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저는 시골 마을에 살았습니다.
고등학교가 있는 시내로 나가려면 새벽 버스를 타야 했습니다. 지금처럼 버스의 위치와 도착 시간을 알려주는 시스템은 없었습니다. 버스를 놓치거나 정해진 시간이 아닌 때에 정류장에 도착하면 무작정 기다려야 했습니다. 40분에서 한 시간 가까이 길에서 보내는 날도 있었습니다. 버스가 언제 올지 알 수 없으니 기다림을 줄일 방법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전혀 다릅니다. 버스와 지하철이 어디쯤 와 있는지, 내가 있는 정류장에 몇 분 후 도착하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 위치와 목적지를 입력하면 어떤 버스와 지하철을 타야 하는지, 어디에서 환승하고 어느 출구로 나가야 하는지까지 안내받습니다.
자동차로 이동할 때도 무료 경로와 유료 경로, 빠른 경로와 우회 경로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교통 상황에 따라 도착 예정 시각이 달라지고, 길이 막히거나 사고가 발생하면 새로운 경로가 제안됩니다.
얼마 전 청주에서 수지까지 대중교통으로 이동할 일이 있었습니다. 운전을 즐기지 않는 저는 지도 앱에 현재 위치와 목적지만 입력했습니다. 그러자 복잡한 버스와 지하철 노선이 순식간에 연결되고, 환승 횟수와 이동시간이 다른 여러 경로가 나타났습니다. 그 순간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도대체 어떤 원리로 이렇게 복잡한 길 가운데 최적의 경로를 찾아내는 것일까?
그리고 곧 다른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지도 앱이 전국의 모든 길을 사람처럼 외운 뒤 직감적으로 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길찾기의 출발점은 현실 세계를 수학적인 구조로 바꾸는 것이라고 합니다.
정류장과 역, 교차로는 점이 되고, 그 점들을 연결하는 도로와 노선은 선이 됩니다. 각각의 선에는 이동시간과 거리, 요금과 환승 횟수 같은 비용이 부여됩니다. 길찾기 알고리즘은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연결되는 수많은 경우의 수 가운데 사용자가 원하는 조건에 가장 적합한 경로를 찾습니다.
여기에 시간표와 차량 위치, 교통 상황과 지연 정보가 실시간으로 반영됩니다. 처음 안내한 길이 막히면 경로를 다시 계산하고, 버스가 늦어지면 도착 예정 시각도 바뀝니다.
따라서 길찾기의 정확도를 결정하는 것은 알고리즘 하나가 아닙니다.
정확한 지도와 노선, 시간표와 실시간 위치, 그리고 무엇을 좋은 경로로 판단할 것인지에 관한 기준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데이터가 잘못되어 있거나 길과 길의 연결 관계가 끊어져 있다면 아무리 뛰어난 알고리즘도 좋은 경로를 추천할 수 없습니다.
이 원리는 CDP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길찾기에서 현재 위치와 목적지만 입력해도 되는 이유는 그사이에 존재하는 길과 교통수단, 이동시간과 비용이 이미 정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CDP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성원에게 현재 직무와 희망 직무만 입력하게 한 뒤 좋은 경로를 추천하려면, 조직이 먼저 경력의 지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지도 위의 점은 현재 직무와 다음 직무, 프로젝트 역할, 전문직과 관리직 트랙, 리더와 핵심 포지션이 됩니다. 그 점들을 연결하는 선은 직무 이동과 발령, 프로젝트 참여, 교육과 자격 취득, 멘토링과 코칭, 현장과 해외 경험, 리더 경험이 됩니다.
각각의 경로에는 서로 다른 비용도 붙습니다. 목표 직무까지의 역량 차이, 학습에 필요한 시간, 전환의 난이도, 새로운 역할에 진입할 가능성, 예상되는 기회와 위험을 계산해야 합니다. 여기에 가족과 건강, 지역 이동과 경제적 조건,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노력의 수준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길찾기에서는 가장 짧은 길이 유일한 정답이 아닙니다. 요금을 아끼는 길과 환승이 적은 길, 걷는 거리가 짧은 길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커리어도 그렇습니다.
가장 빨리 승진하는 경로가 누군가에게는 최적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전문성을 깊게 쌓는 길이 더 적합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길은 많은 학습을 요구하지만 더 큰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습니다. 현재 역량을 활용하는 길은 현실적이지만 성장의 폭은 제한적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우리 회사 구성원들이 어떤 발령과 교육, 직무 경험을 거쳐 성장하고 승진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조직 내부 데이터만으로는 경로가 제한될 수 있다고 생각해, 외부에서 롤모델로 삼고 싶은 사람들의 프로필과 인터뷰, 경력의 전환점도 함께 정리했습니다.
자신의 현재와 꿈을 입력하면 조직 내부의 성장 사례와 외부 롤모델의 경로를 참고해 앞으로의 CDP를 제안하는 AI를 구상한 것입니다.
이 접근은 실제로 누군가가 걸어간 길을 활용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발령이나 승진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학습과 프로젝트, 경력 경험을 함께 연결할 수 있습니다. 외부 롤모델을 통해 조직 안에서는 보이지 않던 더 넓은 가능성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경계해야 할 점도 있습니다.
과거의 성공 경로가 미래의 정답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과거에 특정 부서와 직무를 거친 사람이 임원이 되었다고 해서 앞으로도 같은 경로가 유효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조직의 전략이 달라지고 기술의 가치가 변하면 미래에 필요한 역할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과거 데이터에는 조직의 관행과 편향까지 들어 있습니다. 누가 더 많은 기회를 받았는지, 어떤 직무와 학력이 승진에 유리했는지가 데이터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AI가 과거의 이동과 승진 패턴만 학습하면 기존의 인사 관행을 가장 안전한 경로로 추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CDP는 사람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도구가 아니라, 과거의 성공 공식을 반복하는 장치가 됩니다.
따라서 조직 내부의 이력은 과거에 가능했던 경로를 보여주는 데이터로 사용해야 합니다. 앞으로 반드시 따라야 할 정답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외부 롤모델의 경력 역시 복제해야 할 노선이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을 넓혀보는 참고 지도로 활용해야 합니다. “이 사람처럼 되려면 같은 길을 따라가십시오”라고 말하기보다, 그 사람의 경력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역량과 결정적인 전환점이 무엇이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 경험 가운데 나의 경력과 연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나에게 부족한 조건과 자원은 무엇인지 질문해야 합니다. 같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다른 경로도 찾아야 합니다.
롤모델의 인생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롤모델의 선택에서 이동의 원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력은 지도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같은 직무와 비슷한 경력을 가진 사람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다릅니다. 누군가는 빠른 승진을 원하고, 누군가는 전문성이나 일의 의미를 중시합니다. 누군가는 새로운 도전을 즐기지만, 다른 누군가는 가족과 건강, 경제적 안정 때문에 위험을 줄여야 합니다.
그래서 맞춤형 CDP를 추천하려면 네 가지 정보가 필요합니다.
먼저 현재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현재의 직무와 역할, 주요 프로젝트와 성과, 보유 역량과 자격, 학습과 발령 이력, 강점과 업무 선호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다음으로 희망 목적지가 필요합니다. 원하는 직무와 전문 분야, 리더와 전문가 가운데 선호하는 트랙, 기대하는 영향력과 일의 의미, 목표 시점을 알아야 합니다.
이동 조건도 확인해야 합니다. 학습에 사용할 수 있는 시간, 직무와 지역 이동의 가능성, 가족과 건강, 경제적 조건, 감당할 수 있는 위험 수준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경로 정보가 필요합니다. 직무별 요구 역량과 직무 사이의 인접성, 실제 이동 사례, 프로젝트와 교육 기회, 미래에 성장할 역할과 감소할 과업이 정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정보가 함께 있어야 AI가 단순히 “부족한 역량을 채우기 위해 교육을 들으십시오”라고 말하는 수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커리어 길찾기의 목표는 가장 좋은 길을 대신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AI는 현재 역량과 가장 가까워 비교적 적은 준비로 이동할 수 있는 현실 경로를 제안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학습과 프로젝트 경험이 필요하지만 역량과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는 성장 경로도 보여줄 수 있습니다.
현재 경력과는 거리가 있지만 자신이 강하게 원하는 목적지로 향하는 도전 경로도 필요합니다. 가족과 건강, 안정성을 함께 고려한 균형 경로도 있어야 합니다. 목표가 아직 분명하지 않다면 짧은 프로젝트와 직무 체험, 멘토링으로 적합성을 확인하는 탐색 경로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AI가 “이 길로 가십시오”라고 명령하지 않는 것입니다.
AI는 이렇게 설명해야 합니다.
“이 길은 빠르지만 많은 학습이 필요합니다.”
“이 길은 현실적이지만 성장의 폭이 제한적일 수 있습니다.”
“이 길은 불확실성이 크지만 당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야 구성원이 경로별 비용과 가능성을 비교하고 자신의 삶에 맞는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의 가장 유용한 기능은 처음 제시한 경로가 항상 옳다고 고집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길을 잘못 들거나 교통 상황이 바뀌면 새로운 길을 계산합니다. CDP도 한 번 작성하고 보관하는 계획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을 하면서 몰랐던 강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희망했던 직무가 실제로는 자신과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조직개편으로 새로운 역할이 생기거나 기존 역할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가족과 건강, 삶의 우선순위도 달라집니다.
따라서 CDP는 현재 역량과 성과, 학습 결과와 직무 경험을 반영해 정기적으로 다시 계산되어야 합니다.
계획을 바꿨다고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길을 바꾸는 것은 목적지를 포기했다는 뜻이 아니라, 더 적합한 목적지나 지속 가능한 이동 방식을 발견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길찾기 앱은 최적의 경로를 추천하지만 제가 그 길을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려도 익숙한 길을 선택할 수 있고, 통행료를 아끼기 위해 무료 도로로 갈 수도 있습니다. 경치가 좋은 길을 일부러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지도는 이동시간을 계산하지만, 제가 어떤 여행을 원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CDP도 그렇습니다.
AI는 유사한 경력과 필요한 역량, 가능한 직무와 학습경로를 분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의미 있게 느끼는지, 무엇을 포기할 수 없는지,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당할 수 있는지까지 대신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경력에는 효율로 계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성취감이 있고 관계가 있습니다. 가족과 건강이 있으며 일의 의미와 존엄이 있습니다. 늦게 도착하더라도 꼭 경험하고 싶은 과정도 있습니다.
따라서 AI CDP의 마지막 화면에는 하나의 정답 대신 질문이 남아야 합니다.
- 이 경로는 내가 원하는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 필요한 노력과 비용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 이 목적지는 정말 내가 선택한 것입니까?
- 조직의 기대가 사라져도 이 길을 가고 싶습니까?
- 지금 출발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행동은 무엇입니까?
어린 시절의 저는 버스가 언제 올지 몰라 길에서 오래 기다렸습니다. 지금은 도착 시각을 미리 알고 움직입니다. 기술은 불필요한 기다림을 줄였고 이동의 선택권을 넓혀주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기다림이 낭비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빠르고 정확한 안내에 익숙해지면서 목적지를 스스로 고민하는 시간을 잃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장 빠른 길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믿고, 느린 사람을 신중한 사람이 아니라 능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판단하기도 합니다.
커리어에서도 가장 빠른 길이 반드시 가장 좋은 길은 아닙니다.
어떤 길에서는 잠시 멈추어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어떤 우회로에서는 정해진 승진경로에서 얻을 수 없었던 경험을 만납니다. 목적지에 조금 늦게 도착했지만 더 단단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AI 기반 CDP는 구성원을 가장 빠르게 이동시키는 시스템이어서는 안 됩니다.
구성원이 자신의 목적지를 더 잘 이해하고, 선택 가능한 경로를 비교하며, 스스로 결정하도록 돕는 시스템이어야 합니다.
현재 위치와 목적지를 입력하면 AI는 여러 경로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지를 정하는 사람도, 경로를 선택하는 사람도, 때로는 멈추거나 다른 길로 돌아설 사람도 결국 자기 자신입니다.
AI는 가장 빠른 길과 가장 현실적인 길, 더 많은 성장과 도전이 필요한 길을 안내할 수 있습니다. 다른 목적지로 이어지는 길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선택만큼은 사람에게 남겨두어야 합니다.
좋은 CDP는 사람을 조직이 정한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시키는 계획이 아닙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고, 어디로 가고 싶은지 질문하며, 여러 가능성 가운데 자신의 길을 선택하게 하는 과정입니다.
길을 알려주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HR은 한 가지를 더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성원에게 좋은 경로를 추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조직이 원하는 목적지를 좋은 경로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AI CDP의 진정한 가치는 경로의 정확도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돌려주고, 자기 삶을 스스로 운전할 힘을 길러주는가에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