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한 분의 프로젝트 품의서 작성을 도울 기회가 있었다. 프로젝트 실행을 위해 정식 결재를 올려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정작 작성자인 그 분은 품의서 작성이 처음인 상황이었다.
그동안 써본 품의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품의서는 정해진 양식(Template)에 필요한 정보를 입력하는 빈칸 채우기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적합한 양식이 없었기에, 백지 위에 스스로 글의 구조를 짜고 내용을 채워 넣어야 했다.
컴퓨터 앞에서 머뭇거리던 그 분은 내게 다가와 이렇게 물었다.
"저도 오피셜(Official)한 문서를 작성해보고 싶어요."
내가 작성한 문서를 보면서 도움을 받고 싶었다고 한다. 나는 그와 함께 목차부터 차근차근 잡아나갔다. 목적과 배경, 선택한 솔루션, 구체적인 실행 계획과 필요 예산, 기대 효과까지 의사결정에 필요한 뼈대를 세웠다. 그리고, 개조식 표현과 명사형 종결 어미를 활용하고, 문장도 간결하고 명확하게 다듬었다.
품의서를 최종 완성한 주니어 사원의 얼굴에서 보람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리고, ‘덕분에 저도 좋은 문서를 완성해볼 수 있었습니다’라는 감사 인사가 돌아왔다.
현장에서 팀원들의 문서 작성 수준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흔히 개인의 역량 부족을 탓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개인이 게으르거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환경의 변화로 인해 그들이 공식적으로 문서를 써볼 기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최근의 기업 환경에서는 빠른 실행이 최우선 가치로 여겨지고 있다. 메신저나 디지털 협업 툴을 활용한 실시간 소통과 의사결정이 저변에 확산되어 있기도 하다. 속도가 생명이다 보니 메신저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자리를 잡았고, 문서에서 구어체를 사용한 표현도 일상이 되었다. 이는 매우 효율적인 상황이다.
하지만, 반대 작용도 발생하고 있다.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구조화하여 완결된 문서로 풀어낼 경험 자산을 쌓을 기회가 부족한 상황이다. 교육 및 학습 환경도 녹록치 않다. 대기업은 신입사원 교육을 통해 최소한의 문서 작성 교육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스타트업이나 고속 성장하는 조직일수록 이러한 교육 및 학습 환경을 제공하기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디지털과 실시간 기반의 협업 툴이 소통의 속도를 그 어느 때보다 높여주었다. 하지만, 비즈니스 현장에는 메신저 창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순간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경영진의 최종 결재를 구하는 공식 보고, 전사 공유를 위한 문서 작성, 대외 기관이나 파트너사와의 협업 및 제안을 위한 문서 등은 여전히 완결된 형태의 '비즈니스 문서'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문서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조직의 리스크를 줄이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이끄는 핵심 도구다. 또한 조직과 개인의 역량 수준을 대변하는 척도로 비춰지기도 한다.
이 중요성을 비추어 볼 때, 과연 우리의 역량은 어느 수준인지 점검히 필요한 시점이다. 빠른 소통에 익숙해진 우리들이 문서 작성의 순간마다 모니터 앞에서 주저하는 이유도, 결국 구조화된 문서 작성의 경험과 역량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피셜하고 정돈된 비즈니스 문서를 만드는 기본기란 무엇일까? 핵심은 두 가지다. '논리의 구조화'와 '표현의 간결성'이다.
논리의 구조화는 읽는 사람이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생각의 뼈대를 세우는 작업이다.
목적 : 이 일을 왜 해야 하는가?
상황 : 어떤 문제나 배경이 있는가?
솔루션 : 우리가 제안하는 구체적인 대안은 무엇인가?
실행 계획 : 언제, 어떻게, 얼마를 들여 추진할 것인가?
기대효과 : 이를 통해 조직이 얻는 가치는 무엇인가?
표현의 간결성은 가독성을 높이는 작업이다.
주절주절 이어지는 구어체나 대화체 문장을 버리고, 개조식 표현과 명사식 표현, 명사형 종결어미를 적용해 빠른 읽기와 이해를 극대화한다. 이는 글을 보기 좋게 만드는 형식을 넘어, 작성자가 구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 명료하게 규정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구성원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문장 교정이나 비판이 아니다. 문서 작성을 단순한 서류 작업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다듬는 지적 훈련으로 인식하게 하고, 백지 위에서 직접 글을 써볼 수 있는 학습 환경과 실전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물론 나에게 있어서도 문서작성과 글쓰기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나는 신입사원 시절 한 장의 품의서를 15번을 퇴짜 맞으면서 보고했던, 아주 혹독한 기억이 있다. 생각해보면 당시 팀장님도 대단한 분이셨다. 그 분의 인내심도, 혹독한 훈련도 대단했다는 감회를 느낀다. 내가 비즈니스 세계에서 문서를 처음 경험했던 매우 강력한 기억이다. 대학 시절 수십장 짜리 레포트를 써본 경험이 있다 한들 기업의 한 장 짜리 문서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그 만큼 어려웠고, 사실 문서 작성은 지금도 어렵다.
기획서 작성에 관한 책을 읽고 지속적으로 써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유명 작가들의 글쓰기 영상도 학습 자원이 될 것이다. 참고로, 교보문고 유튜브 채널의 ‘써드림 첨삭소’도 리더와 팀원들에게 추천해본다.
‘에이, AI가 다 써주는 데 글쓰기 연습이라뇨. 그 시간에 다른 것을 하는 게 낫죠.’
지금은 생성형 AI가 몇 초 만에 기획서와 보고서를 만들어주는 시대다. 반면, 스스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개인이 직접 글을 써볼 기회는 물론이고, 리더가 구성원의 글쓰기를 코칭할 수 있는 역량마저 쇠퇴할 위험에 처해 있다.
아무리 AI가 뛰어난 문서를 만들어낸다 할지라도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그 보고서에는 결국 AI가 아닌 작성자 본인의 이름이 달린다는 점이다. 네이게이션이 알려준대로 운전했는데 속도위반 딱지가 날라왔다고 경찰청에서 면죄부를 주던가. 아니다, 결국 운전한 나의 책임이다. 문서도 마찬가지다. 문서의 수준이 곧 자신의 전문성과 브랜드, 그리고 일에 대한 태도를 대변한다.
AI를 유능한 비서로 활용하더라도, AI가 출력한 문서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맥락과 목적에 맞게 검증할 수 있는 기본기와 안목이 없으면 도구에 휘둘리는 주객전도가 발생한다.
우리는 내가 만든 문서에 나의 이름을 걸 자신이 있는가?
이러한 환경에서 조직과 개인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리더와 구성원들께 당부와 조언을 남겨보고자 한다.
시간을 견디는 용기
급할 것이다. 기다리는 인내가 사치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투자하자. 팀원들에게 목차부터 스스로 고민해 볼 수 있는 백지 과제의 기회를 부여해 보자. 스스로 고민하고 수정해서 본인만의 문서를 만들었다는 성취감을 부여해야 한다.
구조화 중심의 디테일한 피드백
문장 고치기에 그치지 않고, 문서의 목적에 맞게끔 5W1H, 5W2H 등으로 구성되는 논리의 뼈대를 함께 고민해 주는 코칭을 제공해야 한다. 물론 코칭할 역량을 스스로 갖추는 것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수준 높은 문서의 자산화
잘 작성된 문서와 기획서를 조직 내에 공유하여 구성원들이 참조할 수 있는 레퍼런스로 제시해 보자. 레퍼런스를 학습하고 생각과 경험을 더하는 순간, 성장과 성과로 이어지는 루프를 경험할 것이다
완결된 사고의 습관
자신의 생각을 구조화해 보는 연습을 지속해야 한다. 전하려는 핵심 메시지를 구조화하고 핵심적으로 정리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검수자로서의 비판적 안목 갖추기
AI가 작성한 글을 초안일 뿐이다. 결코 그대로 복사해 올리지 않고, 문서의 맥락과 목적에 부합하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문서에 대한 책임감
내가 작성하는 문서에는 내 이름이 들어간다. 그 문서는 나의 전문성을 입증하는 신뢰의 자산이라는 책임감과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한 페이지의 문서에도 나의 혼과 실력이 담겨야 한다.
디지털 협업 툴과 AI라는 첨단 도구가 우리를 아무리 편하게 만들어줄지라도, 도구를 다루는 주도적 존재로서의 본질적 역량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AI 시대에 진짜 실력은 문장을 대신 써주는 도구를 쓰는 능력에 있지 않다. AI의 결과물이 내가 의도한 바와 맞는지, 경영진을 설득할 만큼 깊이와 구조를 갖추었는지 판단할 수 있는 작성자의 역량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백지 위에서 자신의 생각을 구조화할 줄 아는 '비즈니스 글쓰기 역량'은 생성형 AI 시대에 역설적으로 차별화된 전문성이 된다. 백지의 두려움을 깨고 자신이 작성한 문서에 대해 성취감을 갖는 것, 그것이 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리더와 구성원이 함께 누릴 수 있는 값진 성장의 기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