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R Unframed 시즌2] 세션2, 나를 잃지 않게 해준 것들에 대하여](https://cdn.offpiste.ai/images/articles/1782/cover/f3d2b47a-3705-4dc0-97a4-160b2effb072_그림1.png)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불편하거나 투덜대거나 까탈스럽게 굴지 않고
무의미한 말을 시끄럽게 하지 않고
떼 지어 몰려다니지 않고 나대지 않으면서도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가능한 한 계속하는 것.
-[자유로울 것, 임경선 (2017)]
'지금보다 더 나이를 먹어서도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은 무엇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게 맞기는 한가?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기에, 혹은 이것 말고는 딱히 다른 것을 잘해낼 재간이 없기에 이 일을 기꺼이 하게 만들고자 내 스스로 만들어낸 기만은 아니었을까? 내가 이 일을 잘하고 있다고, 좋아한다고 믿지 않으면, 매일 이 일을 마주해야 하는 나 자신에게 그나마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려우니 말이다.'
관성처럼 지금의 일을 거의 20년 가까이 꽤나 꾸준하게 해왔는데, 누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볼 때마다 강한 긍정으로 ‘이 일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나랑 잘 맞다고. 아마도 죽기 전까지 이 일은 하게 될 것 같다’고 이야기 했더랬다. 이런 대답을 하는 나를 곁에서 본 사람은 아마도 내가 ‘천직’을 만난 것으로 이해하고 짐짓 날 부러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만히 나와 대화를 나누어보면 내가 좋아하는 일이 ‘HR’인지 (그 HR을 한다는 것도 따져보면 여러 세부 분류와 의미가 있겠지만), ‘조직개발 프로그램 콘텐츠를 만드는 일인지’, ‘다른 사람의 성장과 변화를 바라보는 일’인 건지, 아니면 ‘조직의 변화에 기여하는 일인지’ 그도 아니면 ‘ 내 가설이 맞다는 걸 증명하는 일’ 인지.. 정확히 내가 ‘좋아한다고’ 더구나 ‘잘한다’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는 것이 요즘엔 좀 자신이 없어진다. ‘좋아하고 잘해서 이 일을 한다’기 보다, 이 일을 하다 보니 좋아하게 되었고, 이 일에 더 깊숙이 성큼성큼 들어가다 보니 어떤 영역에서는 조금 잘해내게 된 것들을 발견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더군다나 임경선 작가가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매일매일 수행해야 하는 일 앞에서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불편하거나 투덜대거나 까탈스럽게 굴지 않는 것’은 미성숙한 내게 아직 오르지 못할 나무와 같았다.
생각하다가 재훈님이 떠올랐다. 이전에 잠시 머물렀던 힐링페이퍼(강남언니)라는 회사에서 재훈님을 만났다. 재훈님의 진솔함이나 유연함, 열려있는 사고 등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무엇보다 내가 아는 재훈님은 자기 관리가 투철하고 꾸준하신 분이다. 일상에서 차곡차곡 자신의 패턴을 발견하며 루틴을 만들어왔고, 수 년간 축적된 루틴이 삶을 단단하게 지탱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극도의 자기 객관화를 통해 빚어낸 루틴이 삶을 이끌어오는 느낌은 재훈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누군가에게 분명히 전달되는 감각이다.
개발자로 커리어를 시작한 재훈님은 GE Capital 에서는 금융상품 Product 을 맡으시기도 하고, 아마존에서는 킨들의 프로덕트 오너(PO)로 역할을 하시기도 했다. 몰로코(moloco)가 60-70명 정도의 규모이던 시절 합류하여 조직의 스케일업을 함께 이끌었고, 지금은 힐링페이퍼의 메디컬 사업부를 리드하며 일본에서 병원 사업을 키워내고 있다. 금융/IT플랫폼/광고/미용의료 등 전방위로 업계를 누비며 신규 사업을 주도하고 시장의 성장을 견인하면서 만들어진 커리어는 결과적으로 재훈님의 자유도를 높이며 그야말로 시장에서의 가치를 증명해냈다.

▲ 재훈님의 아마존 Japan 근무시절, 아마존 CEO 제프 베조스와 함께

▲ 재훈님이 직접 디자인한 티셔츠에 제프 베조스의 싸인을 받은 것
“새로운 걸 시작하면 반드시 실수하고, 실수하면 불편해집니다. 사람들은 지식이 쌓이고 편안해진 다음에야 연습하고 성장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반대예요. 낯선 걸 시도하자마자 어색함과 실수가 먼저 오고, 그 불편함을 견뎌야 진짜 진척이 생기죠. 새로운 걸 배울 때 겪는 필수적인 과정은 ‘자기가 바보가 되었다는 느낌’입니다.”
재훈님은 30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서툰 일본어로 일하며 이 과정을 직접 겪었다. 이전에 대기업에서 직급도 있고 영어도 잘한다는 평을 듣던 이가 하루아침에 '바보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됐다. 이 불편함을 피하면 편안한 공간(컴포트존)이 점점 줄어들고, 결국 아무런 도전도 하지 않게 되는 악순환(스파이럴: Spiral)에 빠진다고 재훈님은 강조했다. 어떻게 하면 이 스파이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악순환을 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루틴이예요. 스스로 무너지려 할 때마다, 일주일에 한 번 부모님께 전화하기, 정해진 날에 손톱 깎기처럼 확실히 해낼 수 있는 작은 일을 해내고 체크하며 성취감을 쌓는 게 중요합니다.”

재훈님은 실제로 본인이 지키는 루틴을 소개했다. 오전에는 세안 후 꼭 선크림을 바르고 달리기를 하면서 오디오북을 청취한다. 찬물 샤워를 마치고 나면 영어로 세 줄 정도의 감사일기를 쓴다. 점심때는 가능한 밖으로 나가서 식사를 하고 이후에 햇볕을 쬐며 산책을 한다. 그리고 퇴근길에는 팟캐스트를 듣고, 저녁 정해진 시간에는 매일 마스크팩을 붙인 채 짧은 명상을 한다. 의도적으로 하지 않는 것들도 설정한다. 음주와 흡연을 하지 않고, 최근에는 탄산수와 커피도 끊었다. 잠들기 전에는 침실에 폰을 들고 가지 않는다.
“내가 잘하고 싶지만 잘 안 하게 되거나 못하는 것을 루틴화 해야 해요. 공부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을 가르는 게 뭘까요? 그건 IQ가 아니라 메타인지입니다. 메타인지는 자신에게 어떤 보상이 있어야 루틴을 지속할 수 있는지 스스로 찾아내는 능력이죠.”
재훈님은 매달 운동량, 독서량, 감사일기, 심지어 구성원들에게 자비로 선물이나 밥을 사주는 횟수까지 점수화해 그래프로 확인하는 개인 OKR을 실행하고 있다. 지속적인 성취감을 맛볼 수 있도록 스스로 보상을 설계하고, 누적의 힘을 믿고 환경을 구조화 한 것이다.

▲ 재훈님의 개인 OKR 캡처 화면
재훈님은 이를 베이킹(Baking)이라 표현했다. 당장 급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일 (운동, 가족과의 시간, 조직문화를 만드는 일 등)에 투자하는 행위, 그러니까 지금 당장 하지 않는다고 해서 티가 나진 않지만 계속해서 무시하고 지나치면 결국 나중에 무너지게 만드는 것들. 그래서 지금부터 중요하지만 긴급하지 않은 영역을 서서히 다루어나가는 것이 베이킹이다. 재훈님이 현재 일본에서 리드하고 있는 메디컬 사업으로 예를 들어보면, 병원 매출이 하루 수천만 원씩 일어나는 상황임에도 직원 간 갈등 해소를 위해 과감히 하루 문을 닫고 대화 시간을 가진 것, 고객 만족을 위해 하루 예약 인원을 의도적으로 제한하는 것 등이 모두 같은 맥락이다. 재훈님의 미션은 ‘고객이 다시 돌아오는 병원’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영역’을 챙기는 게 결국 위기의 순간 꺼내 쓸 수 있는 체력이 된다는 것이다.
재훈님은 장기적 관점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며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고객 중심이라는 용어의 본질을 환기해 주었다.
“고객 중심이란 말 자체가 이미 장기적 관점의 의미예요. 고객 중심은 결코 단기적이 될 수 없죠. 우리가 자주 범하는 실수는 ‘만든 사람이 자기가 고객인 줄 착각한다’는 점입니다.”

언제인지 누군가에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프로(Professional)란 ‘장소와 상황에 상관없이 기대되는 수준 이상의 퍼포먼스와 결과물을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하더라. 그들에게 요구되는 일관성은 결과물이나 성과의 퀄러티에도 있지만, 실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꾸준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루틴'에 있지 않을까? 프로는 스스로 가지고 있는 루틴이 있다. 루틴은 곧 꾸준함이다. 어떤 프로는 그가 스스로 어떤 루틴을 가지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은 그의 꾸준한 단련과 노력이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자연스레 배어있는 '무의식적 루틴'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타인에게는 매우 버겁고 어렵게 느껴지는 무언가에 대한 꾸준함이 정작 프로의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는 전혀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하루 이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언제 시작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아마득한 시절부터 지금까지 습관처럼 이어져온 삶의 궤적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피터드러커 선생님은 '성과를 올리는 사람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자신의 능력과 존재를 성과로 연결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실행 능력뿐'이라고 이야기했고 '실행 능력은 하나의 습관'이라고 말했다.
나는 요즘 언제 바보가 되었다고 느끼는가?
의도적인 바보가 되기 위해 나는 어떤 실천을 하고 있을까?
내가 잘하고 싶지만 평소 잘 안되는 것들을 위해 나는 어떤 환경과 구조를 만들고 있는가?
얼마 전 나는 아주 어릴 적 쳤던 피아노를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부모님의 의도가 아니라 전적으로 나의 의지로. 선생님이 주신 악보를 처음 접하며 왼손과 오른손으로 오선 위의 음표들을 하나씩 확인하며 건반 위에서 손가락을 엉기게 움직여 볼 때 나는 늘 바보가 되곤 한다. 낯선 불편함을 매번 경험하고 있는 것이 수개월째, 그래도 지금은 더듬더듬이긴 하지만 김광진의 '편지'와 리처드 샌더슨의 'reality'를 멜로디로 칠 수 있게 되었고, 윤하의 '기다리다'를 코드로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삶이 충만해지는 순간은, 어쩌면 이러한 바보 같은 시간들을 기꺼이 넉넉하게 견디고 감당해 내는 시간 덕분일지도 모른다. 당장 눈앞의 성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중요하지만 긴급하지 않은 일상의 루틴을 묵묵하게 베이킹해 나가며 내 '삶의 복리'를 누리는 기쁨을 맞이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