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근로기준법 제50조에서는 1일 8시간, 1주 40시간 즉, 법정근로시간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이 기준은 지난 수십 년간 '생존을 위한 노동'과 '건강한 삶을 위한 휴식'이 줄다리기한 끝에 만들어진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다. 올해 6월 출범한 현 정부는 이 법정 기준을 상회하는 '주 4.5일제' 도입을 주요 노동정책으로 천명하고 하나의 표준으로 적용하기 위해 ① 2026년도 예산을 편성하여 4.5일제도 도입 기업에 1인당 20만 원~60만 원의 지원금을 지급하고 ② 나아가 '실 노동시간 단축 지원법'을 통해 보조금과 세액공제까지 제공할 계획이다.
정부가 제시하는 4.5일제 도입의 근거는 명확해 보인다. ① OECD 평균보다 긴 근로시간 ② 장시간 근로로 인한 출산율 하락 ③ 근로자 삶의 질 향상 필요성 ④ 그리고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신규 일자리 창출 등 언뜻 보면 모두 타당한 주장이다. 하지만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지금, 주 52시간제조차 제대로 안착하지 못한 상황에서 또 다시 근로시간 단축이라는 거대한 담론을 제기하는 것일까?
전국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인사·노무 컨설팅을 하다 보면 현재 중소기업의 근로시간 운영 현황을 생생하게 접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52시간제는 아직 성공적으로 안착했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다수의 대기업의 경우 PC-off 제도 등을 통해 근로시간을 강제로 관리하며 관행적으로 실시하던 연장·휴일근로가 상당히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소기업 현장에서 주52시간은 아직도 '다른 세계 이야기'에 가깝다. 왜 그럴까? 중소기업의 경쟁력 구조 자체가 '유연한 대응력'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업종별 현실을 들여다봐야 한다.
(1) 자동차 부품 업체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중소 제조업체를 생각해보자. 이곳의 업무는 경영지원(회계·세무·인사·총무 등), 생산관리(구매·품질·자재관리 등), 생산(금형·가공·선반 등), 물류, 영업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들 기업의 가장 중요한 경쟁력은 바로 '현장 대응력'이다. 특히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에 납품하는 회사라면 발주 시기 변경이나 불량 발생 시 시공간을 가리지 않고 즉시 움직여야 한다. 밤이든 주말이든 상관없다. 이들의 경쟁력은 고도 기술이 아니라 '원하는 시기에 합리적인 가격으로 물량을 맞춰주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중소 제조업체는 다음과 같은 구조적 특징을 갖는다.
기술개발보다는 효율적인 인건비 관리로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인적자원투자수익률이 평균 110%~130% 수준이다
내국인 신규인력 확보가 어려워 외국인 근로자 비중이 높다
연장근무와 특근이 줄어들면 근로자의 실질 소득이 감소한다
여기에 4.5일제를 적용할 수 있을까? 만일 실제 적용된다면 '대응력 약화 → 불량 증가 → 납기 지연 → 거래 중단 → 경영 악화' 라는 시나리오가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2) B2C 중심의 도소매업
도소매업의 상황은 또 다르다. 이곳의 업무는 판매, 상담, 고객응대, AS, 클레임 처리 등 모든 프로세스가 실제 고객의 시간과 니즈에 맞춰 움직인다. 또한 매장 운영, 온라인 CS, 물류·배송, 재고관리, 판매기획, 마케팅, 콘텐츠 운영 등 직무별 편차가 매우 크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일하는 방식의 편차가 극심하다는 의미다. 이 업종에서는 고객과의 접점이 곧 생명선이다. 즉, 이들의 경쟁력은 '좋은 제품'이 아니라 '고객 응대와 높은 서비스 품질'에서 나온다. 따라서 대부분의 도소매 업체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는다.
누군가는 항상 고객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같은 회사 내에서도 직군·직무마다 일의 형태가 매우 다르다
고객 응대와 서비스 품질이 회사의 핵심 경쟁력이다
이 업종에 4.5일제를 적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만일 실제 적용된다면 '응대 공백 증가 → 고객 불만 확대 → 서비스 품질 하락 → 매출 감소 → 비용 절감 압력 → 인력 감축 또는 외주·AI 대체 확대' 라는 시나리오가 펼처질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