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직장상사에게서 1960년대 말 종합상사에서 일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당시에는 대학교를 졸업한 남자사원 한 명과 문서 작성, 영문 타이핑, 전화 응대, 자료 정리 등을 담당하는 여사원 한 명이 사실상 하나의 업무 단위를 이루었다고 했다. 1대 1로 짝을 이루어 일하다 보니 실제로 결혼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꽤 낯선 풍경이지만 무엇이든 종이에 써서 의사를 전달해야 했던 아날로그 시대에는 일이 추진되기 위해서는 그 만큼의 수고가 필요했었겠다 싶다.
이런 업무구조는 90년대 초, 사무실에 개인용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들어오면서 크게 달라졌다. 담당자가 직접 문서를 작성하고 수정하고 보관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 이메일과 메신저가 보편화되면서 정보 전달과 일정 조율의 방식도 바뀌었다. 기술의 진보가 업무 구성 단위를 자연스럽게 바꾼 것이다. 누가 누구와 함께 일해야 하는지, 하나의 일을 몇 사람이 나누어 해야 하는지 등을 말이다.
몇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업무에 들어온 AI도 비슷한 변화를 만들고 있다. 다만 이번에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훨씬 넓어진다는 점이 많이 다르다. 컴퓨터가 기존의 여러 명의 업무를 혼자 처리할 수 있게 해주었다면, AI는 과거 다른 분야의 전문가에게 부탁하던 일까지 어느 정도 자신의 업무 안으로 가져오게 한다.
마케팅 업무 예를 들어 보자. 범위와 목표가 비교적 명확한 작은 프로젝트라면 한 사람이 AI와 함께 시장과 경쟁사를 조사하고, 고객군을 나누고, 아이디어를 만들고, 간단한 수익 시나리오를 비교하고, 상품 콘셉트와 마케팅 문안까지 한 흐름 안에서 검토할 수 있다. 물론 전문적인 검증과 중요한 판단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과거 여러 사람에게 요청하고 설명하고 기다리고 취합하던 과정 중 상당 부분이 한 사람의 화면 안으로 들어온다.
여기에서 필자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변화에 무게중심을 두고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과거에는 다음 단계로 일을 넘기기 위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해야 했다. 시장조사가 필요하면 현장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디자인이 필요하면 디자이너에게 의도를 설명하고, 데이터를 보고 싶으면 분석 담당자와 무엇을 볼 것인지 상의했다. 커뮤니케이션은 더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한 협업이기도 했지만, 서로 다른 사람의 전문성과 실행능력을 이어 붙여 일을 진행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기도 했다.
AI가 실제 실행 단계까지 들어오면서 이런 접점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자료를 찾고, 초안을 만들고, 이미지를 만들고, 간단한 분석을 하는 일을 바로 이어서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도 업무를 하면서 예전보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부탁하고, 중간 결과를 확인하고, 다시 취합하는 일이 크게 줄었다고 느낀다. (하루종일 대화 없이 혼자 업무를 처리하는 일도 많을 정도로 말이다.) 회의시간도 짧아졌다. 목표가 분명하고 결과를 쉽게 수정할 수 있으며, 다른 업무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은 일이라면 혼자 AI와 처리하는 편이 훨씬 빠르고 편할 때가 많다.
그런데 혼자 꽤 멀리까지 가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이건 처음에 같이 이야기하고 시작했어야 했는데….”
결과물을 만드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애초에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인지, 어디까지를 이번 과제의 범위로 삼을 것인지가 서로 달랐던 것이다. 이미 많은 일을 해놓은 뒤에야 처음의 작은 차이가 꽤 큰 방향 차이가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시작할 때 방향과 판단기준을 충분히 맞춰 놓으면, 그 다음에는 굳이 계속 모여 있을 필요가 없다. 각자가 AI와 독립적으로 일하다가 새로운 변수가 생기거나, 다른 업무와 충돌하거나, 중요한 선택을 앞두었을 때 다시 판단을 연결하면 된다.
그래서 AI시대의 커뮤니케이션은 이런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업무대화를 얼마나 많이 할 것인가보다, ‘언제 사람들의 생각을 연결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개인의 업무범위가 넓어진다고 조직 전체의 판단까지 개인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두 명의 상품 담당자가 각각 AI를 활용해 자신의 상품을 훌륭하게 운영한다고 해 보자. 각자의 생산성과 완성도는 이전보다 크게 높아질 수 있다. 그러나 두 상품이 같은 고객과 예산, 브랜드와 유통채널을 공유한다면 아떻게 될까? 어느 상품에 자원을 더 투입할지, 단기매출과 장기적인 브랜드 신뢰가 충돌할 때 무엇을 선택할지와 같은 질문이 생긴다.
이런 질문은 자료가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적과 이해관계, 한정된 자원과 책임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미래 가치나 비즈니스적 타당성을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AI가 더 많은 자료와 대안을 빠르게 만들어줄수록 오히려 선택해야 할 것도 많아진다.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면 무엇을 하지 않을지도 정해야 하고, 여러 가능성 가운데 조직의 방향에 맞는 것을 골라야 한다.
AI가 선택지를 늘릴수록, 인간에게 요구되는 가치판단도 더 신중해지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의 관점이 필요하다. 한 사람이 아무리 뛰어난 AI 활용능력을 갖고 있어도 다른 부서의 현실, 고객의 반응, 조직 전체의 우선순위까지 혼자 완전히 대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본인이 그 내용까지 판단할 경우, 팀의 의사결정에 갈등이 야기될 수도 있다.) 그래서 AI가 줄이는 대화와 남겨두어야 하는 대화의 성격은 다르다.
일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했던 대화는 줄어든다. 대신 방향을 정하고, 선택하고, 서로의 일을 연결하고, 그 결정에 책임지기 위한 대화는 더 무거워진다.
앞으로의 조직에서 대화가 지금보다 많아질지 적어질지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논의하는 방식은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야기될 가능성이 크다. 개인과 AI가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은 과감하게 맡기고, 사람들의 판단이 필요한 순간에는 제대로 연결해야 한다.
어떤 일은 시작할 때 20분만 충분히 이야기하면 될 수도 있다. 어떤 일은 중간에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생겼을 때 다시 판단을 맞춰야 하고, 어떤 일은 마지막 선택과 책임을 앞두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계속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생각해야 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조직 안과 밖에서 퍼실리테이션을 해 온 사람으로서 나는 이 지점을 주목하고 있다. 앞으로 조직이 잘해야 할 것은 회의를 많이 만드는 일이 아니라, 언제 혼자 생각하고 언제 함께 판단할지를 알아보고, 그 과정을 잘 설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경계를 놓치면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사소한 일까지 계속 함께 결정하느라 AI가 주는 속도를 잃을 수도 있고, 반대로 각자가 자신의 일만 최적화하다가 조직 전체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을 늦게 발견할 수도 있다.
그래서 1부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다. (총 4부로 운영하고자 한다.)
AI 시대의 조직은 대화를 많이 하는 조직보다, 필요한 순간에 제대로 연결되는 조직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을 잘하려면 사람과 AI의 능력을 모두 이해해야 한다. AI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알아야 혼자 일할 범위를 정할 수 있고,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지 알아야 함께 만나야 할 순간을 알아볼 수 있다.
2부에서는 이 질문을 세계경제포럼의 핵심역량 자료와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AI 시대에 필요한 기술역량과 인간역량은 무엇이며, 우리는 두 능력을 실제 일 속에서 어떻게 함께 사용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