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PI를 두고 흔히 나침반이나 자동차 계기판에 비유하곤 합니다.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지, 얼마나 왔는지를 점검하는 도구라는 뜻입니다. 매우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앞으로 나아가려면 무엇을 향해 달릴지가 분명해야 하고, KPI는 그 방향을 정렬하고, 여러 일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잡아줍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정된 자원과 시간을 어디에 쓸지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KPI 자체를 부정할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조직 운영에 반드시 필요한 도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몇 년간 KPI 제도를 운영해보니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KPI가 방향을 가리키는 도구로만 쓰인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 KPI가 인사평가 점수와 직접 연결되는 순간 시작됩니다. 점수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사람은 점수 그 자체에 매몰됩니다. 원래 KPI는 목표를 향해 잘 가고 있는지 보여주는 계기판이었는데, 어느 순간 계기판의 숫자를 높이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립니다. 도구가 목적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셈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직원들 입장에서는 아래와 같은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KPI 점수가 곧 내 인사평가 점수다.
그러니 목표치는 되도록 낮게 잡아야 한다. (샌드배깅 현상)
평가에 도움이 안 되는 일에는 힘을 뺀다.
KPI 외 업무가 떨어지면 "내가 굳이 왜?"라는 생각이 든다.
샌드배깅(Sandbagging)이란?
나중에 목표를 달성하기 쉽도록, 애초에 목표치를 일부러 낮게 잡는 행동을 말합니다. 달성도가 곧 평가 점수가 되는 구조에서는, 높은 목표에 도전하기보다 낮은 목표를 확실히 채우는 편이 개인에게 유리해집니다.
개인 입장에서는 전혀 이상한 행동이 아닙니다. 평가받는 대로 일하는 것 뿐이니까요. 문제는 이 개인적으로 합리적인 선택들이 모였을 때, 조직 곳곳에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데 있습니다.
개인 차원에서 먼저 나타납니다. 가장 흔한 건 KPI 외 업무를 경시하는 현상입니다. 점수로 잡히지 않는 일, 이를테면 회색지대(Gray Zone)의 업무나 궂은일은 뒤로 밀립니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인데, 아무도 자기 KPI로 가져가려 하지 않습니다.
협업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서로 얽힌 일을 두고 "그건 제 KPI가 아니라서요"라는 말이 나옵니다. 내 점수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굳이 나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조직 전체로 보면 분명히 함께 해야 할 일인데, 점수화가 그 협업의 동기를 깎아버립니다.
저는 이 부작용들의 뿌리가 개인의 기여와 결과 지표 사이의 거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업과 같은 현장직은 이 거리가 가깝습니다. 미팅 건수 같은 중간 지표가 있긴 하지만, 그 과정을 잘 해냈다면 결국 매출로 나타나야 정상입니다. 과정이 결과로 수렴하는 구조이니, 매출로 평가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스탭은 다릅니다. 전환율을 높이는 일만 해도 누구는 데이터를 분석하고, 누구는 프로세스를 고치고, 누구는 외부와 협의합니다. 거기에 시장 상황이나 타 부서 협조 같은 외부 변수까지 끼어듭니다. 결과에는 본인의 기여만이 아니라 남의 기여와 우연이 뒤섞여 있습니다. 위와 같은 상황들을 무시하고 결과만으로 점수를 매기는 순간, 앞서 본 부작용들이 따라옵니다.
먼저 분명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 정답은 없습니다. 조직마다 일의 성격도, 영향력과의 거리도 다릅니다. 아래는 처방이 아니라, 조직 상황에 따라 골라 쓸 선택지에 가깝습니다.
(저희도 참 오랜기간 다양한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시도했습니다…ㅎㅎ)
KPI 외 요소를 함께 반영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협업, 태도, 과정에서의 기여를 KPI와 나란히 두는 것입니다. KPI를 최종 점수가 아니라 중간 과정으로 해석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달성 여부를 그대로 점수화하는 대신, 그 과정에서 무엇을 기여했는지를 별도로 보는 겁니다. 조직 간 KPI를 미리 맞춰보는 자리를 두는 방법도 있습니다. 부딪히기 전에 같은 방향을 향하는지 조율하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KPI 난이도를 보정하거나, 협업 기여를 별도 항목으로 두거나, 직군에 따라 반영 비중을 다르게 가져갈 수 있습니다. 결과 지표는 팀 단위로 공유하고 개인 평가는 그 안의 기여로 나누는 방식, 목표를 위에서 내리지 않고 개인이 초안을 잡아 합의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방법이 옳으냐가 아닙니다. 우리 조직의 일이 결과와 얼마나 가깝고 먼지를 먼저 보고, 그 거리에 맞는 방식을 고르는 것입니다. 연결고리가 가까운 조직이라면 비중 조정으로 충분할 수 있고, 협업 의존이 높은 조직이라면 팀 평가와 개인 기여를 나누는 쪽이, 평가 반발이 큰 조직이라면 목표를 함께 정하는 것부터가 나을 수 있습니다.
KPI는 여전히 좋은 도구입니다. 이 글은 KPI를 버리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방향을 가리키는 도구로서 KPI는 앞으로도 필요합니다. 다시 봐야 하는 것은 KPI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올바르게 평가에 반영할 수 있을지 입니다. 결과와 개인의 거리가 먼데도 결과만으로 점수를 매기면, 사람은 점수에 매몰되고 조직은 곳곳에서 부작용을 겪습니다.
그렇다고 점수화를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점수로 평가하고자 한다면, 그 부작용을 상쇄할 보조장치를 함께 두면 됩니다. 협업 기여를 따로 보고, 과정을 들여다보고, 조직 간 KPI를 조율하는 장치들이 그 역할을 합니다. KPI를 점수화하되, 그 한계를 메우는 설계를 함께 얹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조직의 일에 맞게 완성도를 높여가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