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은 집중을 만들고, 여유는 조직을 지킨다

결핍은 집중을 만들고, 여유는 조직을 지킨다

책 <결핍은 조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리뷰
조직설계HRBP리더십시니어리더임원CEO
정욱
강정욱Oct 25,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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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은 우리의 현실을 좌우한다

가난한 아이와 부유한 아이에게 똑같은 동전을 보여주고 크기를 맞혀보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가난한 아이들은 그 동전을 실제보다 더 크게 그린다고 한다. 그 이유로 연구자들은 아이들의 인식이 결핍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최근 책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읽었다. 강렬한 경험은 인식을 형성하고, 인식은 보이는 현실을 좌우한다. 배고픈 사람에게 케이크가 유독 빨리 보이고, 외로운 사람은 타인의 표정을 유독 잘 읽는다. 그리고 흥미로운 건, 결핍은 우리가 의식하기도 전에 무엇을 먼저 보게 할지 정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결핍이 무조건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적절한 결핍은 효율성을 높인다. 마감이 다가오거나, 제한이 주어질 때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 갖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순간, 사람들은 비로소 집중하기 시작한다. 저자들은 이를 '집중 배당금(focus dividend)'이라고 부른다. 결핍이 주는 일종의 보너스인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효과를 만드는 것이 꼭 실제로 남은 시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심리학자 제이미 커츠는 졸업을 6주 앞둔 대학 4학년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다. 한 그룹에게는 졸업까지 '아주 짧은 시간'만 남았다는 전제로, 다른 그룹에게는 '꽤 많은 시간'이 남았다는 전제로 대학 생활에 대한 글을 쓰게 했다. 6주라는 시간은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했는데, 두 그룹의 행동은 달랐다. 졸업이 곧 다가온다고 생각한 학생들이 활동에 더 많이 참여한 것이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행동이 달라졌다.

개인적으로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몇 년 전 일주일에 두 번, 30분씩 온라인 영어 회화를 했다. 꾸준히 이어가던 중 ChatGPT가 등장하면서 굳이 튜터와 시간을 맞추지 않아도 AI로 회화 연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번거로운 일정 조율을 하지 않아도 되고, 언제든 원할 때마다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쉽게 예상되듯, 나는 거의 영어 회화를 하지 않았고 결국 기존 방식으로 돌아갔다. '일주일에 두 번'이라는 제약이 그나마 나를 행동하게 한 것이다.

결핍의 대가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결핍은 우리에게 이로운 것인가? 결론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다른 실험에서 연구진은 참가자들에게 라운드마다 쓸 수 있는 시간을 다르게 주었다. '넉넉한' 그룹은 라운드당 50초, '부족한' 그룹은 15초였고, 조건에 따라 다음 라운드의 시간을 이자를 붙여 빌려 쓸 수 있게 했다. 시간을 빌릴 수 있으면 더 유리할 것 같지만, 결핍 상태의 참가자들은 오히려 과도하게 빌렸고, 그것이 자신에게 손해로 돌아왔다. 당장의 라운드에 몰입한 나머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것이다.

조직에서도 이런 장면은 낯설지 않다. 이번 분기 목표에 너무 몰입한 팀은 미래의 부채를 만든다. 반복되는 야근으로 인한 번아웃, 미뤄둔 문서화, 쌓이는 기술 부채 등. 또 그렇게 급한 불을 끄는 동안 리더십, 구성원 육성, 팀 회고처럼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은 뒤로 밀린다. 그저 모두 앞만 보고 달려갈 뿐이다. AI가 조직으로 깊숙하게 들어온 지금은 더욱 그렇다. 과거에 비해서 훨씬 더 일의 템포가 빨라졌고, 우리의 주의력은 바닥을 향한다. 미래를 내다볼 정신은 당연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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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제작

창의성 측면에서 흥미로운 연구가 있다. 테레사 애머빌은 9,000건이 넘는 일일 기록을 분석했다. 시간 압박이 높아도 창의성이 나온 날은 집중과 의미 있는 긴급함으로 채워져 있었다. 반면 창의성이 나오지 않은 날은 그런 집중이 없었고, 사람들은 계속 일을 바꿔가며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마감이 하나의 목표에 집중하게 하는지 아니면 여러 일을 동시에 쫓게 만드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조직은 결핍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까?

그렇다면 조직은 결핍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우선, 잘 설계된 운영 루틴은 중요하다. 서로의 의지를 너무 믿기보단, 장기 프로젝트를 잘게 나누고 의도적으로 중간 마감을 만들어야 한다. 혼자 하면 일이 끝없이 늘어질 수 있으니 다른 사람들과 협업하고 소통하도록 하는 것이다.

동시에 필요한 것이 있다. 적절한 '여유'를 설계하는 일이다. 책에 소개된 미국 미주리주의 세인트존스 병원 사례가 좋은 예다. 2002년 이 병원의 수술실은 가동률 100%였고, 전체 수술의 약 20%를 차지하는 응급 수술이 생길 때마다 예정된 수술을 밀어내야 했다. 의사들은 몇 시간씩 대기하거나 새벽 2시에 수술을 했고, 직원들은 예정에 없던 초과 근무를 반복했다. 이때 외부 자문가의 해법은 뜻밖이었다. 수술실 하나를 비워두라는 것이었다. 그 결과 병원은 전체 수술 건수를 5.1% 늘리면서도 운영은 효율적으로 바뀌었고, 전체 수익도 증가했다. 비어 있는 방 하나가 나머지 방들을 온전히 일하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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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은 여기서 '군살(fat)'과 '여유(slack)'를 구분한다. 군살은 목표에 기여하지 않는 낭비이지만, 여유는 예상치 못한 일을 흡수하는 완충 장치다. 효율을 외치며 군살을 빼다 보면 여유까지 함께 잘라내기 쉽다. 그 순간 조직 전체가 터널 안으로 들어간다. 최근 구성원을 채용하지 않고, AI 에이전트를 활용하여 극단적으로 효율적인 조직을 운영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군살을 빼는 것은 좋지만, 조직에서 꼭 필요한 '여유'까지 사라지진 않도록 신경 쓸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좋은 조직 설계란 결핍을 없애는 것도, 결핍을 극대화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집중이 필요한 곳에는 마감을 통한 결핍의 순기능을 설계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생기는 영역에는 꼭 필요한 여유를 남겨두는 것. 조직을 설계하는 리더들이 함께 품어야 할 질문이 아닐까?


정욱
강정욱
레몬베이스 People & Culture 팀 리더
레몬베이스 People & Culture Team Lead로 일하고 있습니다. 시리즈 A부터 D까지 여러 스타트업에서 경험을 쌓았고, 개인과 조직이 함께 성장하는 문화를 만들고자 노력 중입니다. 저서로 <나의 첫 커리어 브랜딩>과 <스타트업 HR 팀장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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