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금요일엔 야근을 했습니다. 월요일 아침 일찍 있을 회의를 마저 준비하느라, 모니터 앞에서 숫자들과 씨름하고 있었는데요.
일에 너무 빠졌던 거죠. 당장 챙기지 않아도 될 내용들까지 헤집고 있는 스스로를 문득 깨닫고,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싶은 생각에 서둘러 자료를 정리하고 랩탑을 덮었습니다.
’일찍 퇴근하고 카페에서 글이나 쓸 걸..‘
뭔가 굉장히 열심히 한 듯 했지만, 회사를 나서는 마음은 헛헛한 금요일이었습니다.
“부지런을 떨 때 느끼는 만족감은 다른 만족감을 거의 모두 집어삼키기 마련이다.”
19세기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의 말입니다. 많이 바빴던 올 한해, 제 바쁨의 근원이 무엇이었나 생각해봅니다. 분명 일이 많았던 것은 맞지만, 정말 그것 뿐이었을까 하고요.
다들 바쁜 한 해 보내셨겠지요. 연말을 맞아 한숨 돌리는 차원에서, 오늘은 ‘여가’라는 단어를 곱씹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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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는 한자로 ‘남을 여’와 ‘틈 가’ 자를 씁니다. 해야할 일들 사이에 남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레저(Leisure)입니다. 라틴어 어원을 따라가 보면 ‘허용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국 문필가 G.K. 체스터턴은 여가의 형태를 세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1. 무언가를 해도 된다.
2. 무엇이든 해도 된다.
3.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첫 번째 의미는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퇴근 후나 주말처럼 여유있는 시간에 우리는 하고 싶은 무언가를 합니다.
저는 주로 가족들과 시간을 보냅니다. 며칠 전에는 놀이공원에 다녀왔고요, 집에서는 아이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닌텐도를 즐기는 날도 있습니다. 일주일에 두 세번은 아내와 가벼운 러닝을 하고, 어쩌다 혼자 시간을 보낼 땐 책을 읽거나, 좋아하는 OTT 시리즈를 봅니다. 우리나라 현대인들의 평균적인 모습 아닐까 싶은데요.

(카페에서 보낸 모처럼의 자유시간, 얼마나 달콤하던지요…!)
두 번째 의미부터는 조금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엇이든’ 해도 된다, 라니… 왠지 우리의 마음을 쿡, 하고 찌르는 느낌이 있는 정의입니다.
영화배우 류승범 님이 한 방송에서, 화가인 아내와의 에피소드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은 그림을 그리는 아내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느닷없이 ”당신은 왜 그림을 그려?“하고 물었는데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답했습니다.
”어릴적 우리는 모두가 화가였어. 세상의 어린이들을 봐. 모두가 그림을 그리고 있잖아? 그 아름다운 취미를 당신은 멈췄고 나는 멈추지 않았을 뿐이야.”
체스터턴은 ‘가진 재료로 어떤 형태를 만드는 행위’의 즐거움이 오늘날에는 예술가들에게 한정되어버렸다고 이야기합니다. 과거보다 여가를 즐기기 좋은 시대가 되었다는 말은 일정 부분 옳지만, 한편으론 대중들이 사회와 산업의 제안에 종속되어 비슷한 활동들만 하게 된 면이 없지 않다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체스터턴이 주목한 것은 여가의 세 번째 의미였습니다.
“세번 째 형태의 여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가장 소중하고 위안을 주는 순수한 습관으로, 내가 보기에는 퇴화 조짐이 보일 정도까지 무시되고 있다. 세계가 철학을 잃고 새 종교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위(Doing nothing)라는 위대한 작품을 창조하는 예술가가 없고, 후원하는 후원자가 없으며, 숭배하려 몰려드는 군중이 없기 때문이다.”
산책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철학자들이 여럿 있습니다. 칸트는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을 했다고 하고요, 니체 역시 모든 위대한 생각은 걷기에서 나온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체스터턴은 현대 사회가 가벼운 유행과 이데올로기에 쉽게 휘둘리는 이유를, 많은 이들이 효율성만을 추구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법을 잊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습니다. 깊은 사유는 비어있는 순간에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주장들은 여가를 단순한 시간적 의미 이상의 것으로 생각해보게 합니다. 우리 삶에는 얼마나 많은 ‘해야함’들이 존재하던가요. 그 사이에 주어지는 ‘뭐든 해도 되는’ 그리고 ‘무엇도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의 유일한 혜택이자 자유를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누리며 살고 있을까요. 왠지 뒤처지고 낭비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마저도 자기계발이나,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무언가로 꾹꾹 눌러담고 있진 않던가요.
우리는 삶의 주도권을 갖기 위해서 일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합니다. 반면 일하지 않는 순간은 어떤가요? 무엇을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을 것입니다. 다만 일상의 수많은 의무들 틈에 존재하는 그 보석같은 순간의 진짜 주인이 될 때, 우리는 일의 보람과 여가의 풍요를 넘나들며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도 열심히 사셨겠지요. 이 글을 집중해서 읽고 계신 지금은, 부디 자유롭고 주체적인 여가의 순간이었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고맙습니다. :-)
*라르스 스벤젠의 책 <내가 하는 일은 정말 의미가 있을까>를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