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가장 인상 깊은 광고 중 하나가 <트립닷컴> 광고입니다.
AI를 통해 누구나 세계 어디든 화면으로 미리 경험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검색만 하면 파리의 에펠탑도, 스위스의 알프스도, 이탈리아의 골목길도 눈앞에 펼쳐집니다. 심지어 AI는 여행 계획까지 대신 세워주고, 맛집과 숙소, 이동 경로까지 친절하게 추천해줍니다. 하지만 트립닷컴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선명한 사진을 보고, 정교한 영상을 보고, AI가 완벽한 여행 계획을 만들어준다고 해도 여행의 본질은 대신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 가본 낯선 곳에서의 설레임. 예상치 못한 최고의 광경을 만나는 순간.
추천 없이 우연히 들어간 식당이 인생 맛집이 되는 순간. 낯선 사람과 우연한 만남속에서 진심을 나누는 순간.
그 모든 것은 직접 떠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경험입니다. 편안한 큐레이션에 익숙해지면 진정으로 즐겁고 놀라운 것을 우연히 발견할 기회가 없어집니다. 예상치 못했던 것을 발견하고 감탄할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풍향중을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저 뿐 아니라 요즘같이 숏츠가 대세인 시대에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장시간 프로그램 중 하나입니다.
풍향고의 스핀오프인 이 프로그램은 내비게이션 앱도 쓰지 않고, 고속도로도 이용하지 않은 채 국도를 따라 여행합니다. 식당도 미리 검색하지 않습니다. 숙소도 예약하지 않습니다. 계획표도 없습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굉장히 비효율적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사람들은 그 비효율에 열광합니다.
길을 잃고, 갈팡질팡하고, 잘못 들어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성당 풍경에 감탄하고, 웨이팅이 긴 군산 3대 짬뽕을 피해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현지 최고 맛집으로 평가받는 음식을 맛본 평생 기억에 남을 한 끼를 만나는 모습에 우리는 웃고 또 부러워합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효율이 반드시 최고의 기쁨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2026년 하버드대학교 졸업식에서 총장인 앨런 가버(Alan Garber)는 AI 시대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1903년 프랑스 알프스 관광용 열기구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10분 만에 몽블랑의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습니다. 등산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춥고 위험한 산길을 오를 필요도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AI와 매우 닮아 있습니다. 몇 달 동안 공부해야 얻을 수 있었던 지식을 몇 초 만에 요약해 줍니다.
며칠 걸릴 보고서를 몇 분 만에 작성해 줍니다. 분석도 해주고, 코드도 만들어주고, 이미지도 생성해 줍니다.
가버 총장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AI가 정상의 풍경을 보여줄 수 있다면, 인간은 왜 힘들게 산을 올라야 하는가?"
그리고 그의 답은 명확했습니다.
그 이유는 정상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인간은 길을 잃습니다.
실수합니다.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다시 도전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깨닫습니다.
성장은 정답을 얻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씨름하는 과정에서 일어납니다.
요즘 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밤새 자료를 찾고, 엑셀 수식을 검증하고, 100장의 보고서를 읽고 정리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AI가 몇 분이면 뚝딱 보고 자료를 만들어 냅니다.
어쩌면 결과물의 품질도 크게 차이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 불안해집니다.
AI가 대신 써준 보고서는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가 대신 만들어 준 사고력은 가질 수 없습니다.
AI가 대신 써준 분석 결과는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가 대신 형성한 통찰은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상의 풍경은 봤는데, 산은 올라본 적이 없는 사람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풍경은 기억하지만 길은 모릅니다. 답은 알지만 원리는 모릅니다. 결과는 있지만 자신감은 없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선물이 결핍이라는 말에 1000000000% 공감하게 됩니다.
배고픔을 알아야 음식의 소중함을 압니다. 실패를 알아야 성공의 의미를 압니다.
어려움을 경험해야 타인의 고통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점점 결핍 없는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불편함을 제거하고, 기다림을 제거하고, 실패를 제거하고, 심지어 노력까지 제거하려 합니다.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신입사원들은 이전 세대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주5일제, 유연근무제, 재택근무, 복지 확대.
모두 필요한 변화입니다. 문제는 편안함 그 자체가 아닙니다. 편안함만 남고 성장의 긴장이 사라질 때 발생합니다. 성장을 위해 필요한 어려움마저 모두 제거하려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우연히 레전드 선수들의 야구 관련 유튜브를 봤는데 레전드 선수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학생들의 연습량이 줄었다."
배트를 잘 돌리고 싶으면 결국 수천 번 휘둘러야 합니다.
발표를 잘하고 싶다면 100번은 연습해야 합니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수백 편을 써야 합니다.
AI가 초안을 대신 작성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실력을 대신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사실 세상에는 불편하지만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습니다.
훌륭한 발표도, 훌륭한 보고서도, 훌륭한 리더십도,
결국 충분한 양의 시행착오가 축적된 결과입니다.
많이 생각해 본 사람이 깊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많이 실패해 본 사람이 좋은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많이 부딪혀 본 사람이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AI 시대의 HR은 더 이상 단순히 효율을 설계하는 부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효율은 이미 AI가 잘합니다. 오히려 HR은 구성원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성장의 터널"을 설계해야 합니다.
하버드 총장이 말했듯이 대학의 역할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직접 씨름해야 할 문제를 설계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업무를 쉽게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이 성장하는 구간은 대개 어렵습니다.
신규 프로젝트, 현장 경험, 고객 컴플레인 대응, 리더 역할 부여.
불편하지만 성장하는 경험을 의도적으로 제공해야 합니다.
AI가 결과물의 품질을 평준화하는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차별화는 사고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어떤 실패를 했는가. 어떻게 극복했는가. 무엇을 배웠는가.
이 과정이 인사평가의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합니다.
가버 총장은 또 하나의 답으로 "공동체"를 이야기했습니다.
AI는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함께 도전할 동료를 만들어 주지는 못합니다.
조직은 알고리즘이 추천하지 못하는 사람과 또 새로운 관점을 만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직무와 경험이 다른 사람들과 의논하고 협력하며, 혼자서는 풀 수 없는 문제에 함께 도전하도록 해야 합니다.
조직의 힘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나옵니다.
풍향중이 재미있는 이유는 여행 프로그램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기쁨은 목적지가 아니라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내비게이션이 없는 길. 실패할 수도 있는 도전. 우연히 만난 사람. 예상하지 못한 풍경.
그 모든 것이 성장이고 삶입니다.
AI는 앞으로도 점점 더 많은 정상의 풍경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러나 풍경을 보는 것과 산을 오르는 것은 다릅니다.
그리고 인간은 여전히 산을 오르는 존재입니다.
AI 시대 HR의 역할도 분명합니다.
모든 어려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어려움은 남겨두는 것.
모든 길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찾을 기회를 만드는 것.
모든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좋은 질문과 좋은 동료를 만나게 하는 것.
효율은 기술이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취의 맛은 여전히 사람이 직접 씹어야만 느낄 수 있습니다.
AI가 모든 것을 대신해 줄 수 있는 시대일수록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직접 경험할 것인가'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저의 답은 분명합니다.
Trip이 진짜여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