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저녁 7시, 서울 시내 한 교육장에 20여 명의 남성들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학습'을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유엔여성기구와 사단법인 루트임팩트가 공동 개최한 '아버지 돌봄학교(Papa School)'에 참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진 : 루트임팩트>
다섯 살 아이의 아버지가 된 지 5년차. 아이에 대한 사랑은 충분했지만, 훈육의 경계선을 어디에 둘지, 어떻게 하면 아이와 평생 친구 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깊어만 갔습니다. 주변의 다른 아버지들도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듯했습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아빠와의 관계가 서먹해지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니 이상했습니다. 회사에서는 신입사원 교육부터 리더십 교육까지 체계적인 역량 강화 프로그램이 존재하지만, 정작 '아버지'라는 역할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처음인 것은 당연한데, 아버지로서의 돌봄 역할에 대해 학습할 기회는 거의 전무했던 것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총 3일로 구성되었습니다. 첫째 날에는 돌봄이 남성과 가족에게 주는 긍정적 영향과 시대에 따른 남성성의 변화를 주제로, 과거 자신이 경험했던 아버지의 모습과 현재 자신의 아버지 역할을 비교 분석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둘째 날은 더욱 구체적이었습니다. 본인과 배우자가 담당하는 돌봄 업무의 유형과 소요 시간을 세밀하게 기록하며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가정 내 돌봄 분담을 개선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들을 모색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행복한 가족, 균형 잡힌 삶, 성장하는 아버지'라는 큰 주제 아래 스트레스 관리 기법, 갈등 상황에서의 해결 방법, 효과적인 가족 소통법 등을 학습했습니다. 특히 기업과 조직 차원에서 일-가정 양립을 지원할 수 있는 정책과 아이디어를 논의하는 시간은 HR 관점에서도 매우 유익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과정이 단순한 '아빠 교육'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남편 스쿨'이자 '아들 스쿨'의 성격도 강했습니다. 아내에 대한 나의 태도, 그리고 아들로서 부모님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프로그램 마지막 날, 참가자들은 '내가 되고 싶은 아버지'를 주제로 비전 보드를 작성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사랑과 웃음, 열정이 넘치는 아빠이자 남편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 막연하게 품고 있던 바람이 구체적인 언어로 형상화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진 : 유엔여성기구 지식ᐧ파트너십센터>
수료증을 받을 때의 감동도 특별했습니다. 직책이나 회사명 대신 '아버지 김민석'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수료증에 적힌 문구도 의미심장했습니다.
“귀하는 가족의 자존감과 유대감, 자녀 및 배우자들의 행복을 위해 아버지로서 돌봄을 배우고 실천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바탕으로, 유엔여성기구와 사단법인 루트임팩트가 공동 개최한 2025 아버지 돌봄 학교를 성공적으로 수료하였기에 이 수료증을 드립니다. 귀하의 노력과 아버지로서의 귀한 여정을 응원합니다.”
이번 경험을 통해 한 가지 확신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어야 직장에서도 진정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ESG 경영이 강조되는 시대에, 성평등과 다양성 실현을 위한 남성 돌봄 역량 강화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습니다.
UN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중 5번 목표인 '성평등 달성'과 8번 목표인 '양질의 일자리와 경제성장'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남성의 돌봄 참여 확대는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높이고, 결과적으로 기업의 인재풀 확대와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집니다.
더욱 주목할 점은 한국 사회에서 아버지들이 여전히 가정과 조직에서 상대적으로 더 강한 의사결정권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의 돌봄 역량이 개인적 차원을 넘어 조직 전체의 문화 변화에도 영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