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는 게 가난이 아니에요.
여러 방면에서 작아지는 것,
생각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가치관도 작아져서 획일화되고 갇히는 것이 가난이라고 생각해요.
- [어른의 말, 김민희(2025)]
더 이상 작아지면 안 될 것 같았다. 시스템 안에 갇혀 내가 있는 그곳이 세상의 전부인 줄 착각하며 점차 쪼그라들고 있는 내게 좀 더 다른 빛이 필요했다. 그래, 빛, 빛을 원했다. 내 마음을 흔들어 줄 찬란하고 강렬한 빛.
재작년 2월, 아내가 흔쾌히 수락해 준 덕분에 홀로 스페인 여행을 다녀왔다. 마흔이 넘어 처음으로 밟아본 바르셀로나 땅,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스테인리스 창을 뚫고 들어온 일몰의 색을 만났다. 주황색과 노랑색, 그리고 희미한 보랏빛이 뒤섞이면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그 빛의 춤을 마주하며 마음이 괜스레 몽글해졌다. 무언가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도 도저히 만들 수 없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드는 압도적인 풍경, 자연이 빚어내는 그 신비함 앞에 서면 마음은 지금까지 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며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주로 내가 인생에서 마주해야 할 질문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 무엇일까?’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건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그때부터였다. 이 질문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아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
HR Unframed는 이 질문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좋은 그릇이 되었다. 오프피스트 용운님과의 우연한 대화 속에서 필연적으로 태어난 이 프로그램은 내게 매우 본질적이고 근원적이지만 일상에서 공개적으로 드러내기에는 다소 어려운 질문, 그러니까 일터를 넘어 삶에서 마주하고 있는 질문들을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 질문이 나만의 질문이 아니라 우리의 질문이기도 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싶은 것이 기획자로서 나의 욕심이기도 했다.
HR Unframed 시즌2 주제를 [조직 안에서 어른답게 일한다는 것]으로 정하고, 가장 먼저 생각난 연사는 이창준 대표님이다. 개인적으로 ‘스승님’이라고도 부르고 있는 이창준 대표님은 오랫동안 리더십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두고 연구하며 많은 조직에 이를 전파하시고, 삶으로도 보여주시는 구루(Guru)이시다. 10년 이상 인연을 이어오면서 조직 안에서의 내 개인적 고민과 조직 차원의 고민을 대표님과 스스럼없이 나누었고,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스승님을 통해 얻었다.
평소에도 개인의 주체성과 독립성을 강조하시는 이창준 대표님은 세션 초반에 지혜로운 사람의 3가지 특성을 말씀하셨다. 먼저 Reflective 는 자신의 편견과 모순, 이중성을 바라보는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을 갖춘 사람은 자기 인식력이 뛰어나 자기중심성을 탈피하고 객관적인 조망력을 갖출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Compassionate 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자비심이다. 이러한 특성을 갖춘 사람은 타인에 대한 연민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제거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마지막 Cognitive 는 삶의 복잡성과 역설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특성은 인간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보면서 삶의 한계와 불확실성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생각해보니 똑똑한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은 명확히 다른 것 같다. 생각건대, 똑똑함이 내가 가진 1인칭 차원의 능력에 대한 관점이라고 한다면 지혜는 다차원의 ‘헤아림’이라고나 할까? 다차원의 헤아림이 가능해야 나를 넘어 타인과 삶에 대한 복잡성과 제약, 모순과 역설을 비로소 수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생각과 연결되니 자연스레 '이런 태도는 어떻게 얻어질까?', 다시 말해 '어떻게 성숙해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저 공부를 많이 하거나 책을 많이 읽는 행위로만 성숙해질 것 같진 않다. 이에 대해 이창준 대표님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은 ‘인식의 차원을 높여가는 과정’이라 설명하셨다.

첫째, 시스템 밖에서 바라보는 ‘주체성’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특정한 틀에서 벗어나 자기 대본을 갖는 것이다. 조직이나 사회적 기대는 종종 우리의 순수한 자아를 덮어버린다. 경기장 안에만 머물지 말고 가끔은 구경꾼이 되어 나 스스로를 대상화해야 한다. 나의 과거를 용서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약속을 선언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둘째, 타인의 고통에 함께하는 ‘타자성’이다. 타인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받아들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일으키는 것이다. 책임은 ‘누군가의 요구에 답하는 것’임을 이해하고 타인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에 반응하며 함께 이야기를 듣고 만들어가야 한다.
셋째, 다음 세대의 교량이 되는 ‘책무성’이다. 진짜 어른의 책무는 나의 삶이 다음 세대와 연결되어 있음을 의식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실험을 계속하며 우리가 이 안에서 새로운 변화를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레비나스는 ‘우리가 고독한 것은 타자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동일자의 감옥에 포로로 갇혀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동일자의 감옥은 나의 익숙한 생각과 과거의 경험 혹은 욕망, 그리고 나와 닮은 것들로만 채워진 닫힌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 안에 갇혀있을 때 우리는 세상을 나의 관점으로만 해석하고 내 테두리 안에서 머물려 하기에, 타인과 진정으로 소통하기가 어려워진다. 동일자의 감옥에 빠지면 ‘싸잡아’ 보며, 타인을 자기 삶의 ‘도구’로 바라보게 된다.
제약과 경계를 넘어 자기 대본을 쓰고, 타인의 현재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며 내 삶이 다음 사람에게 닿아 있음을 자각하며, 동일자의 감옥을 경계하는 태도.. 참으로 어렵다. 특히나 이윤과 성과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 조직에서 이러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의구심도 든다.

이에 대해 이창준 대표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기업의 목적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요? 기업을 돈 버는 곳으로만 이해하면 충분치 않습니다. 기업을 돈 버는 곳이라고만 이야기한다면 고객이 만족하지 않아요. 이익을 넘어선 가치를 만들어내는 기업이 결국 팬을 만들고 있지요. 이윤은 목적을 수행하는 가운데 얻어진 결과예요. 따라서 조직은 미션과 비전을 매력적으로 정립해야 합니다. 이 과정은 구성원의 실과 조직의 실이 얽히는 과정이죠. 기업은, 그리고 리더는 자신의 실을 매력적으로 만들어내야 해요. 그것은 보편적이고 정당하고 옳은 일이여야 하죠. 매력적인 실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실에 자신들의 날줄을 연결하도록 해야합니다.“
대표님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겠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내가 먼저 주체로 서는 태도를 강조하셨다. ‘내가 주체로 서면 타인에게 유의미한 시그널을 줄 수 있다는 것’. 그래야 조직 안에서 상사가 고통받는 순간, 그 틈을 발견하여 좋은 기회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득 작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스캇 펙(M.Scott Peck)이 이야기 한 사랑의 정의가 생각났다. ‘다른 사람의 성장을 위해 나를 확장시켜 나가려는 의지’라고 했던가. 맨 처음 이 문장을 만났을 때 사랑이 ‘의지’라는 말이 굉장히 생경했다. 그것도 ‘타인과 하나가 되고픈 욕망’ 따위의 정의가 아니라 ‘나를 확장시켜 나가려는 의지’라니. 어쩌면 조직 안에서 변화를 다루는 사람은 타인을 변화시키려는 욕구를 내려놓고 먼저 내가 갖고 있는 사랑을 점검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때 마침, 세션 안에서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사랑이 식는 건 사람을 다 이해한다고 생각할 때예요. 타인이 미지의 상태로 남아있을 때 사랑이 유지되죠. 서로 다름이 계속 드러나야 해요. 타인에 대해 욕구(내 뜻에 부합시키려 하는 것) 하지 말고 욕망(무한의 미지의 세계) 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욕구를 드러내는가 아니면 욕망하고 있는가?
혹 나는 이미 어떠한 대상을 다 안다고 판단하고 싸잡아서 그를 평가하고 있진 않았는가?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연약함과 부실함에 절로 부끄러워졌다.
누군가 ‘부끄러움’이 성숙을 위한 첫 번째 감정이라고 했다.
윤동주 마냥 매일 절실하게 부끄러워지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