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뭘 해야 하지?
HRD를 처음 기획할 때, 혹은 처음 접하는 분야의 교육 기획을 맡았을 때 으레 가장 먼저 막히는 지점입니다.
개선해야 할 무언가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조직에서 요구하는 방향도 있고, 요즘 중요하다는 주제도 많습니다. 다른 회사에서 잘하고 있다는 사례를 찾아보면 참고할 것도 끝없이 나옵니다.
리더십도 중요하고, 문제해결도 중요합니다. 커뮤니케이션도 필요하고, 요즘이라면 AI도 빼기 어렵습니다. 하나씩 보면 다 필요한 것 같고, 실제로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HRD를 처음 기획할 때는 의외로 ‘무엇이 필요한가’를 찾는 것보다,
그 많은 것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에서 더 막막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고민 끝에 하나를 골라 교육을 만들었다고 해보겠습니다.
좋은 강사를 찾고, 내용을 조율하고, 운영까지 꽤 신경 썼습니다. 교육생 반응도 좋고 만족도도 높습니다. 교육 자체만 놓고 보면 잘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육이 끝난 뒤에는 또 다른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 교육으로 무엇이 달라졌는가?”
처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막막했고, 끝나고 나서는 ‘무엇이 달라졌다고 말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HRD를 경험하면서, 저는 이 두 가지 어려움이 사실 같은 질문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처음에 왜 이 교육을 선택했는지, 무엇을 바꾸기 위해 시작했는지가 선명하지 않으면 기획할 때는 선택지가 끝없이 늘어나고, 교육이 끝난 뒤에도 무엇을 결과로 이야기해야 할지 애매해지기 쉽습니다.
저 역시 아직 답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다만 몇 번의 기획을 거치면서, 이런 순간에 제 생각을 조금 더 빠르게 정리해줄 수 있는 저만의 질문을 글을 통해 공유하고자 합니다.
아주 새로운 방법도, 완벽한 답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구나”, 혹은 다음 기획에서 “이 질문은 한번 던져봐야겠다” 정도의 작은 힌트가 되었으면 합니다.
처음 HRD 업무를 맡았을 때, 조직을 조금 더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교육의 기획과 운영을 맡게 됐습니다.
조직문화에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는 것까지는 비교적 명확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무엇을 해야할 지 너무 막막했습니다.
조직 내 관계도 중요했고, 개인의 정서적 안정이나 심리적 안전감도 중요했습니다. 일과 삶을 다루는 방식, 자신의 강점을 이해하는 것, 조직 안에서 적응하고 관계를 맺는 것 역시 모두 필요해 보였습니다.
찾아볼수록 선택지는 줄어들기보다 늘어났습니다.
각 주제마다 왜 중요한지를 설명하는 연구와 사례가 있었고, 실제로 비슷한 고민을 하는 기업들도 있었습니다. 하나씩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쉽게 버리기 어려웠습니다.
그중 몇 가지를 선택하고 나서는 좋은 교육을 만드는 데 꽤 많은 시간을 썼습니다.
업체와 강사를 여러 번 만나 내용을 조율했고, 단순히 듣기 좋은 이야기에 그치지 않도록 과정의 구성도 계속 다듬었습니다. 교육생들이 자기 회사생활을 돌아보고 무언가 하나라도 가져갈 수 있었으면 했습니다.
반응도 좋았습니다.
“이런 교육은 처음 들어봤다”, “실제 회사생활을 돌아보게 됐다”, “현업에서도 생각해볼 것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분명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었고, 각각의 주제 역시 충분히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육이 끝난 뒤 결과를 정리하려고 하니 그 다음부터 막혔습니다.
만족도가 높았다는 것, 교육생들이 도움이 됐다고 이야기했다는 것, 좋은 강사와 콘텐츠를 제공했다는 것은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더 중요한 질문, ‘그래서 조직의 무엇이 달라졌는가.’에 답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조금 더 정확히는, 이 정도의 비용과 자원을 투자해서 조직에 유의미한 가치를 실제로 창출했는가 였습니다.
많은 시간을 들여, 좋은 반응을 얻은 교육인 만큼 그 질문에 충분히 답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각 주제가 왜 중요한지 나름의 근거를 찾아 설명했습니다. 어느 정도 납득할 만한 이야기도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왜 꼭 해야 하는데?”라는 질문 앞에서는 완전히 개운한 답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당시에는 그 질문이 조금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교육 하나를 만들기 위해 꽤 많은 시간을 들였고, 실제 참여자들의 반응도 좋았으니 담당자로서는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질문은 정말 타당했습니다.
교육의 가치를 부정하는 질문이라기보다, 기획자로서 Why와 So what에 충분히 답하고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가까웠습니다.
당시의 교육은 분명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치가 있다는 것과, 그 시점에 그만큼의 시간과 비용을 써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지점이 HRD가 가진 조금 독특한 어려움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은 ‘좋은 일’이라는 피드백을 받기 쉬운 업무입니다. 그래서 더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생각이 달라질 수 있고, 평소 돌아보지 못했던 자신이나 동료, 일하는 방식을 돌아보는 경험도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육은 실제로 어느 정도의 가치를 만듭니다.
그리고 웬만한 주제에는 ‘왜 중요한가’를 설명할 근거도 존재합니다.
어려운 것은 그다음입니다.
왜 중요한지를 설명하는 것과, 왜 지금 우리 조직이 이 문제를 위해 사람의 시간과 비용을 써야 하는지를 설명
하는 것은 조금 다른 일입니다.
HRD가 실패하기 어렵지만, 성공하기도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정확히는 실패와 성공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일에 가깝습니다.
교육의 완성도가 높고 참여자의 반응이 좋다면 그 자체로 분명히 가치있지만 그것만으로 ‘이 교육이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선택이었는가’에 대한 답을 해줄 수 없다는 점이 HRD의 기획을 막막하게 만듭니다.
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할 수 있었고, 그 중 너무 많은 것들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좋은 교육인가?’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교육인가?’는 같은 질문이 아닙니다.
이 경험 이후, 다음 교육을 기획할 기회가 왔을 때는 조금 다르게 시작해보고 싶었습니다.
무엇이 좋은 지부터 찾기보다, 무엇이 필요한 지를 먼저 좁혀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기획을 거치면서 막막한 초반에 제 생각을 조금 더 빠르게 정리해주는 질문 하나를 찾게 됐습니다.
조직문화 관련 교육 이후 팀원을 대상으로 한 리더십 교육을 새롭게 기획하게 됐습니다.
팀원 대상의 리더십 교육이란 무엇인지도 생각하기 어려웠고, 그 범위도 너무 넓게 느껴졌습니다.
셀프리더십을 이야기할 수도 있고, 문제해결이나 주도성을 다룰 수도 있었습니다. 팔로워십이나 커뮤니케이션 역시 충분히 중요했습니다. 조금만 찾아보면 각각을 뒷받침하는 좋은 사례와 교육과정이 끝없이 나왔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담을지 몰랐던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처럼 좋은 주제를 고르고, 잘하는 강사를 찾고, 완성도 높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할 수도 있었습니다. 교육 자체는 꽤 괜찮게 만들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하면 결국 또 ‘반응은 좋았다’는 결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보다 앞에서부터 조금 다른 답을 갖고 시작해보고 싶었습니다.
‘팀원에게 무엇을 가르칠까?’보다 먼저, ‘우리 조직은 왜 팀원을 육성해야 할까?’
그리고 조금 더 거칠게는, ‘이걸 왜 하지 않으면 안 되지?’ 를 고민해봤습니다.
‘왜 해야 하는가’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교육에는 꽤 좋은 답을 붙일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하지 않으면 무엇이 문제로 남는가’라고 묻자 시선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교육 안에서 답을 찾으려 했다면, 이번에는 교육 밖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조직에서는 팀원들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현재 역할에서 다음 역할로 넘어갈 때 무엇이 요구되는지, 그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어려움이 생기는 지점은 어디인지 살펴봤습니다.
그러자 교육의 역할도 조금씩 좁혀졌습니다.
어떤 조직은 역할이 빠르게 바뀌고 비교적 이른 시점부터 큰 역할을 맡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조직은 일정한 경험을 축적하면서 단계적으로 더 넓은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렇다면 두 조직이 같은 이름의 ‘팀원 대상 리더십 교육’을 하더라도 목적과 내용이 같을 이유는 없습니다.
다른 회사에서 잘 작동한 Best Practice가 우리 조직의 Best Fit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때서야 책에서 자주 보던 ‘전략적 HRD’라는 표현도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거창한 전략을 만드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의미보다는, 적어도 교육 그 자체보다 조직의 상황과 필요한 변화를 먼저 보고, 그 안에서 교육이 해야 할 역할을 선택하는 것.
저에게는 그 정도의 의미부터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저는 교육을 기획할 때 처음부터 콘텐츠를 찾기보다 세 가지 질문을 먼저 해보려고 합니다.
지금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핵심 문제는 무엇인가.
이를 해결하려면, 누구의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
그 변화에서 교육이 담당할 수 있는 몫은 어디까지인가.
아주 새로운 질문은 아닙니다. 그런데 실무에서는 생각보다 유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팀장 리더십 교육’을 기획을 맡게 되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문제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담고 싶은 주제가 계속 늘어납니다.
코칭도 중요하고, 1on1도 필요합니다. 피드백과 동기부여도 중요하고, 심리적 안전감 역시 빼기 어렵습니다.
각각만 놓고 보면 모두 좋은 주제입니다.
그래서 문제를 먼저 좁히지 않으면 결국 콘텐츠 간의 경쟁이 시작됩니다.
무엇을 넣을지 고민하고, 무엇이 더 트렌디한지 비교하고, 좋은 강사를 찾습니다.
반대로 실제로 반복되고 있는 상황이 무엇인지, 누구의 어떤 행동이나 역할이 달라져야 하는지가 조금만 선명해지면 더욱 명확한 선택의 기준이 생깁니다.
무엇을 넣을지뿐 아니라 무엇을 넣지 않아도 되는지가 보입니다.
강사에게 무엇을 요청해야 하는지도 달라지고, 왜 이 교육을 해야 하는지 설명하기도 쉬워집니다.
교육이 끝난 뒤 무엇을 다시 확인해야 하는지도 이전보다 분명해집니다.
문제를 좁히면, 기획해야 할 것도 줄어듭니다.
그리고 저는 이 지점에서 HRD가 결국 ‘선택’의 일이라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이 교육을 선택했다는 것은 다른 교육에는 시간을 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2시간간짜리 교육을 천 명이 듣는다면 조직은 이 교육에 2,000시간을 사용합니다.
교육비뿐 아니라 구성원의 업무시간, 리더의 관심, 조직이 전달하는 메시지까지 함께 사용합니다.
비용 뿐 만 아니라 사람들의 소중한 시간과,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씁니다.
그래서 ‘하면 좋은가?’만으로 선택하기에는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지금 이 문제를 위해 우리의 시간과 성장의 기회를 쓰는 것이 맞는가?’ 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좋은 질문은 좋은 콘텐츠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다만 좋은 콘텐츠를 고르기 전에 기획의 범위를 줄여주는 역할은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모든 교육을 이렇게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중에 보면 다른 문제의 결과였을 수도 있고, 교육의 변화를 숫자로 명확하게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습니다. 모든 교육이 반드시 명확한 비즈니스 문제에서 출발해야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관점을 접하는 경험 자체가 사람에게 의미 있을 수 있고, 예상하지 못한 학습이 이후의 변화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만족도 역시 너무나 중요한 지표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HRD를 처음 맡았거나, 새로운 교육을 기획하면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면 좋은 프로그램이나 좋은 강사를 찾기 전에 한 번쯤 이렇게 물어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걸 왜 하지 않으면 안 되지?”
완벽한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뿐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지가 조금 더 빨리 보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왜 이 교육을 해야 하는가’를 설명할 때 좋은 주제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선택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조금씩 생깁니다.
저도 여전히 기획을 할 때마다 답을 찾는 중입니다.
다만 처음 HRD를 시작했던 저에게 한 가지를 먼저 알려줄 수 있다면,
좋은 교육을 더 많이 찾는 방법보다 이 질문을 먼저 알려주고 싶습니다.
HRD에는 완벽한 답보다 조금 더 좋은 질문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