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g)
요즘 AI를 쓰다 보면 종종 아이언맨이 된 기분이 듭니다.
평범한 인간이 갑옷을 ‘입는’ 순간, 능력이 배가되는 그 느낌. 버튼 몇 번만 누르면 문서가 만들어지고, 회의록이 정리되고, 보고서가 번듯한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예전 같으면 반나절 걸리던 일이 30분 안에 끝납니다. 심지어 말투도 그럴듯합니다. “전략적”, “정량적”, “인사이트 기반”. 나도 모르게 어깨가 올라갑니다.
그런데 그 갑옷이 진짜 나를 강하게 만드는 걸까요?
아니면 내가 스스로 움직일 근육을 점점 잃게 만드는 걸까요?
생성형 AI를 넘어 요즘은 나노바나나, NotebookLM 같은 도구들을 함께 쓰며 일하고 있습니다. 정보는 빨리 모이고, 구조화는 더 빨라졌고, “그럴듯한 결과물”이 나오는 속도는 확실히 전과 비교가 안 됩니다. 기획하는 데 고민하고 만드는 시간이 줄어든 건 체감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전의 자료가 더 좋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익숙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전의 자료에는 내 손으로 만든 문장, 내 방식으로 쌓아 올린 논리, 내 시행착오가 담긴 도표.
그건 ‘부족해도’ 내가 어디서 흔들렸고 어디서 단단해졌는지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반면 AI가 만들어준 자료는 대체로 화려합니다. 순간 보면 손 델 곳이 없이 완벽해 보입니다.
디자인도, 문장도, 구성도 “프로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심사숙고한 무언가가 없다고 느껴집니다.
정확히 말하면, ‘있어 보이는 근거’는 있는데 내가 밤새 붙잡고 씨름하며 얻었던 고민의 질감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주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이거… 내가 한 거 맞나?”
“이 결과물의 주인은 나인가, AI인가?”
어쩌면 AI의 편리함은 단순히 시간을 줄이는 게 아니라, ‘내가 고민했던 시간’ 자체를 대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분명 내가 AI를 “도구”로 썼습니다.
업무 속도를 올리고, 반복 작업을 줄이고, 보고서 퀄리티를 끌어올리는 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문득, 내가 나를 관찰하게 됩니다.
밥 먹을 때도 하던 생각을, 요즘은 덜 한다.
걸으면서 떠올리던 질문이, 예전만큼 오래 붙잡히지 않는다.
잠들기 직전까지 이어지던 ‘정리되지 않은 고민’이 줄었다.
왜일까요?
“AI한테 시키면 되지”라는 마음이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내 습관을 바꿔놓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나의 성장은 늘 “생각의 시간”에서 만들어졌었습니다.
답을 모르는 채로 붙들고 있는 시간,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여러 문장을 버리는 시간, 데이터의 의미를 곱씹으며 ‘왜’와 ‘그러면’을 반복하는 시간. 그 시간이 쌓여서 나라는 사람이 단단해졌습니다.
그런데 AI는 그 시간을 “선물처럼” 줄여주었습니다.
문제는 선물이 때로는 근육을 약하게 만드는 지름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교묘한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AI는 생각보다 나를 너무나 잘 압니다.
내가 좋아할 만한 답을, 내가 선호할 말투로, 내가 납득하기 쉬운 논리로 던져 줍니다. 그래서 결과물은 빠르게 ‘내 마음’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나는 덜 의심합니다.
그게 가장 위험한 유혹입니다. 의심이 줄어드는 순간, 사고는 위탁됩니다.
AI가 주는 답이 달콤할수록, 저는 일부러 질문을 바꿔보았습니다.
“왜 이렇게 답했지?”
“근거는 뭐지?”
“다른 관점에서는?”
“지금과 정반대 결론으로 다시 써봐.”
“내가 놓친 리스크를 찾는 역할을 해줘.”
AI를 쓰는 핵심은 ‘정답’을 얻는 게 아니라, 내가 더 잘 생각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쓰는 데 있다고 느낍니다.
제 사고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제 사고를 더 날카롭게 하는 쪽으로.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건 의지가 필요합니다.
AI가 이미 답을 줬는데 굳이 다시 묻는 건 귀찮은 일입니다.
시간도 더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을 일부러 만드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내 사고의 주도권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저는 요즘 AI와 함께 HR Analytics Dashboard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개발 항목을 구성하고, 세부 데이터를 정리하고, “이 데이터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은데 어떤 방식이 가장 가시적일까?” 같은 질문을 던져봅니다. AI는 글로도 정리해주고, 슬라이드 구조로도 잡아주고, 인포그래픽 아이디어까지 내놓습니다.
확실히 편리해졌습니다.
기존의 대시보드는 주로 현황을 보여주는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AI가 결합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다양한 데이터 간 상관관계를 찾아 “이상 징후”를 감지하고
퇴직 가능성을 예측하고
핵심인재 후보군을 추천하고
심지어 개인의 경력 데이터와 롤모델 프로필을 대조해 SWOT과 성장 계획(CDP)까지 제안합니다
여기서 제가 느낀 전율은 두 가지입니다.
“와, HR이 드디어 ‘예측’과 ‘제안’을 할 수 있겠구나.”
“근데… 이걸 믿어도 되나? 이걸 어떻게 검증하지?”
AI가 내놓는 추천은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HR이 다루는 것은 숫자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맥락, 관계, 감정, 환경, 그리고 ‘한 번의 사건’이 만든 균열(그리고 회복) 같은 것들입니다. 데이터는 그것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반영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AI가 능력을 증강시키는 순간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AI는 권한, 책임, 설명 가능성이라는 오래된 질문을 더 큰 목소리로 꺼내게 만들기도 합니다.
AI가 도입되면 우리가 기대하는 변화는 대체로 이것입니다.
반복 작업이 줄고
효율이 올라가고
근무 시간이 줄거나, 최소한 숨 쉴 틈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현실은 종종 반대로 갑니다.
줄어든 시간에 상사는 “다른 무언가”를 꽉꽉 채우길 원합니다.
그래서 AI 시대에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하게 되고, 피로도는 올라간다. 도구가 좋아졌는데 삶이 더 바빠지는 이상한 현상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조직은 거대한 관성 덩어리입니다.
AI 기술은 엄청난 속도로 진화하지만, 조직은 보안·리스크·비용·규정의 문제로 주춤거립니다. 투자 대비 효과를 숫자로 설명해야 하고, 그 숫자를 납득시키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한국의 노동시장 구조는 ‘사람을 쉽게 줄이는 방식’으로 생산성 혁신을 달성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런 모순 위에 서 있습니다.
“AI는 분명 강력한데 조직은 아직 AI를 담을 구조가 충분치 않고
개인은 AI로 빨라졌는데 개인의 시간은 오히려 더 빼앗깁니다.”
이 상태에서 “AI가 인간을 증강시키는가?”라는 질문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일과 조직의 재설계 문제로 바뀌게 됩니다.
AI가 실행(Execution)을 맡아갈수록, 인간의 가치는 정의(Definition)와 평가(Evaluation)로 이동한다고 많은 분들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지 정의하는 능력
그 결과가 제대로 되었는지 판단하는 능력
그리고 그 판단에 책임지는 용기
문제는 이 전환이 너무 빠르다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가치 있던 기술이 오늘은 기본 옵션이 되고, 어제까지 강점이던 노하우가 오늘은 “AI가 해주는 것”이 됩니다. 개인도 조직도 이 속도를 따라가기 버겁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단순히 “일자리가 사라질까?”가 아니라, 더 미묘한 형태로 옵니다.
“나는 무엇을 잘하는 사람이었지?”
“내 전문성은 어디에서 증명되지?”
“AI가 대신하는 순간, 나는 어떤 사람으로 남지?”
AI를 켜고, 결과물을 받고, 보고서를 만들고, 대시보드를 설계하면서도
저는 점점 더 자주 제게 이런 질문을 던져봅니다. 여러분도 한번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세요.
오늘 AI가 줄여준 시간만큼, 나는 ‘생각’을 어디에 썼나?
AI가 만든 문장 중 무엇이 “내 언어”가 되었고, 무엇이 “AI의 언어”로 남았나?
AI가 준 결론을 ‘검증’했나, 아니면 의심없이 ‘채택’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