 생깁니다.
외적 성과
임금, 복지, 고용, 제도, 비용, 재무 구조
보고서와 대외 설명에 바로 쓰이는 지표들입니다.
관계 성과
이번 협상으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이전보다 두터워졌는가.
다음 위기에도 “그래도 저쪽과는 한 번 이야기해볼 수 있다”는 감각이 남아 있는가.
갈등 이후에도 연락할 수 있는 창구와 사람이 유지·확대되었는가.
시민적·내적 성과
이번 협상을 통과하면서, 우리 조직은 어떤 태도를 익혔는가.
“우리는 갈등을 이렇게 다루는 사람들이다”라는 집단적 기억이 형성되었는가.
“우리는 이 터전을 함께 책임지는 집단이다”라는 공화적 감각이 조금이라도 자랐는가.
지금까지 노사 협상은 거의 언제나 첫 번째 층위, 외적 성과에만 조명을 비춰왔습니다.
문제는, 나머지 두 층위를 무시한 채 첫 번째 층위만 끌어올리면
결국 그 숫자를 떠받치는 기반이 약해진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관계를 중심에 두는 관점에서 보면, 성과란 이런 제안이 됩니다.
“숫자를 지우자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시민적·내적 성과에도 빛을 나누자.”
여기서 중요한 전환점이 하나 등장합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같이 보는 공화적 감각입니다.
전통적인 프레임에서는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회사: “우리는 회사와 주주의 이익을 지켜야 한다.”
노조: “우리는 조합원의 몫을 최대한 확보해야 한다.”
여기서 성과는 언제나 “우리 편”의 기준으로만 측정됩니다.
공화적 감각은 질문의 초점을 한 단계 옮깁니다.
“우리는 우리 편의 이익을 지키면서도, 이 터전 자체를 망가뜨리지 않을 책임을 함께 지고 있는가.”
“이 조직과 산업, 지역 사회가 5년, 10년 뒤에도 버틸 수 있는 구조인가.”
이 감각을 가진 조직은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선택을 합니다.
위기 때:
먼저 자르는 대신, 먼저 설명하고 함께 버틸 방법을 찾습니다.
협상 때:
“이번에 얼마나 따냈나”보다 “이번에 어떤 관계를 남겼나”를 같이 묻습니다.
단기적으로는 번거롭고, 내부 설득도 더 어렵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조직은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그래도 저 조직은 사람과 터전을 같이 본다.”
이 인상은 숫자로 바로 보이지 않지만,
채용 시장에서, 위기 때 정책 환경에서, 협상 테이블에서 우군의 크기로 돌아옵니다.
공화적 감각은 착한 척이 아니라, 위기와 전환을 통과하기 위해 꼭 필요한 생존의 감각입니다.
관계중심 협상을 꾸준히 시도하는 조직은, 장기적으로 전혀 다른 미래의 성과표를 갖게 됩니다.
그 성과표에는 다음과 같은 항목들이 조금씩 추가되어 갑니다.
“임금 인상률” 옆에 적히는 “신뢰 인상률”
이번 협상으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두터워졌는가.
“인력 감축 규모” 옆에 적히는 “관계 유지율”
갈등 이후에도 연락할 수 있는 창구와 사람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
“협상 타결 시점” 옆에 적히는 “학습 지수”
우리는 이번 갈등에서 무엇을 배우고 돌아왔는가.
이 지표들은 아직 엑셀로 완벽하게 계산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조직은 점점 이런 문장을 입밖에 낼 수 있게 됩니다.
“이번 합의는 우리 편의 이익뿐 아니라, 이 조직이 5년 뒤에도 버틸 수 있는 구조를 함께 고민한 결과입니다.”
“숫자로만 보면 완벽하지 않지만, 다음 위기 때 다시 마주 앉을 수 있는 관계를 분명히 남겼습니다.”
그때 협상은 더 이상 “올해 몇 % 싸움”이 아니라,
“이 조직이 어떤 방식으로 미래를 통과해갈 것인가”를 시험하는 과정이 됩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따라온 노사·HR 실무자라면, 아마 이런 감각이 스칠 수 있습니다.
“말은 알겠는데, 나는 규율과 규약, KPI와 정치 사이에 끼어 있는데… 내가 실제로 바꿀 수 있는 게 있을까.”
관계중심 협상은 거대한 선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아주 작은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다음 협상을 준비할 때, 그 선택은 이렇게 생겼을 수 있습니다.
안건 정리를 마친 뒤, 메모장 맨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어두는 것.
“이번 갈등에서, 나는 무엇을 배우고 돌아오고 싶은가.”
전략 회의를 끝낼 때, 한 번쯤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이번 협상이 우리 조직의 3년 뒤 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지, 10분만 같이 이야기해볼 수 있을까요?”
협상장 안에서, 한 번쯤 숫자가 아닌 문장을 꺼내보는 것.
“이 안에서 여러분이 가장 불안한 지점이 어디인지, 한 번만 더 솔직하게 듣고 싶습니다.”
이 질문 하나, 이 문장 하나가 당장 판을 뒤집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질문이 반복될 때, 조직은 아주 천천히 다른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언젠가 같은 테이블에 앉은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말 속에, 관계중심 협상이 꿈꾸던 미래 성과의 얼굴이 조용히 담겨 있을 것입니다.
AI 전환, 규제 변화, 노동 환경의 재편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법과 제도가 바뀌어도, 협상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과 관계가 남습니다.
신뢰 없이는 제도도 작동하지 않고,
대화 없이는 어떤 변화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질문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옵니다.
“이 조직은 앞으로 무엇을 성과라고 부를 것인가.”
“나는 다음 협상에서, 우리 조직의 미래 성과를 위해 무엇을 한 줄이라도 다르게 적어볼 것인가.”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이미 관계중심 협상이 시작된 장면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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