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실 풍경이 바뀌었습니다. 한번 관찰해 보십시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회의실 주인공은 리더였습니다.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마커를 쥐고 전략 방향을 그리고, "이렇게 하면 된다"고 지시하던 사람. 그게 우리가 합의했던 리더의 전형이었죠. 그때 권위는 압도적인 실무 능력에서 나왔습니다. 리더는 구성원보다 더 많이 알고, 더 빨리 처리하고, 더 정확한 답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이 구호가 아니라 실력에 기반한 팩트였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회의실 풍경이 기묘하게 역전되었습니다. 스크린에 입사 1년 차 사원이 AI로 뽑아낸 기획안이 떠 있습니다. 시장 분석, 경쟁사 동향, 예상 매출 시나리오까지. 30분 만에 만든 자료입니다. 그 방대한 정보량과 논리적 완결성 앞에서 리더는 침묵합니다.
"이 데이터, 확실한가?" 리더가 묻습니다. "AI가 분석한 결과라 오차 범위 내에 있을 겁니다." 구성원이 답합니다.
이 짧은 대화에 지금 리더십이 마주한 딜레마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리더는 이 기획안을 제대로 검증할 수 없습니다. AI가 결과를 도출한 과정, 알고리즘의 블랙박스를 들여다볼 수 없으니까요. 과거에는 리더가 정답을 알고 있어서 구성원의 결과물을 채점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구성원과 그의 AI가 내놓은 결과물이 정답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걸 결재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결재가 아닙니다. 내용은 모르지만 서명은 해주는, 방임에 더 가깝습니다.
최근 기업 현장에서 리더들의 번아웃과 의사결정 회피 현상이 급증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일이 많아서 지친 게 아닙니다. 자신의 유능함이 더 이상 조직에서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손발이 잘린 채 결재판이라는 무거운 짐만 어깨에 짊어진 꼴입니다.
단순히 AI라는 도구가 엑셀이나 파워포인트보다 성능이 좋아서일까요? 아닙니다. 문제의 본질은 더 깊은 곳, 경제학적 비용 구조의 변화에 있습니다.
토론토 대학교 아제이 아그라왈 교수는 저서 『예측 기계』에서 AI의 본질을 '예측 비용의 하락'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과거에는 미래를 예측하고 최적의 경로를 계산하는 게 매우 비싼 행위였습니다. 그 비싼 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 인간, 즉 고숙련 리더의 몸값이 높았던 이유죠.
AI가 이 실행과 예측의 비용을 0에 수렴하게 만들었습니다. 기획안을 쓰고, 코드를 짜고, 데이터를 분석하는 실행의 영역은 이제 누구나 할 수 있는 저렴한 범용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리더십의 근간이 흔들립니다. 전통적 리더십 모델에서 권위와 유능함은 한 몸이었습니다. "내가 일을 잘한다"는 사실이 곧 "내가 지시할 자격이 있다"는 명분이 되어주었죠. 실행하는 능력과 지시하는 권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결합 상품이었습니다.
AI가 실행을 전담하면서 이 결합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이 현상을 '대분리'라고 불렀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실행하는 주체와 책임지는 주체가 분리된 셈입니다.
AI는 실행합니다. 지칠 줄 모르고, 인간보다 빠르고 정교하게. 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습니다. 기계가 짠 전략이 실패해 수백억 원의 손실이 나도 AI를 처벌할 수는 없고, 시말서를 쓰게 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그 자리에 남는 건 인간 리더입니다. 실행의 성취감과 효능감은 AI가 가져갔고, 실패했을 때 감당해야 할 법적·도의적 책임만 오롯이 리더의 몫으로 남았습니다. 불공정한 거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흐름입니다.
지금 조직은 자동항법장치로 비행하는 여객기 같습니다. 비행기는 기가 막히게 잘 날아갑니다. 기류를 분석하고 항로를 수정하는 건 AI 시스템이 알아서 하니까요. 조종석에 앉은 기장은 계기판을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조종간을 잡을 필요도, 잡아서도 안 됩니다. 기계가 더 잘하니까요.
승객들은 불안합니다. 기장이 실제로 비행기를 통제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우니까요. 기장 자신도 불안합니다. 시스템이 오류를 일으키거나 예측하지 못한 난기류를 만났을 때 수동으로 조종간을 잡아 착륙시킬 수 있을지 확신이 없으니까요. 실무에서 손을 뗀 지 오래된 리더일수록 이 불안은 큽니다.
유능함이 사라진 자리를 보십시오. 리더는 더 이상 조직에서 가장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과거에는 실무자가 "부장님, 이것 좀 검토해주세요"라며 들고 오면 붉은 펜으로 수정해 주는 게 리더의 권위였습니다. 지금은 구성원이 챗GPT와 상의하는 편이 더 빠르고 정확합니다. 리더의 피드백은 '낡은 감'으로 취급되기 십상입니다.
책임만 남은 자리도 보십시오. 유능함은 사라졌는데 책임의 총량은 오히려 늘었습니다. AI가 생성한 결과물에는 환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저작권이나 윤리적 문제가 터질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리스크를 검증하고 최종적으로 "GO"를 외치는 건 여전히 인간의 몫입니다. 과정을 장악하지 못한 채 결과만 책임져야 하는 상황. 권력이 아니라 형벌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리더를 C-Level이라 부르며 우러러보았습니다. 하지만 대분리가 일어난 지금, 어쩌면 리더는 C-Level이 아니라 L-Level, 책임자로 불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빛나는 성과는 AI와 실무자의 몫이고, 어두운 책임은 리더의 몫인 시대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리더는 이제 실무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라며 엑셀 파일을 열고 직접 수식을 고쳐봤자, 1초 만에 코드를 짜는 AI 앞에서 초라한 퍼포먼스일 뿐입니다. 구성원들은 그런 모습을 보며 존경심이 아니라 안쓰러움을 느낄 겁니다.
허탈함, 무력감, 그리고 알 수 없는 분노. 이런 감정이 드는 건 당연합니다. 내가 무언가를 통제하고 있고 내 능력으로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감각이 인간을 지탱하는 힘인데, AI가 그걸 앗아갔으니까요.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 효능감의 상실이 맞습니다. 다만 이건 개인의 잘못이 아닙니다. 기술이 인간의 지적 노동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거대한 상실의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유능함이 권위였던 시대는 갔습니다. 나를 따르라며 깃발을 들던 영웅적 리더십도 끝났습니다.
남은 건 책임뿐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 책임의 무게를 견디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리더십이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아직은 해결책을 찾으려 하지 말고, 섣부른 희망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은 이 차가운 분리의 현상을 직시하고,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관찰할 때입니다.
결재판 위에 놓인 것은 서류가 아닙니다. AI가 던져놓은, 검증되지 않은 욕망의 덩어리들입니다.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서명을 하기 위해 리더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