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도입 이후 개인의 업무 속도는 빨라졌지만, 조직의 성과는 따라오지 않고 있다. 이 현상의 원인 중 하나로 'Work Slop'을 살펴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주목받는 '일을 주도하고 판단하는 역량'을 살펴본다.
여러분의 조직에서 AI를 도입한 이후 개인의 업무처리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진 것을 체감하고 있을 것이다. 보고서 초안 작성, 회의 정리, 이메일 작성 등 개별 업무에서의 효율 향상 사례가 활발히 공유되고 있다. 맥킨지 설문(2025)¹⁾에 따르면, 직원 10명 중 9명이 업무에 생성형 AI를 사용해 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그 중 약 21%는 일상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헤비 사용자'로 분류된다.
개인의 속도가 올라간 만큼, AI가 만들어내는 산출물의 양도 급격히 늘어났다. 그런데 속도와 양이 늘어난 만큼 품질이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AI가 10분 만에 완성한 인력 교육 계획 초안이 구조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해당 업무 경험이 있거나 의사결정하는 입장에서 보면, 조직의 맥락과 맞지 않는 수치와 해석이 섞여 있다. 결국 검토자가 처음부터 다시 확인하고 고치지 않으면 실무에서 전혀 활용할 수 없는 수준의 결과물이 이전보다 증가하게 됐다. 한 사람이 빠르게 만든 결과물이 다른 조직원의 검토와 재작업으로 이어지면서 오히려 효율성을 감소시키는 현상이 나타난다. 개인의 효율이 조직의 성과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개인과 조직의 성과 사이 이러한 비대칭은 거시 데이터에서도 확인된다. 포춘(2026)²⁾에 따르면 수천 명의 CEO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상당수가 AI가 고용이나 생산성에 아직 실질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답했다. 새로운 기술이 널리 확산되었음에도 생산성 지표에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현상은 경제학에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1987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솔로우(Robert Solow)는 이를 두고 “컴퓨터는 어디에나 있지만 생산성 통계에서만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른바 ‘생산성 역설(Productivity Paradox)’이다. 40년이 지난 지금, 비슷한 패턴이 AI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BCG(2025)³⁾에 따르면 AI를 통해 실질적인 변혁적 성과를 달성했다고 평가되는 조직은 전체의 5%에 불과하다.
최근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Work Slop'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Slop'은 원래 '찌꺼기', '잔반'을 뜻하는 영어 단어다. SNS를 중심으로 AI가 대량으로 쏟아내는 저품질 콘텐츠를 가리키는 신조어로 확산되면서, 미국의 사전 출판사인 메리엄 웹스터(Merriam-Webster)가 2025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직장에서 이 현상이 나타날 때, 즉 겉보기에 매끄럽지만 깊이와 맥락이 부족한 AI 생성 업무 결과물을 'Work Slop'이라 부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리더십과 조직 성과 연구를 수행하는 BetterUp Labs의 연구(2026)⁵⁾에 따르면, "AI를 어디서든 써라"라는 무분별한 조직 지시는 맥락 없는 산출물을 양산한다. 어디에 사용할지에 대한 판단 없이 사용량 자체가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은 글로벌 기업에서도 관찰된다. 쇼피파이(Shopify) CEO 토비 뤼트케는 내부 메모에서 AI 활용을 ‘기본 기대치(baseline expectation)’로 선언했다. 추가 인력을 요청하려면 해당 업무를 AI로 할 수 없는 이유를 먼저 증명해야 하며, AI 사용 여부는 성과 평가와 동료 리뷰에도 반영된다. 딜로이트(Deloitte), PwC, JP모건 등도 조직 내 AI 교육 의무화와 활용 목표 도입을 발표했다. 이처럼 AI 사용 자체가 조직의 성과 지표가 되는 순간, 양을 위한 양이 늘어나기 쉽다. 이러한 구조적 유인은 결국 ‘Work Slop’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동시에 AI 결과물은 형식적 완성도가 높다. 이것이 작성자에게 근거 없는 자신감(Groundless Confidence)을 심어줄 수 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연구에서는 컨설턴트 758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AI의 능력 범위를 벗어난 과제에 AI를 활용한 집단은 AI를 사용하지 않은 집단보다 성과가 23% 낮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AI 사용자들은 자신의 결과물에 더 높은 자신감을 보였다. 대화는 줄고, 맥락은 사라지고, 자신감만 남는다. 이것이 Work Slop이 걸러지지 않는 첫 번째 이유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조직 차원의 검증 체계 역시 충분히 마련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맥킨지(2025)¹⁾에 따르면 AI를 도입한 기업의 절반 이상이 환각(Hallucination: AI가 사실이 아닌 정보를 사실처럼 생성하는 현상) 등 품질 문제를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AI 결과물을 사용 전에 전수 검토하는 조직은 27%에 불과하다. 같은 조사에서 리더가 AI 거버넌스(AI 활용에 대한 조직 차원의 원칙과 감독 체계)에 직접 관여하는 조직일수록 수익 기여도가 더 높았다. 즉, Work Slop은 AI 기술의 한계가 아니다. 결과물을 판단하고 걸러내는 조직의 역량 문제다.
Work Slop이 조직의 역량 문제라면, 그 역량의 핵심은 무엇인가? 결과물을 판단하고 맥락을 부여하는 일이다. 전통적으로 이 역할을 해온 것은 중간관리자다. 방향을 해석해 팀에 전달하고, 결과물의 품질을 판단하고, 부서 간 협업을 조율한다. 이것이 매니징(Managing: 사람과 일을 연결하고 방향을 정렬시키는 것)의 본질이다.
그런데 정작 AI 시대에는 이 역할을 수행할 중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