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역은 상대에게 덕과 예를 갖추어 설명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설득되게 하는 과정이다. 세종 이도가 책에서 배우고 국가경영에 사용한 방식이었다. 그의 변역리더십이 빛을 발한 때가 있었다. 1432년부너 1438년까지 7년여 동안 여진족과의 혼란했던 상황을 마무리 지은 과정이 그러하다. 세종실록에는 이때의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연재는 그 하나하나의 기록을 연결해서 쓴 <이도 다이어리>에서 발췌 했다. 필자는 이 책의 저자이다. 자고 나면 새로운 기술적 개념이 등장하고, 우리를 혼란한 상황으로 빠뜨리고 변화를 강요하는 지금, 혼란한 상황 속에서 전략을 짜고 실행하고 결과를 만든 세종 이도의 변역하는 지혜를, 한 가지 해결 방안으로 제시하고 싶다. 이때 그의 나이가 36살이었다.
연재 1화 혼란한 긴급상황, “모두의 생각을 모아야 한다”
연재 2화 균형이 깨진상황, “적과의 동침도 해야 한다”
연재 3화 고비를 넘는시기, “전쟁의 끝이 보인다”
연재 4화 바람처럼 사라진혼란, “비로소 보여진 새벽의 평온”
그리고 연재 총 정리
길게 늘어선 귀순 행렬
1438년 1월 6일, 여진족 오도리 부족장 동범찰과 동창이 소수의 부족 만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 요동으로 넘어갔다. 수십년을 조선땅에서 지지고 볶으며 살았던 오도리 부족의 부족장이 결국, 그렇게 조선을 버리고 떠났다. 그리고 중국 황제에게 찾아가서 이만주와 같은 곳에 살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황제가 거부했다고 한다. 이들이 조선을 떠난 이유를 확인해 보니, 함경도 회령을 다스리는 관리가 오도리들이 작은 실수를 헤도 감정을 섞어서 판결하는 것이 누적된 상태에서 매질까지 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때 이만주가 끼어들어서 조선과 오도리 부족 사이를 이간질해서 이러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도리들은 조선을 두려워하기에, 대다수의 오도리들이 부족장을 따라가지 않고 조선에 남아 있다. 그렇지만, 중국으로 떠난 자들이 이만주와 가까이 붙어 살고 정착하게 되면, 조선에 남아있는 오도리까지 조선을 떠나는 상황으로 번질 수도 있다. 조선에 사는 여진족인 오도리 부족과 이만주를 따르는 올량합, 두 세력이 합치는 것은 조선에 또 다른 위협이 될 수 있기에, 남은 오도리들이 조선을 떠나지 못하게 무조건 막아야 한다.
작년 12월, 말을 탄 여진족 3,000여명이 평안도 벽동에 들이닥쳐서 나무로 둘러친 울타리를 불태운 사건이 있었다. 이때, 신진보 장군이 압록강 건너까지 쫓아가서 싸우다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했었다. 신진보 장군의 무리한 선택 때문에 아까운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가 부임할 때 내가 가까이 불러서 이야기를 나눴더니 신진보는 “이만주에게 독약을 먹여서 라도 잡아오겠다”라고 거침없이 말했었다. 그가 적을 가볍게 여기고 혈기가 왕성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대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국경을 지킬 장수가 절대 부족한 것이 조선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비록 전투에는 패했지만, 사람들 사이에 반드시 돌로 성을 쌓고 그 안에 집을 짓고 살아야 안전해 진다는 공감대가 커진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아직도 평안도 압록강의 강 폭이 좁은 강가에는 여진족이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해서 우리 농민에게 피해를 입힌다. 농민이 집과 땅을 버리고 안전한 곳으로 떠나는 농민이 줄지 않는 이유이고, 이곳에 사는 사람이 줄어 드니 국경 방어가 허술해지는 악순환을 초래하게 된다. 군대를 강변 고을에 추가로 배치하고 정비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이유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조선에 귀화한 여러 여진족들이 농사가 잘되는 강변을 따라서 삼삼오오 모여 살며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는 등 정착하는 인구가 늘고 있는 것에서 희망이 보인다. 농민이 줄어든 국경지역에서 이들이 조선과 여진족 사이에 군사적 완충역할을 해주어서 안정을 찾아가는데 큰 보탬이 되고 있다. 농사를 지어서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덤이다. 또한 이러한 결과로, 이만주의 영향력이 점차로 줄어들고 있기에, 우리에게는 여러가지로 호재다.
작년 가을에 여진족 거여첩합을 붙잡아서 잠시 강화도에 두었다. 거여첩합은 함경도 국경지역을 수차례 침범하여 우리 백성을 죽이고 납치해간 악랄한 자이지만, 함부로 처벌할 수 없다. 이 자를 따르는 무리가 중국 황제에게 찾아가 조선을 해코지하면, 오히려 우리가 난감한 상황에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분하지만, 거여첩합에게 집과 노비를 주고 가족과 함께 서울에 살게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여진족에게 감정이 있는 우리 백성이 보기에는 왕을 욕할 수도 있지만, 이 모습을 본 누구라도 여진족이 사는 지역으로 돌아가서, 조선은 귀순하면 여진족 누구라도 죽이지 않고 후하게 대접한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이 내가 바라는 전략이다. 예상대로 거여첩합이 풍요롭게 사는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돌아가는 여진족이 있다. 내 마음이 통한 것인지, 홀라온 부족장 한명이 경복궁까지 천리 길을 찾아와서 귀순 신청을 했다. 그리고 2월 5일에는 중국 땅으로 도망친 오도리 부족장 동범찰의 아들이 귀순했다. 이럴 때일수록 긴장을 늦추면 안된다. 그래서 2월부터는 귀순하려는 여진족은 반드시 신상명세를 작성하게 하고, 알고 있는 여진족 동향 정보를 말하게 했다. 그리고 또다른 방편으로, 사형수 중에 몇 명을 선별해서 여진족 동향을 정탐하기 위해 보냈다.
하루는 이만주 무리가 황제에게 가는 우리나라 사신 일행을 평안도 건너 중국 땅에서 공격하고, 이때 평안도를 지키는 우리 군대가 사신 일행을 보호하려고 국경을 넘어가면, 그 빈틈을 이용해서 이만주와 연합한 다른 여진족 무리가 평안도를 기습 공격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만주가 연합하려는 여진족이 조선에 찾아와서 이만주의 계략을 낱낱이 털어 놓았기에 알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7월 6일에는 여진족 홀라온 몇몇 부족장이 부하를 보내서 귀순의사를 표시했다. 다음날에는 중국으로 도망쳤던 오도리 부족장 중의 한명인 동창이 이만주의 딸과 결혼하려 했으나, 거절당하자 조선에 찾아와서 20여일 동안 머물며 불평불만을 늘어 놓고 돌아갔다.
떠나는 날에 “지금 오도리 30여 가족이 두만강 너머의 중국 훈춘 지역에 머물고 있는데, 그들을 함경도 회령으로 다시 데려 오고 싶다”고 말했다. 정말 듣고 싶은 기다리던 대답이었지만, “내가 현지 사정을 모르니, 알아보고 답해주겠다”라고 말하고 그대로 보냈다. 이처럼 일년 내내, 정말 다양한 여진족들이 경쟁하듯 귀순하러 서울까지 먼 길을 찾아온다. 서울까지 먼 길을 왔으니 밥을 먹이고 편히 쉬게 한 후에,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차등 있는 선물을 준다. 비용을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많이 오지만, 그래도 이 방법이 국경을 안정화하는 데 기여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귀순자가 급격히 증가한 가장 큰 이유는, 수년 동안 함경도 회령·종성·경원·경흥 네 곳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인구를 늘리고 돌로 성을 쌓으며 방어체계를 갖춘 영향이 가장 크다. 이제 함경도 인구가 5,330명이 넘었다. 평안도 또한 올해만 해도 평안도 남쪽에 사는 백성을 북쪽 압록강 강변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 결과, 4개월 만에 여연에 150 가족, 자성에 140가족, 강계에 300 가족, 이산에 160가족, 벽동에 100가족, 창성에 150가족이 증가했다. 늘어난 인구만큼 여진족에 맞서 싸울 사람 수가 늘었기에, 여진족이 공격할 엄두를 못 내는 것이다. 비로소 7년여 동안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벌어진 긴장과 대립의 끝이 보이는 듯하다. 이제 이만주가 강가의 오리알과 같은 초라한 신세가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치열했던 전쟁의 흔적과 상처가 곳곳에 남아있어서 하루 아침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길었던 전쟁의 기운이 사라지면, 다시 정상으로 돌려 놓아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사그라지는 혼란과 일하다 죽는 신하들
3월, 여진족이 어금니가 있는 큰 돼지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는 이징옥 장군이 지금 함경도 국경에 없다. 갑자기 국경 방어에 큰 구멍이 뚫려버린 긴급상황이다. 이징옥이 풍병에 걸려서 온몸에 침을 맞고 뜸을 뜨고 있던 중에 모친상을 당했다. 그래서 요양을 겸해서 잠시 고향에 보냈는데, 그의 아버지마저 병이 들었다. 이제는 이징옥을 쉬게 해야 할 때인 듯하다. 시급히 그를 대체할 장수를 결정하는 결단이 필요해졌다. 함경도 도절제사 김종서가 김효성 장군을 추천했다. 김효성은 지난 1433년에 여진족을 토벌할 때 공을 세운 장군이다. 그런데, 김효성 역시 고향에 늙은 모친이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동안 이징옥과 김종서를 함경도 국경에 함께 두었지만, 사실 둘은 생각과 행동이 너무나 다른 장군과 관리였다. 이징옥이 몸이 앞서는 전형적인 무인(武)이라면, 김종서는 생각이 깊은 전형적인 문인(文)이다. 한 예로 여진족을 대하는 말을 들어 보면, 이징옥은 “모조리 죽여야 뒤탈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싸움꾼인데 반해, 김종서는 “서로 죽이는 싸움은 끝이 없으니 참아가며 살살 달래야 한다”라는 신념을 가진 전략가다. 지금까지 나는 둘의 의견을 종합해서 최선의 대안을 찾아왔다. 용맹한 이징옥과 유연한 김종서를 함경도에 함께 둔 이유였다. 성격이 상극인 두 명이 한곳에서 지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적지않은 시간 동안 조화를 이루며 국경을 방어해 준 것이 정말 고맙다. 이징옥이 없는 지금부터는 김종서의 전략을 따를 것이다. 내가 항상 강조하는 말처럼, 진짜 답은 현장에 있기 때문이다. 이 참에, 이유·이용·이구·이여 네 명의 아들에게 함경도 신도시를 한 곳씩 맡아서 국경을 지키는데 힘을 보태도록 했다. 둘째 이유(진양대군)에게는 경원을 맡겼고, 셋째 이용(안평대군)에게는 회령을, 넷째 이구(임영대군)에게는 경흥을, 다섯째 이여(광평대군)에게는 종성을 맡겼다.
어느덧 또 다시 겨울이 찾아왔고, 여진족의 침입도 현저히 줄었다. 마치 혼란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렸다는 듯, 함경도와 평안도 국경을 지키는 책임자인 김종서(56살)와 이천(63살) 두 장군이 한달 사이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나는 즉시 반려했다. 올해 내내, 영의정 황희(76살), 평안도 도관찰사 박안신(80살), 대사헌 안숭선(47살), 병조판서 정연(50살), 예문관 대체학 권제(52살), 병조참판 신인손(55살)이 차례로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모두 반려했다. 특히 지난 가을에 조말생(69살)이 병을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했을 때에는 한가한 직책이라도 맡아서 일하고 그만둘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했었다.
올해 초에는 2품 이상 고위급 신하는 나이가 70살이 넘고 병이 들어도, 병을 치료하면서 관직을 유지하라고 명령했었다. 그리고 나이든 신하의 출근시간을 아침 조회 이후로 늦췄었다. 미안하지만, 나이든 신하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정도 밖에 없다. 그리고 중추원사 이종선(71살), 우승지 권채(40살), 경상도 도절제사 하경복(62살), 좌참찬 조계생(76살), 전 좌의정 맹사성(79살), 경주부윤 우승범, 이조판서 홍여방이 하늘 나라로 갔다. 이들 중에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삶을 살았던 맹사성과 하경복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맹사성은 조선 건국 때부터 충직한 관리였고, 하경복은 나와 스무 살 차이가 나지만 편지를 주고받는 친구같은 신하였다.
하경복은 15년 동안이나 국경을 지키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쉬던 중에 또 경상도 군절제사를 맡아서 일했다. 그렇게 하경복은 일밖에 모르는 왕을 만나서 평생 동안 일만 하다가 죽었다. 무술에 능했던 그는 사람을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달래는 것을 우선했었다. 이처럼 공직에서는 한없이 너그러웠던 그였지만, 자신과 가족에게는 너무나 냉정한 사람이었다. 누구라도 이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하경복이 휴가를 받아서 집에 가보니, 자신의 집이 큰 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내가 급여를 알뜰하게 모아서 큰 집을 지어 놓은 것이다. 이를 본 하경복은 아내에게 칭찬은 고사하고 오히려 화를 내며 “나는 평생토록 초가집에 만족한다”라고 말하고, “당장 집을 철거하라”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사위와 아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겨우 말려서, 집을 헐지는 못했다고 한다.
맹사성은 죽는 날까지, 아랫사람이 집에 찾아와도 돌아갈 때까지 예의를 갖춰 공손하게 대했고, 자신의 이웃에 사는 선배 집을 지날 때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걸어서 지났던 사람이다. 이처럼 하경복은 다른 장군(武)들에게는 보기 힘든 덕(德)을 갖췄고, 맹사성은 관리가 갖춰야 하는 겸손함(예, 禮)이 몸에 베어 있었던 신하였다. 하경복은 나와 함께 청백하게 살았던 장군이었고, 맹사성은 할아버지(태조) 때부터 변함없이 청백하게 살아온 관리였다. 두 신하는 온갖 술수로 재산을 모으고 특권을 누리는 양반들이 판치는 세상에 청백한 관리의 상징같은 신하였다. 이 둘의 삶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었다. 그리고 지금, 하경복의 외아들 하한이 아버지를 이어서 함경도 국경을 지키는 장수로 성장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
[끝, 총 정리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