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HRer 로서 읽는 보고서마다 결론이 똑같습니다. 가트너도, 딜로이트도 AI가 바꾸는 미래를 몇십 쪽에 걸쳐 설명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을 넘기면 결론은 늘 하나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조금 의심했습니다. 기술에 자리를 내주고 싶지 않은 인간의 마지막 발버둥은 아닐까. 아니면 사람을 상대로 컨설팅하는 기관들이 "그래도 인간 편은 인간"이라고 듣기 좋게 마무리하는 수사는 아닐까.
그 의심을 품고 딜로이트가 글로벌반도체연합(GSA)과 함께 낸 『Semiconductor talent transformation study: Chips, choices, and the AI rush』 를 펼쳤습니다. 2025년 여름, 전 세계 반도체 기업의 고위 리더들을 조사한 보고서입니다. 제가 일하는 반도체 산업 이야기라 더 꼼꼼히 읽었습니다.
이 보고서가 말하는 '사람'은 단순한위로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AI 성과를 가로막는 실제 병목이 사람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보고서는 먼저 AI가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지 보여 줍니다.
반도체 산업은 수십 년 동안 더 작은 공정, 더 큰 웨이퍼, 더 높은 수율 같은 물리의 힘으로 성능을 올려 왔습니다. 이제는 그 동력이 '지능'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조사에 응한 리더의 93%가 AI에 투자하는 첫 번째 이유로 효율을 꼽았습니다. 비용 절감과 의사결정 개선이 각각 41%로 뒤를 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숫자는 따로 있습니다. '사람의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를 주된 이유로 꼽은 리더는 다섯 명 중 한 명(20%)뿐이었습니다.
보고서는 AI 혼자서는 당분간 칩 하나를 온전히 설계하지 못한다는 분석을 인용합니다. 대신 도메인 전문성과 결합할 때 AI가 성과를 몇 배로 키우는 '포스 멀티플라이어'가 된다고 말합니다. AI가 사람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전문성을 증폭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AI는 조직문화를 어떻게 바꾸고 있을까요? 리더들이 꼽은 가장 큰 긍정적 변화는 빠른 의사결정(36%)이었습니다. 혁신 증가(32%), 더 민첩한 업무 흐름(30%), 직원 권한 강화(23%), 부서 간 협업(20%)이 뒤를 이었습니다. 보고서의 표현을 빌리면, AI는 "다음 회의를 기다리는" 문화를 "다음 신호에 바로 움직이는" 문화로 바꾸고 있습니다. 모두가 같은 실시간 데이터를 보면 부서 간 영역 다툼도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AI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맞습니다. 그런데 보고서는 이 대목에서 방향을 틉니다.
AI 확산을 늦추는 가장 큰 걸림돌로 리더들은 두 가지를 꼽았습니다.
첫째는 보안(54%)입니다. 공정 레시피와 설계 IP가 곧 회사의 생명인 반도체 산업에서는 당연한 걱정입니다. 둘째는 역량 격차와 업스킬링(50%)입니다. 하나는 기술의 문제이고 하나는 사람의 문제인데, 보고서는 둘 다 결정적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데이터 과학자와 엔지니어, 리더는 교육을 받고 있지만 현장 인력은 아직 그만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제 생각이 가장 오래 머무르게 했던 대목은 바로 이 곳이었습니다. AI 도입의 부정적 영향으로 리더들은 고용 불안(38%)과 변화에 대한 저항(36%)을 꼽았습니다. 명확한 AI 전략이 없다는 응답도 30%였습니다.
보고서가 인용한 연구는 이 불안을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대체될 것이라는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더 이상 쓸모없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두 불안 모두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거나 회사의 전략이 불분명할 때 더 커진다고 말합니다.
이 문장을 읽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AI를 망설이는 이유는 AI가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그 안에서 자신이 어디에 서야 하는지 아무도 말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AI를 쓰세요"라는 말은 넘치는데, "AI가 들어온 뒤 당신의 일은 이렇게 바뀝니다"라고 말해 주는 조직은 드뭅니다.
그래서 보고서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이 나옵니다. AI가 새로운 효율의 엔진이라면, 사람은 여전히 그 힘을 전달하는 변속기라는 것입니다. 엔진이 아무리 좋아도 변속기가 맞물리지 않으면 차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숫자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AI 전환에 대비해 업스킬링 프로그램에 투자하는 기업(46%)이 첨단 도구와 인프라에 투자하는 기업(34%)보다 많았습니다. 혁신을 곧 설비투자로 여겨 온 반도체 산업에서 우선순위가 바뀐 것입니다. 인텔, 삼성, AMD 같은 기업도 대규모 재교육과 인재개발 체계를 경쟁력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보고서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재교육은 HR 부서의 프로젝트에서 기업 운영 전략의 토대로 옮겨 갔고, AI의 승자는 학습을 인프라로 다루는 기업이 될 것이라고요.
마지막 장은 AI에서 공급망으로 시야를 넓힙니다. 지정학 때문에 모두가 "우리 땅에서 만든 칩"을 원합니다. 하지만 현지화를 완료했거나 큰 진척을 이룬 기업은 9%에 불과했고, 50%는 아직 논의 단계이거나 현지화를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결국 다시 사람입니다. 계획된 생산능력을 유지하려면 2030년까지 전 세계 반도체 산업에 100만 명 이상의 숙련 인력이 더 필요합니다. 막대한 투자에도 인력 공백 때문에 일정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보고서는 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자본만으로는 역량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섯 개의 장을 다 읽고 나서 처음의 의심에 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람'이라는 결론은 인간의 마지막 발버둥이 아니었습니다. 병목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 주는 강력한 알람이었습니다. 기술은 이미 충분히 빠릅니다. 그 속도를 성과로 바꾸지 못하는 곳에 사람이 있습니다. 역량이 따라오지 못하는 현장, 자기 자리를 몰라 망설이는 구성원, 설비는 지었는데 사람이 없어 멈춘 공장이 그렇습니다. 사람이 중요해서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막혀 있어서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딜로이트도 그래서 리더들에게 첫 번째 과제로 '인력 개발과 배치'를 꼽습니다. 공정과 기술에 투자하는 만큼 과감하게 사람에게 투자하라고 합니다. 재교육을 HR 예산의 한 항목이 아니라 핵심 인프라로 다루라고 합니다. 그리고 AI의 영향을 업무(task) 단위로 따져 보고, 어디를 자동화하고 사람의 역할을 어떻게 다시 설계할지 정하라고 권합니다.
저를 가장 오래 붙잡은 것은 그다음 문장입니다. 걱정이 줄어들고 인력의 역할이 새롭게 정의되는 것은 덤이 아니라 성과를 만드는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성원의 불안을 줄이는 일이 '좋은 일'이 아니라 '성과를 내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반도체 기업에서 일하는 HRer 로서 이 보고서는 숙제처럼 읽혔습니다. 우리는 AI 도구를 얼마나 빨리 들여왔는지 자랑하기 전에, 현장의 엔지니어와 오퍼레이터가 그 도구 옆에서 자기 역할을 알고 있는지 먼저 물어야 합니다. "AI를 쓰세요"라고 말하기 전에 "AI가 들어오면 당신의 일은 이렇게 바뀌고, 우리는 이렇게 돕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AI가 주인공인 시대가 맞습니다. 다만 주인공이 무대 위에서 제대로 움직이려면 그 무대를 설계하고 조명을 맞추고 대본을 고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보고서의 마지막 문장도 같은 곳을 가리킵니다. 지능과 의도를 결합하고, 기술과 신뢰를 함께 키우는 리더가 미래를 정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사람이라는 결론이 반복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사실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