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에겐 생존의 문제이기에 굉장히 조심스러운 주제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경험해 본 적 없지만, 유럽에서 경험하게 된 것은?
정답은 '전쟁'이다.
K-pop 이 알려지면서 이미지가 많이 나아졌지만, 한국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은 늘 위험한 나라다. 뉴스에서 접한 정보는 북한, DMZ, 김정은, 미사일 정도.
작년이었나, 북한에서 오물풍선이 날아온다는 소식에 유럽 동료들은 사뭇 진지하게 내 가족의 안부를 묻곤 했다. 정작 그 땅에서 온 나는 단 한 번도 전쟁을 실체적으로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북핵 이슈 있을때마다 대사관 공지를 확인하거나 한국법인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expat 에게 International SOS 연락처를 전달해주는 정도가 실무에서 경험한 전쟁의 위협이었다.
2021년 유럽인사총괄로 부임한 이후, 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부터 이스라엘-하마스 분쟁, 그리고 최근 중동의 확전 위기에 대응해왔다. TV 뉴스에서 본, 막연히 남일이었던 지정학적 리스크가, 이제는 내 책상 위 시급한 '인사 현안'이라니.
어느날 갑자기 전쟁이 나면 인사는 무엇을 해야 할까?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속보가 전해지자 내 이메일로 전 유럽의 직원들로부터 이메일이 쏟아졌다.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느냐", "지금 당장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는.
각자의 선의 발로였겠으나, 갑자기 쏟아지는 이메일 쓰나미는 유럽 생활에 적응하기도 바빴던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자 스트레스였다. 당시를 생각하면 당혹감과 긴장감에 여전히 심장이 쿵쾅댄다.
전쟁이 터지면 기업은 비즈니스의 지속성을 위해 즉각 움직인다. 전사 차원에서 각 분야별 임원들과 글로벌 Task Force Team 을 구성해 BCP(Business Continuity Plan)를 위한 긴급 대응 체계를 구축했다. 핵심 기능 유지,직원 안전 확보, 인력운영 대책, 공급망 점검, 설비, 인프라, 데이터 보호 등 모든 조치를 신속하지만 신중하게 수행해야한다. 그러나, 포격이 일상화된 상황에서는 자본과 시스템이 보장하던 모든 통제력이 무력화된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지점이 반드시 찾아온다. 생명을 위협받는 극단의 공포 앞에서는 그 어떤 고액의 보상도 동력을 잃는다. 물리적 보안을 위한 순찰이나 경비, 기본적인 건물 관리조차 불가능해진다.
본 글에서는 비즈니스 운영, 서스테이너빌리티 유지의 기술적인 측면보다 인사책임자로서의 딜레마를 다뤄보고자 한다.
결정의 무게와 회사의 가치(Value principle)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내 하루는 매일 아침 상황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실무는 현지 인사팀이 맡지만, 유럽 전체 수십 개 법인의 역량을 모아 직원을 어떻게 보호하고 지원할지 결정하고 지시하는 책임은 내게 있었다. 긴박함과 긴장감, 딜레마의 연속이었고, 이런 질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 위기상황에서 직원 보호에 대한 회사의 역할범위는 어디까지 인가?
- 기업의 결정과 국가의 결정, 개인의 신념 사이에서의 우리의 입장은?
- 인도주의적 차원에서의 지원은 어느선이 적절한가?
- 유럽의 역사적, 지리적 특수성으로 인해 사람들이 회사에 더 많은 역할을 기대하는 것일까?
- 만약에 한국에 위기 상황이 발생할 경우, 한국 직원들도 회사의 대피/망명 지원을 기대할까?
지금껏 나는 회사와 직원의 관계가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계약적 거래관계' 라고 믿어왔다. 본국에서 파견된 주재원이 아닌 현지 직원을 위험에서 보호하는 일은 사실 계약서 어디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전쟁과 같은 극단의 위기상황에서, 직원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포함된 절박한 구조요청을 마주하며, 내 결정이 의도하지 않게 누군가의 생존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기도했다.
로널드 하이페츠(Ronald Heifetz) 교수는 위기 시 리더의 역할이 정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길을 잃지 않도록 '북극성(North Star)' 같은 가치를 지켜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행스럽게도 '인간 존중'의 가치와 '직원의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우리 회사의 확고한 경영 철학은그 무엇보다 강력한 결정의 근거가 되었다. 예전에 읽었던 사이먼 시넥의 책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Leaders Eat Last. Simon Sinek> 에서 그냥 ‘음 좋은 이야기군”하며 읽고 넘긴 구절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리더가 구성원의 안전과 생명을 최우선으로 선택할때, 사람들은 외부 위협에 맞서기 위해 자신들의 재능과 힘을 합친다” (“When a leader makes the choice to put the safety and lives of the people inside the organization first, the people combine their talents and their strength to face the dangers outside.” )
지금 돌이켜보면 직원을 보호하는 것은 비용 지출 이상의 의미였다. 위기 속에서 조직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비즈니스 연속성(BCP)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균형의 난제: 연대와 인간성, 정치적 중립
전쟁 속에서 동료들이 보여준 연대는 경이로웠다. 유럽 직원들은 본인이 위험에 처할 수 있음에도 국경으로 달려가 동료들을 맞이했고, 자신들의 집 한켠을 피난민들에게 내어주었다. 타인이 보여주는 인류애에 감탄하며 나의 인류애는 어느 선까지 발휘될 것인지 자문했다.
시간이 지나자 다양한 갈등과 또다른 딜레마가 발생했다. 기업의 자원은 유한하다. 누군가는 고국을 떠났고, 누군가는 자신의 선택으로 고국에 남았다. 호의로 시작된 선행이 어느 순간 권리로 인식되는 아슬아슬한 경계적 상황이 생기고, 개인의 삶에 회사와 동료가 깊게 관여하게 되면서 예상치 못한 갈등도 발생했다.
전산 시스템이 작동 안할 경우의 급여 지급, 징병된 직원의 보상 처리, 핵심인력 이주 지원, 비자 등 행정적 처리 문제는 오히려 크게 어렵지 않았다.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인도적 지원과 형평성을 사이에서 지원 범위를 설정하는 일이었다. 특히나 전쟁이 장기화 할수록 기업 경영의 본질적 목적이 고개를 들고, 제한된 자원 속에서 사람들의 무관심과 스트레스 또한 의사결정의 변수로 작용했다.
사내에서 벌어지는 이념과 감정의 충돌도 있었다. 유럽에는 이민자도 많고,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만큼, HR이 지켜야 할 자리는 철저한 '정치적 중립'이었다. 원래도 회사에서 정치 이야기를 피하는 불문율이 있지만, 공식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정치적 외교적으로 중립적인지, 그러면서도 모든 직원들이 동일하게 보호받고 있는 믿음을 주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오늘 다시 중동 분쟁의 확전 상황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인사(HR) 리더의 고민은 결국 세 가지 축의 균형으로 귀결된다. 수익성이라는 비즈니스 본연의 목적,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인간 존엄의 가치, 그리고 위기 시에 더욱 원활히 작동해야 하는 기업의 핵심 철학(Value)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일이다.
몇 차례의 전쟁 대응을 거치며 체득한 나의 역할은 '전략적 리스크 관리자' 이다. 조직문화, 핵심 가치 등 우리가 평소에 수행하는 일반적인 HR업무의 기반은 사실 위기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일상의 작고 반복적인 경험 속에서 쌓아온 조직 문화는 위기 시에 직원들의 무의식 속에서 '시스템이 인간을 존중한다'는 확신과 신념을 작동시킨다. 어찌보면, 대단히 철학적이고 동시에 극도록 본질적인 작업이다.
"The ultimate measure of a man is not where he stands in moments of comfort and convenience, but where he stands at times of challenge and controversy."
Martin Luther King Jr. Strength to Love (1963)
정답이 없는 위기 상황에서 나는 수십 번씩 스스로에게 판단 기준을 비춰 묻는다.
"위기의 현장에서, 우리조직은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가? 인간 존중의 가치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 (In a crisis where the celebrations have vanished, what is your organization's priority? Is the value of human dignity truly functioning?)
조속히 이번 사태가 마무리되기를 바라며 이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