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한 임원이 회의실에 혼자 앉아 있다. 모니터에는 AI가 30분 만에 뽑아낸 24페이지짜리 시장 분석 보고서가 떠 있다. 그래프는 깔끔하고 논리에는 빈틈이 없다. 그런데 그는 승인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망설인다.
오늘 다녀온 『Unfinished Human』 북세미나는 이 장면에서 시작했다. 책의 프롤로그에 나오는 장면인데, 진행을 맡은 허진 교수님이 직접 천천히 읽어주셨다. 왜 망설이는 걸까. 네 명의 저자가 각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간 기록이 이 책이라고 한다.
저자는 모두 SKmySUNI에서 전문 교수로 함께 일하며 인연을 맺은 분들이다. 같이 의미 있는 걸 하나 남겨보자는 이야기가 책으로 이어졌다고. 윤현 교수님은 "처음엔 다들 안 쓰실 줄 알았는데 너무 열심히 쓰셔서 저도 어쩔 수 없이 열심히 썼다"고 해서 시작부터 웃음이 터졌다.
책은 네 파트로 되어 있다. 개인의 사고와 역량(1부), 일과 조직(2부), 초고령 사회의 돌봄(3부), 피지컬 AI와 몸(4부). 개인에서 조직으로, 사회로, 그리고 존재의 문제로 시야가 점점 넓어지는 구성이다.
AI 책을 쓰는 건 정말 어렵다는 고백도 기억에 남는다. 오늘 쓴 내용이 내일이면 낡아버리니까. 4부를 쓴 손혁 교수님은 발표 직전까지 원고를 고치고 계셨다고 한다.
윤현
삼성전자와 SK에서 30년간 HR과 조직혁신 분야를 경험한 전문가로, AI 역량 강화, 디지털 학습체계, Skill-based Career Development를 설계해 왔다. 현재는 SK mySUNI 전문교수단에서 AI 시대의 새로운 역량 모델과 커리어 혁신을 연구하고 있다.
윤현 교수님은 삼성전자와 SK에서 HR, 변화관리, 혁신 일을 오래 하셨고, 마지막 8년은 기업 구성원의 AI 역량을 키우는 일을 하셨다. 2016~17년쯤 AI 아카데미를 처음 만들 때는 뭘 가르쳐야 할지도 애매해서 빅데이터 강의를 끌어다 썼다는 얘기가 재밌었다.
교수님이 던진 질문은 단순했다. AI가 이렇게 다 잘해주면, 사람은 뭘 잘해야 하나. 대리·과장 시절엔 보고서 잘 쓰는 사람이 부서의 보물이었는데, 그런 시대는 끝난 지 꽤 됐다고. 교수님이 책에 쓴 문장 하나가 오래 남는다. AI는 30초 만에 1만 페이지를 읽고 요약하는데, 사람은 30초 만에 딴생각을 한다.
속도로 경쟁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대신 같은 자료를 보고 "우리가 지금 맞는 문제를 풀고 있나?", "여러 옵션 중 뭘 기준으로 하나를 고를까?"를 묻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1부 제목에 '해체'라는 센 단어가 들어간 이유도 그거였다. 역량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까지 알던 방식대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교수님이 다시 정의한 개념 두 가지가 특히 와닿았다.
판단은 정답을 고르는 능력이 아니다. 무엇을 중요하게 볼지 기준을 세우고, 기준끼리 부딪힐 때 우선순위를 정하고, 고른 것에 책임을 지는 일이다. 다만 무한 책임이 아니라 "이런 조건에서 내린 결정이니 여기까지는 내가 책임진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공감은 "이해합니다"라는 말로 끝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경험이 내 판단이나 행동을 실제로 바꿔야 진짜 공감이다. 회의 결론이든 일하는 방식이든 뭔가 달라져야 한다.
제목 '언피니시드 휴먼'에 대한 해석도 좋았다. 결핍이 아니라 아직 자랄 여지가 남아 있다는 뜻으로 읽었다고. 프롬프트 잘 쓰는 법에 머문 AI 리터러시를 넘어서, AI가 만든 결과물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고민하는 '리터러시 2.0'으로 가자는 게 1부의 마무리였다.

허진
LG · SK 두 그룹의 싱크탱크에서 20여 년간 인사조직 연구/컨설팅 및 그룹의 전사적 혁신(Deep Change)을 설계해 온 경영 혁신 전문가다. 현재 인하대학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혁신의 시간』 『중국 1등기업의 4가지 비밀』이 있다.
허진 교수님은 시작하자마자 손을 들어보라고 하셨다. 지난 일주일 동안 업무에 AI 쓴 분? 전원이 손을 들었다. AI 쓰면서 회의나 보고 방식도 바뀌었다는 분? 절반쯤 내렸다. AI 때문에 내 일, 평가, 조직 단위까지 바뀌었다는 분? 네 명 남았다.
남은 분 중 한 분은 IT 팀장에서 AX 팀장이 되셨는데, 보고서를 볼 때 'AI 특유의 질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래서 평가의 평균선 자체가 올라간 느낌이라고. 공감 가는 표현이었다.
교수님은 LG경제연구원과 SK경영경제연구소에서 30년 가까이 그룹 차원의 변화를 계열사에 심는 일을 하셨다. 호봉제를 연봉제로 바꾸는 컨설팅, BSC, 역량 기반 HR까지 다 겪으면서 늘 같은 걸 봤다고 한다. 도구는 빨리 들어오는데, 그 도구가 돌아가야 할 일과 조직은 안 바뀐다. 이번 AI도 똑같다.
2부의 관점은 이렇게 정리된다.
일을 쪼개고 있는 건 사람이 아니라 AI다. AI는 계산하기 좋게 잘게 나뉜 구조를 좋아하고, 사람은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며 따라가고 있다. 그러니 일은 앞으로 더 빠르게 쪼개질 것이다.
리더는 쪼개진 일을 다시 조합해야 한다. 다만 예전 방식으로는 안 맞는다. 자기 의도를 갖고 조직에 맞게 새로 엮어야 한다. 개인 효율은 올랐는데 조직 생산성은 안 오르는 '생산성의 역설'을 푸는 게 리더 몫이다.
HR은 부서진 제도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 채용, 평가, 보상이 AI가 만들어내는 사람 데이터 때문에 하나씩 해체되고 있다. 예전 프로세스를 그대로 돌리면 안 돌아간다.
규제는 결국 "누가 책임질 건데?"를 묻는다. 어디까지 사람이 책임지고 어디까지 AI에 맡기는지 선을 긋는 일이다. EU는 가이드라인을 미리 촘촘히 정해 따르는지를 보고, 미국은 문제가 생기면 기업이 책임 없음을 입증하게 하는 쪽이다. 한국은 EU 쪽에 가깝다고. 나중에 다시 손대는 이중 작업을 피하려면 가이드라인을 미리 파악해 두는 게 좋다.
결국 넷 다 '재조합'이라는 한 축으로 돌아간다는 얘기다. 직무나 호칭을 스킬 단위처럼 사람과 AI 양쪽에 붙일 수 있는 단위로 바꿔두면 재조합이 쉬워진다는 실무 팁도 있었다.
상담을 전부 AI로 돌렸다가 문제가 생겨 다시 사람을 뽑은 클라르나 사례도 언급됐다. AI가 쪼개는 대로 따라가는 게 정답은 아니라는 것. 중간관리자가 줄어든다는 말과 더 중요해진다는 말이 동시에 나오는 지금, 정답 없는 상태에서 계속 실험해보는 것 자체가 '언피니시드 휴먼'의 역할이라는 게 교수님 결론이었다.

전의종
SK그룹에서 글로벌 전략과 사업개발 업무를 수행했고, 이후 SK mySUNI 전문교수 및 연세대학교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UC Berkeley에서 MBA를 취득했고, 홍익대학교 박사과정에서 기술과 사회 변화가 만드는 질문들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3부 저자인 전의종 교수님은 SK에서 전략투자, 사업개발, M&A를 하다가 퇴직 후 경영학 박사과정에서 돌봄과 사회적 기업을 공부하고 계신다. 이 주제를 잡은 계기는 아주 개인적이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어떻게 돌봐드려야 하나, 그리고 나는 나중에 누가 돌봐주나. 태어나 돌봄을 받고, 누군가를 돌보고, 다시 돌봄을 받는 순환에서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얘기에 객석이 조용해졌다.
한국은 2024년 12월 65세 이상 인구가 20%를 넘어 초고령 사회에 들어섰다. 고령 사회에서 초고령 사회까지 프랑스는 40년, 일본은 12년 걸렸는데 한국은 7년이었다. 교수님은 지금의 상황을 경제, 돌봄, 존엄성의 '3중 위기'로 묶었다. 노인 빈곤율은 OECD 평균의 두 배를 넘고, 돌봄 인력은 부족해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노노케어'가 늘고, 고립과 높은 노인 자살률이 존엄성을 위협한다. 가난하니 돌봄을 못 받고, 돌봄을 못 받으니 고립되고, 다시 가난해지는 악순환이다.
여기서 AI가 할 수 있는 일을 건강, 일상, 정서, 경제, 돌봄 다섯 영역으로 나눠 사례를 보여주셨다. 카메라 없이 레이더로 낙상을 감지하는 서비스, 넘어지는 순간 에어백이 터지는 벨트, 자율주행 휠체어, 국내 지자체에서 보급 중인 돌봄 로봇 '효돌이' 같은 것들이다. 효돌이를 안고 다니는 어르신 사진은 좀 짠했다. 네덜란드의 뷔르트조르흐(Buurtzorg) 모델처럼, AI가 서류 일을 덜어주고 사람은 어르신 곁에서 차 한 잔 마시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방향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교수님이 특히 강조한 건 세 가지다.
세분화. 지금은 노인 정책이 소득이나 재산 하나로만 나뉜다. 인지·신체 건강, 경제력, 디지털 역량을 같이 보면 자원이 정말 필요한 곳으로 간다. 다 갖춘 '자기주도형' 노인은 민간 시장에 맡기고, 몸은 건강한데 인지 지원이 필요한 분께는 맞춤형으로 선별 지원하는 식이다.
AI 리터러시의 역설. AI를 잘 모를수록 오히려 마법처럼 느껴 잘 받아들인다는 연구가 있다고 한다. 노인이라 못 쓰실 거라는 편견은 버려야 하지만, 그만큼 검증할 힘이 약하다는 점도 같이 봐야 한다.
사용자 관점. 목걸이형 응급 호출기는 부끄럽다고 잘 안 차시다가 시계형으로 바꾸니 착용률이 올랐다는 사례. 쉽게 쓰되 속지 않게 하는 '마법적 단순함'이 설계 원칙이다.
70대에도 새 일을 하고, 80대에 지혜를 나누고, 90대에도 세상과 연결된 채 살고 싶다는 교수님의 바람으로 3부가 끝났다.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는 첫 세대일 수도 있다는 말이 오래 남았다.

손혁
서울 중구에서 태어나서 법학, 국제 경영학, 기술 정책학, 제조 공학과 AI Product 개발 과정을 공부하였고, 미국, 중국, 일본, 독일에서 자동차, 패션, 정보통신, 신에너지 산업 분야의 첨단 기술 사업화 및 신사업 투자에 관련된 일을 35년째 하고 있다.
손혁 교수님은 현업 마지막 2년을 휴머노이드용 배터리 프로젝트에 쏟으셨다고 한다. 처음엔 피지컬 AI 기술 동향과 주요 플레이어를 신나게 정리하다가 올해 초 포기하셨단다. 2주마다 내용이 바뀌어서, 책이 나올 때쯤이면 몇 년 전 얘기가 될 것 같았다고.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질문을 붙잡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강연은 역사에서 출발했다. 지능은 책상 위 연산이 아니라 실제 환경과 부딪히며 생긴다고 믿었던 초기 연구자들, 그리고 걷는 것 하나에 20년을 매달린 끝에 2000년 아시모를 내놓은 혼다의 엔지니어들. 지금 휴머노이드의 기본 골격이 사실상 그때 만들어졌다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게 진짜 지능인가", "로봇이 일자리를 뺏을까" 같은 질문은 요즘 생긴 게 아니라 수십 년 전부터 꾸준히 논의돼 왔다고 한다.
가장 무겁게 들린 건 전쟁 이야기였다. 휴머노이드보다 먼저, 피지컬 AI는 이미 전장에서 쓰이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재밍을 피하려고 광섬유를 단 드론을 날리고, 이제는 AI를 탑재해 목표만 주고 스스로 판단하게 한다. 그 판단이 민간인을 향했을 때 의도인지 실수인지조차 알 수 없다는 게 문제다. 화면 속 AI의 환각은 틀린 답 하나지만, 몸을 가진 AI의 환각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그러니 앞에서 세 분이 말한 "판단은 사람이 한다"는 전제가 피지컬 AI 앞에서도 유지될 수 있을지, 교수님은 열린 질문으로 남겨두셨다. AI에 판단을 맡길수록 생각하며 겪는 '지적 마찰'이 사라지고 인지적 다양성이 줄어든다는 경고도 같은 맥락이었다.
일자리 얘기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자동화가 사람을 대체하는 효과가 더 클 거라는 연구가 오래 주류였지만, 최근 분석에선 농업·건설·채굴 같은 현장 일을 휴머노이드가 같은 비용으로 대신하기엔 아직 멀었다는 결과도 나온다. 중국 마트에서 100만 원대 휴머노이드를 살 수 있다는 얘기에 객석이 술렁였지만, 실제로 얼마나, 어떤 일자리를 대체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휴머노이드를 반려동물로 볼지, 법인처럼 볼지, 인격을 줘야 할지. 결론은 이거였다. 피지컬 AI의 등장은 AI가 몸 하나 얻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고, 그 질문들은 이제 막 본격적으로 우리 삶에 들어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