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조금 특별한 발표를 했다.
내가 지나온 커리어와 리더십 여정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평소라면 발표 자료를 만들면서 무엇을 보여줄지부터 생각했을 것이다.
성과와 프로젝트를 정리하고, 숫자를 배치하고, 내가 무엇을 해냈는지를 보여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처음으로 내 커리어를 한 장의 화면 위에 펼쳐놓고, 조금 떨어져 바라보았다.
세일즈 애널리스트로 시작해 HR을 만났고,
HR 리더가 되었고, 최초의 공장의 여성 인사팀장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그것도 회사에서 생산량이 가장 많은 공장의...남초 조직에서 여성 노무팀장이라는 자리를 경험했다.
그리고 지금은 조직 전체를 바라보는 HR 리더의 자리까지 왔다.
돌아보니 꽤 열심히 살았다. 성과를 만들었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때로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먼저 걸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커리어를 한 줄씩 정리할수록
‘무엇을 했는가’보다 ‘어떤 사람이 되어왔는가’가 궁금해졌다.
이번 발표를 준비한 곳은 KoLa(Korea Leader Development Agent)였다.
KoLa는 국민대학교 경영대학원 리더십과코칭전공(LeaCo)을 기반으로 이어지는 리더십 학습 플랫폼이다.
리더십을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각자의 현장에서 경험한 고민과 실천을 나누며 함께 성장하는 공간이다.
현재 나 역시 리더십과 코칭을 공부하며 이곳에서 배우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걸어온 리더십의 이야기를 꺼내놓는 사람이 되었다.
그 순간부터 22년의 커리어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발표를 준비하며 가장 어려웠던 것은
성과를 정리하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의 리더십은 무엇인가’를 말하는 일이었다.
성과는 숫자로 보여줄 수 있다.
매출, 비용, 프로젝트, 조직 변화, 평가 결과.
하지만 리더십은 숫자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내가 어떤 결정을 했는지보다.
그 결정 앞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는지.
내가 얼마나 빠르게 답을 냈는지보다
사람들이 내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편하게 말할 수 있었는지.
내가 얼마나 많은 성과를 만들었는지보다
나와 함께 일한 사람들이 조금 더 성장했는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잠시 멈췄다.
돌아보면 나에게는 성과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꽤 분명했다.
성취하고, 행동하고, 전략을 세우고, 체계를 만들고, 자원을 정리하는 것.
갤럽 Top 5 강점도, 성취(Achiever), 행동(Activator), 전략(Strategic), 체계(Discipline), 정리(Arranger)였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는 직장에서 인정받는 법을 비교적 일찍 배웠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고,
목표가 주어지면 달성하고,
혼란스러우면 구조를 만들었다.
성과는 나에게 익숙한 언어였다.
빠르게 움직이고,
결과를 만들고,
다음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내가 나를 증명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런데 리더가 되고 나니
사람은 숫자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조금씩 질문이 달라졌다. “성과를 만드는 능력과 사람을 성장시키는 능력은 같은 것일까?”
나는 오랫동안 좋은 답을 빨리 내놓는 사람이 좋은 리더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책을 제시하고, 갈등이 생기면 결론을 내리고, 조직이 흔들리면 방향을 정해주는 것.
그런데 조직에서 리더의 역할이 커질수록 정답을 갖고 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자신의 답을 찾도록 돕는 것.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알려주는 것보다 상대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질문하는 것.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서로 다른 생각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
공감은 동의가 아니었다. 생각이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이 만날 수 있는 맥락을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발표를 준비하기 전까지는 나는 계속 더 좋은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많이 알고, 더 완벽하게 판단하고, 더 잘 설명하고,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고.
그런데 22년을 한 번에 돌아보고 나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나는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경험했다.
실패도 있었고,
성공도 있었고,
잘했다고 생각했던 선택도 있었고,
다시 돌아본다면 다르게 했을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러니 이제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성과를 증명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과 힘을
다른 사람의 성장으로 어떻게 돌려줄 것인가.
그것이 앞으로 내가 풀어야 할 질문이었다.
그래서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어디로 가야 하는지가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성과를 만드는 힘을 버리고 싶지 않다.
빠르게 판단하는 힘도,
전략을 세우는 힘도,
실행하는 힘도,
끝까지 결과를 만들어내는 힘도
여전히 나의 중요한 자산이다.
22년의 현업 경험은 앞으로도 내가 리더십을 배우고 연구하는 가장 살아있는 데이터가 될 것이다.
다만 이제는 그 힘의 방향을 조금 바꾸고 싶다.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인정받는 리더를 넘어 어려운 순간에 기대고 싶은 리더가 되고 싶다.
정답을 가장 먼저 말하는 리더보다 좋은 질문을 던지는 리더가 되고 싶다.
강한 리더이되 차갑지는 않은 사람.
따뜻한 사람이되 원칙 앞에서 흔들리지는 않는 사람.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가 나를 떠올리며 “그 사람과 일하면서 내가 조금 더 성장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리더.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22년을 돌아보고 나서야 내가 가야 할 방향이 조금 선명해졌다.
성과를 만드는 나에서, 사람을 성장시키는 리더로. 예전에는 리더가 된다는 것이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빨리 판단하고, 더 강하게 이끄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리더십은 내가 가진 힘을 과시하는 일이 아니라
그 힘을 누구를 위해,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앞으로는 조금 덜 완벽해도 괜찮을 것 같다.
모든 답을 알고 있지 않아도 괜찮고, 때로는 질문을 던진 채 기다려도 괜찮다.
사람을 믿고, 사람이 성장할 시간을 기다리는 것.
그것도 리더의 힘이라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리고 그 방향을 정하고 나니 정말 마음이 편해졌다.
“완벽한 정답 대신, 깊은 공감을 선택한다는 것.” 아마 이제 그 문장이 조금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다.
완벽한 리더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다운 리더가 되는 것.
단단함은 버리지 않되 차갑지 않게.
따뜻함을 잃지 않되 흔들리지 않게.
선한 마음을 갖되 무르지 않게.
그렇게 나는 다음 리더십의 계절로 가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