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R Unframed 시즌2] 세션3, 어른의 색

[HR Unframed 시즌2] 세션3, 어른의 색

조직이라는 캔버스 위에 '나'라는 색깔을 입혀가는 여정
조직문화HR 커리어리더십전체
지훈
최지훈Jul 12, 2026
9337



전문가(professional)라는 단어가 탄생한 기원을 보면,

절망적인 세상 속에서 '믿음의 서약(profession of faith)'을 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새로운 전문인은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타협하게 하는

"제도권 삶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세상에서,

내가 서 있을 수 있는 확고한 지반을, 나의 정체성과 영혼을 신뢰하는 바탕을,

나 자신과 동료들, 그리고 직장을 우리들의 진정한 사명으로 삼을 수 있는 지반을 마련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 [가르칠 수 있는 용기, 파커 J 파머 (2013)]



나는 여전히 전문성을 갈구한다.

내가 서 있을 수 있는 확고한 지반을 원하는 동시에 나의 정체성과 연결된 사명을 실행하며 평생의 업으로 삼을 수 있는 단단한 지반을 원한다. 운이 좋게도 내 커리어 상에서 조직 안에서 이러한 지반이 확보되었던 순간들이 몇 차례 있었다. 주변 동료들과 리더로부터 얻은 신뢰를 통해 나의 지반을 다지고 이를 통해 조금씩 영향력을 확장해가며 내 영혼이 원하는 일들을 해나갈 수 있는 환경이 허락된 상황들이 감사하게도 몇 차례 주어졌었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왔던 기회들은 조직 안에서 예상하지 못한 변화로 혹은 앞으로에 대한 나의 불안감이나 욕심으로 아쉽게 지나가곤 했다.

한번 맛본 달콤함을 다시 맛보고 싶은 욕망으로 이러한 기반을 재차 만들어보고자 했으나, 제도권 삶에서 개인의 욕망이 허락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처음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축적에 기대어 서서히 얻어내야 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도권 안에서 기득권을 쥐고 있거나 여러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충돌하는 각자의 욕망들로 인해 조직은 쉽게 어느 한 개인의 지반과 영혼에 기댄 사명감에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것이 조직의 이익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제대로 검증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초기 HR스타트업에 합류하여 나만의 사명감을 한참 실험해보고자 하던 무렵, 정연님을 만나게 되었다.

커피챗 신청서에서 현대자동차의 시니어 HR 담당자로 자신을 소개한 그를 만나기 위해 양재동 현대차 사옥으로 향했다. 처음 만난 정연님의 첫인상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는 전형적인 HR 담당자라기보다는 디자이너나 마케터라는 직업에 훨씬 어울릴 만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예상보다(?) 패셔너블한 옷차림, 스타일리시하게 가꾼 수염, 서글서글한 인상, 그리고 무엇보다 유연하고 개방적인 태도가 내가 은연중에 가지고 있었던 '현대자동차 HR 담당자'라는 이미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오히려 내가 몸담았던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정연님을 만났다면 그 편이 더 어울릴만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제도권 삶을 강력하게 요구받는 사막 같은 조직 안에서, 초연하게 자기다움을 발휘하고 있는 단단한 선인장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현대자동차의 미래 전략을 고민하는 팀에서 조직과 HR을 연구하고 계신 정연님과 첫 만남에 2시간도 넘게 수다를 나누었다. 이후로 우리는 일 년에 서너 차례 서로 안부를 주고받고 일상을 나누는 관계가 되었고 조직 안에서의 고민과 역할을 넘어 '삶 안에서의 자기다움을 어떻게 만들어나가는지'에 대한 공통의 화두를 놓고 서로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사이가 되었다.

정연님은 이미 세 권의 에세이를 출간한(공저)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인스타 타임라인에 올라오는 포스팅을 보면 직접 북토크를 진행하고 다른 이의 북토크에 참여하기도 하고, 글쓰기 모임에 부지런히 참석하기도 한다. 글쓰기는 그의 자기다움을 발견하고 다져나가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 정연님의 첫 번째 에세이집,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



글쓰기는 정연님에게 어떤 의미일까?

“글쓰기는 제가 저를 잃지 않기 위해 붙잡은 가장 단단한 끈이었습니다. 남의 언어가 아니라 나의 단어로 쓸 때, 비로소 제 색깔이 또렷해지는 것 같아요. 글을 쓰는 삶이란 용기와 인내, 끈기, 공감, 열린 마음, 그리고 거절당했을 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하죠. 그래서 저는 멈추지 않고 계속 씁니다. 잘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로 살기 위해서요.”

은유 작가도 <쓰기의 말들>이라는 책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전한 기억이 난다. 그는 글쓰기를 ‘도돌이표’에 비유했다. 글쓰기는 여러 측면의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를테면 어설픈 첫 줄을 쓰는 용기,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용기, 진실을 직면하는 용기, 남에게 보여주는 용기,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용기 등등.. 도돌이표처럼 용기 구간을 왕복하는 일이 글쓰기 같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어쩌면 우리네 인생과 참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회사에 20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음에도, 정연님은 그 안에서 용기를 내어 컴포트존(Comfort Zone)을 통과하는 경험을 여러 번 겪었다. 본사 HR본부에서 인사제도를 담당하며 커리어를 시작했으나 뜻하지 않게 인재개발 담당으로 커리어를 전환하게 된 일, 그러다가 생산 공장 현장에서 HR 업무에 도전하며 노무 이슈가 강력한 날 것의 조직 현장을 경험하게 된 일, 또다시 조직 변화에 따라 그룹의 미래 경영 리서치 역할에 도전하게 된 일 등, 그때마다 커리어 각 단계에서 변화에 대응하며 도전을 이어갔다. 여러 번 자리를 옮기며 전혀 다른 시선으로 조직을 바라보는 입체적인 경험을 쌓은 것이다. 그가 말한 대로, 글을 쓰는 삶처럼 용기를 내 도전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인내와 끈기로 견디기도 하고, 열린 마음으로 새로 오는 기회를 마주한 것이다.

하나의 조직에 오랫동안 머무는 사람들은 대개 매너리즘의 유혹에 노출되기 쉽다.

어차피 변화시킬 수 없다는 무력감과 오래된 관행에 절여져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자동 사고.. 그러나 정연님에게서는 그러한 타성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스스로를 '인생 여행자'라는 닉네임으로 칭하는 그답게, 낯선 이국땅을 여행하듯 정연님은 조직 안에서도 여전히 깊은 호기심과 탐구심으로 새로운 여정을 이어가고 있는 여행자 같다. 어떻게 이런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수년 전, 장인어른의 소천은 제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가까운 죽음 앞에서, 제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다시 묻게 되었어요. 그리고 생산 현장에서 근무하던 시절, 계약직·파견직 채용 면접에서 지원자를 '볼트와 너트'처럼 대하는 모습, 이에 더해 조직 내 진실이 권력 구조 앞에서 침묵되는 사건을 겪으며 극심한 무기력에 빠지기도 했죠. 무기력함의 근원은 결국, 부조리함과 부정의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이 무기력으로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게 맞는지 위기와 고민이 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바꿀 수 없는 것은 수용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내 방식대로 바꾸는 것을 선택했어요. 그 구체적 실천이 글쓰기이기도 했습니다.”



정연님은 이를 전환 학습(Transformative Learning)으로 설명한다.

전환 학습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세상과 자신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관점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새로운 의미 구조로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는 학습을 의미한다. 즉, 삶의 커다란 위기나 강렬한 경험을 계기로 자신의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바뀌며 새로운 의미를 구성하게 되었다면 전환 학습을 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전환 학습을 경험하게 되면 실제 행동과 삶의 방식이 이전과 달라지게 된다.

이후에 정연님은 ‘나다움’으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사소해 보이지만 수염을 기르게 된 것도 그중에 한 가지 실천이었다. 정연님에게 수염은 '나는 나의 방식대로 존재하고 살아간다'는 가장 일상적인 선언이자 살아있는 타투 같은 것’이라고 한다. 코로나로 우연히 3주간 면도를 못하며 시작된 수염이었다. 처음에는 출근길에 면도를 해야 할지 말지 수없이 고민하다 큰 용기를 내어 사무실로 출근을 하게 되었는데, 우려와는 달리 상사와 주변 동료들의 반응이 긍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조직 내에서 다른 이들과 똑같은 하나의 부속품 (one of them)으로 존재했을 때 보다,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을 드러낸 지금 동료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더 경청해주는 변화를 체감했다고 한다. 이제는 사회적 압력 속에서도 "누가 해고를 언급하기 전까지는 이 수염을 유지한다"라는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기도 했다.

조직 안에서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고 지켜내는 것은 어느 정도 직급이 오르기 전까지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대개의 조직은 책임의 범위와 영향력에 따라 위계질서가 결정되기 때문에, 10년 혹은 20년 이상 직장 생활을 했다 하더라도 나만의 기준을 관철하는 데는 늘 제약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조직 안에서 나만의 단단한 기준을 가지고 일한다는 것은 진정 어떤 의미일까?

나 역시 이와 관련해 명확한 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내 나름의 답을 찾아본다면 제현주 작가의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라는 책의 내용으로 설명하고 싶다. 저자는 ‘일로부터 얼마큼의 돈, 어떤 의미와 재미, 어떤 관계를 원하는지, 각각에 얼마큼의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면 행복한 일은 끝끝내 우리의 몫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일침한다. 그리고 유능의 준거가 세상의 방식이어서는 안되며, 유능해야 할 이유가 온전히 나의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 유능성은 지금 나에게 달려있는가? 아니면 타인의 판단에 의존하고 있는가?

내가 일로부터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돈일까, 의미와 재미일까, 어떤 관계일까? 그를 얻기 위해 나는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일을 좋아하지만 일만 하면서 살고 싶지 않은 마음,

돈을 잘 벌고 싶지만 그저 돈 밖에 그 의미를 찾을 수 밖에 없는 일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

배우고 성장하는 일을 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너무 어려워 실패가 뻔한 일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

우리는 역설적이고 모순 투성이인 욕구를 다루며 매일을 살아간다. 이 욕구를 내 스스로 조절하고 현실적인 균형점을 찾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다움’을 그리고 ‘어른스러움’을 이야기 할 수 있으려나. 이 삶에서 내가 서 있을 수 있는 확고한 지반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모순 투성이인 나의 마음을 마주하면서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한 확신을 얻어나가는 과정이지 않을까 싶다.

어른의 색깔은 어쩌면 완성된 정체성이라기보다, 끊임없이 나와 세상을 연결해가는 여정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닐까.




지훈
최지훈
조직도 브랜드다 / 더인터널브랜딩랩
브랜딩의 관점으로 조직문화를 설계합니다. 조직 안의 관계를 디자인하고, 진단을 행동으로 연결하며, 개인의 '자기다움'이 팀의 건강한 '우리다움'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만듭니다.

댓글0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주)오프피스트 | 대표이사 윤용운
서울특별시 서초구 사임당로8길 13, 4층 402-엘179호(서초동, 제일빌딩)
사업자등록번호: 347-87-03493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25-서울서초-2362호
전화: 02-6339-1015 | 이메일: help@offpiste.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