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이자 관리자이고, 구성원들에게는 업무 선배이기도 한 제가 늘 힘들어하는 일이 있습니다. 좋은 품질의 업무를 위해 기준을 공유하고 관리하는 일입니다. 기준을 알려주는 것은 필요하지만, 같은 사람에게도 여러 번 말해야 하고 사람이 바뀔 때마다 그 과정을 처음부터 반복해야 했습니다.
제게 이건 절대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같은 설명을 반복할 때마다 시간뿐 아니라 집중력과 의지 같은 자원이 소모됐습니다. 정신적인 체력도 조금씩 닳았습니다. 이런 일이 쌓이면 정작 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 회사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일에 충분한 기력을 쓰지 못했습니다. ‘내가 리더십이 부족한가?’ 하고 자책감에 빠지게 되는 날도 많았습니다.
반복되는 문제가 포착되면 반드시 풀어야 하는 성격인 저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일단 AI와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나의 말과 구성원의 말, 그 대화 속에서 좋은 품질의 업무를 위한 기준을 골라내고 싶어. 다시 쓸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해서, 사람이 따로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일을 시작하는 순간에 자연스럽게 제시되게 하고 싶어. 보고할 때, 협업을 요청할 때, 업무를 넘길 때마다 필요한 기준이 바로 떠오르게.” (AI야! 제발 도와주라)
생각해 보니 회사에는 이미 많은 업무 기준이 있었습니다. “제안서는 현장 이슈부터 써주세요.” “이런 요청은 담당자가 바로 답하지 말고 먼저 공유해 주세요.” 대부분 일을 하다가 나오는 말입니다. 누군가 질문하고, 경험이 있는 사람이 답하면서 그 회사만의 일하는 방식이 드러납니다. 고객을 대하는 태도, 실수를 줄이는 순서, 품질을 판단하는 기준이 이런 짧은 대화 안에 들어 있습니다. 대화가 끝나면 기준도 함께 흘러갔습니다. 채팅방 위로 밀려나거나 통화가 끝난 뒤 누군가의 기억에만 남았습니다.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같은 질문과 설명이 반복됐습니다. 회사에는 경험이 계속 생기고 있었지만, 그 경험이 팀의 공용 자산으로 쌓이는 속도는 더뎠습니다.
매뉴얼을 만드는 시도도 수없이 했습니다. 막상 만들려고 하면 쉽지 않았습니다. 별도의 시간을 마련해야 했고, 지나간 경험과 판단을 다시 떠올려 문장으로 정리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일하는 기준은 매뉴얼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을 때보다 실제 업무가 오가는 순간에 훨씬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발상을 바꾸어 보았습니다. 구성원들이 이미 나누고 있는 소통 데이터에서 업무 기준을 추출하는 것입니다. 이 흐름을 직접 시험해 보기 위해 AI로 작은 앱을 만들었습니다.
메신저 기록이나 메일, 통화 메모를 넣으면 업무 기준으로 보이는 문장을 후보로 찾아줍니다.
사람이 내용을 확인하고 다듬은 뒤 필요한 것만 DB를 구축해 저장합니다.
비슷한 기준이 여러 개 쌓이면 합치기를 제안하고, 서로 다른 내용이 발견되면 어떤 기준을 남길지 다시 살펴보게 합니다.

이 과정은 생각보다 재미있었습니다. 사람의 내면에 있는 가치관은 일하는 방식에 일관되게 나타나지만, 평소에는 뚜렷한 형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화 속에 흩어져 있던 말들이 AI를 거치며 구체적인 업무 기준으로 분화되고, 하나씩 문장과 목록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그 목록을 눈앞에 펼쳐놓고 보니 제가 일을 하면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왔는지도 전보다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구성원에게 전달하기 위해 시작한 작업인데, 정리된 기준이 오히려 저를 다시 가르치는 자료가 되었습니다. 막연하게 알고 있던 제 판단 기준이 뇌리에 다시 선명하게 새겨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추출한 기준은 데이터베이스에 보관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신규 구성원의 온보딩 자료로 묶을 수 있고, 업무 자동화 시스템에 심어야 할 판단 규칙으로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AI 에이전트에게 일을 맡길 때는 우리 회사가 중요하게 여기는 순서와 검토 지점, 예외 조건을 알려주는 재료가 됩니다.
가령 “견적서는 내부 검토 후 발송한다”는 문장은 온보딩 자료에서는 영업 업무의 기본 원칙이 됩니다. 발송 시스템에서는 승인 여부를 확인하는 조건이 되고, AI가 견적 메일을 작성할 때는 승인이 끝나기 전까지 초안만 만들게 하는 규칙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한 번 정리한 기준이 교육과 업무, 시스템을 연결하며 여러 번 사용되기 시작하면 그 효과는 훨씬 커집니다.
물론 모든 대화를 업무 기준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날의 상황에만 해당하는 지시도 있고, 아직 팀에서 합의하지 않은 의견도 있습니다. 어떤 문장을 남기고 어떻게 고칠지는 업무의 맥락을 아는 사람이 판단해야 합니다. 구성원의 소통 데이터를 다루는 만큼 경계도 분명해야 합니다. 어떤 데이터를 사용하고 어디에 활용하는지, 외부 AI로 전송되는 정보가 있는지 구성원이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평가하거나 감시하기 위해 대화를 수집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이미 만들어진 노하우를 필요한 만큼 꺼내 팀의 자산으로 남기는 것이 목적입니다. 대표와 몇몇 숙련자의 기억에 머물던 판단이 팀의 언어로 남고, 그 언어가 새로운 사람의 학습과 업무 시스템의 설계로 이어지는 흐름을 이제는 누구나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도 메신저와 메일, 짧은 통화 속에서 수많은 판단이 오갑니다. 이제는 흘러내리던 말을 붙잡을 수 있으니, 그 다음 순서는 이 기준들이 일하는 순간에 바로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보고를 시작하면 필요한 보고 기준이, 협업을 요청하면 좋은 협업 요청에 필요한 항목이, 업무를 인계하면 빠뜨리지 않아야 할 내용이 자연스럽게 제시되는 방식입니다. 구성원이 매번 문서를 찾아보거나 기억을 더듬지 않아도 일의 흐름 안에서 기준을 만나는 구조를 만들고 있습니다. Chat GPT · Codex를 사용해보니, 새 채팅을 시작하기 전에 메모리에 저장된 정보를 바탕으로 똑똑하게 업무 제안을 해줍니다. 여기에 이 기준들이 자동으로 결합되게 구조를 만들면, 제가 일일이 피드백하지 않아도 구성원들의 업무 품질이 올라갈겁니다. (야호!)
* 이번 썸네일은 일본 모더니즘 포스터의 과감한 여백과 제한된 색, 하나의 사물로 메시지를 압축하는 방식을 참고했습니다. 엉킨 녹음테이프가 릴을 통과한 뒤 평행선으로 정돈되는 장면을 통해, 대화 속 판단과 노하우가 팀의 업무 기준으로 자산화되는 과정을 표현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