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짜리 신규 과제의 담당자를 정하는 회의가 열린다. 후보로 오르내리는 이름들 사이에, 그 분야를 가장 오래 다뤄 온 사람의 이름은 없다. 그를 빼자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대한 사람도, 이유를 설명한 사람도 없었다. 과제가 끝날 무렵이면 그는 이미 회사에 없으리라는 계산이, 한 번도 말해지지 않은 채 회의실을 지나갔을 뿐이다. 회의는 순조로웠고 결정은 합리적이었으며,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문제는 바로 그 점이다.
이런 장면은 특별하지 않다. 교육 대상자를 고를 때, 해외 파견자를 정할 때, 신사업 조직을 꾸릴 때, 같은 계산이 같은 방식으로 조용히 끼어든다. 누구의 지시도, 문서화된 기준도 없지만 결과는 놀라울 만큼 일관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개인의 판단이라기보다 조직이 공유하는 하나의 규칙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이 연재는 그 규칙을 '퇴장 전제(Anticipated-Exit Assumption)'라고 부르려 한다. 정년까지 남은 기간이 짧다는 사실을 근거로, 기회와 역할과 투자와 피드백의 배분을 미리 줄이는 암묵적 판단 규칙이다. 핵심은 '미리'라는 말에 있다. 퇴장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조직의 자원 배분은 이미 그 사람이 떠난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람은 남아 있는데 자리가 먼저 비워지는 셈이다.
이름을 붙이는 일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이름 없는 규칙은 논의될 수 없고, 논의되지 않는 규칙은 바뀌지 않는다. 지금까지 이 현상은 흔히 '연령 차별'이나 '세대 갈등'이라는 익숙한 이름으로 불려 왔다. 그러나 그 이름들로는 정체의 절반만 설명된다.
퇴장 전제는 연령주의와 결과가 닮았지만 작동 방식이 다르다. 연령주의는 능력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출발한다. 나이가 들면 배우는 속도가 느리고, 변화에 둔하고, 새로운 도구를 다루지 못한다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의 상당수는 실증 연구에서 근거를 찾기 어렵다. 반면 퇴장 전제는 능력에 대해 아무것도 가정하지 않는다. 그가 얼마나 유능한지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남은 시간이다. 교육에 투자해도 회수할 기간이 짧고, 장기 과제를 맡겨도 끝을 보지 못하리라는 계산이다.
이 차이가 처방을 바꾼다. 편견은 인식을 바꾸면 줄어든다. 그러나 계산은 인식을 바꿔도 그대로 남는다. 어떤 편견도 없는 리더, 선배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리더도 한정된 교육 정원 앞에서는 남은 기간이 긴 사람을 먼저 고른다. 그것이 자원을 아끼는 합리적 판단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전제를 실행하는 사람 대부분은 악의가 아니라 배려나 효율의 의도로 움직인다. 무리하지 마시라는 말, 부담 드리지 않겠다는 말, 이번엔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자는 말이 모두 같은 계산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그래서 인식 개선 캠페인은 이 문제 앞에서 번번이 헛돈다. 세대 존중 교육을 아무리 반복해도 배분 기준이 그대로라면 결과도 그대로다. 선의를 전제하고도 결과가 같다면,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규칙에 있다.
퇴장 전제는 한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같은 계산이 영역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등장한다.
교육에서는 투자 회수 기간이라는 얼굴이다. 정원이 한정되면 남은 기간이 긴 사람부터 채워진다. 역할에서는 완결 시점이라는 얼굴이다. 끝을 보지 못할 사람에게 장기 과제와 신사업은 돌아가지 않는다. 평가에서는 기대의 철회라는 얼굴이다. 앞으로 나아지리라 기대하지 않으니 피드백이 사라진다. 관계에서는 짧은 유효기간이라는 얼굴이다. 관계가 오래가지 않으리라 여기니 비공식적인 대화와 정보의 흐름에서 조금씩 밀려난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당사자 자신의 얼굴이다. 이 계산은 결국 본인에게도 내면화된다. 이제 와서 새로 배워 무엇 하나, 괜히 나서서 후배 앞길을 막는 건 아닌가. 발언을 줄이고, 도전을 미루고, 이동을 포기하는 자기 검열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다. 같은 전제가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자리다. 이 연재의 다음 편들은 이 다섯 개의 얼굴을 하나씩 들여다볼 것이다.
퇴장 전제가 끈질긴 데에는 이유가 있다. 스스로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로버트 머턴은 자기충족적 예언을 설명하며 한 은행 이야기를 꺼낸다. 멀쩡하던 은행에 곧 무너진다는 소문이 돈다. 예금자들이 창구로 몰려들고, 예금이 한꺼번에 빠져나가자 은행은 정말로 무너진다. 처음의 소문은 틀렸지만, 소문을 믿은 사람들의 행동이 그 소문을 사실로 만들었다. 머턴은 이를 잘못된 상황 정의가 새로운 행동을 불러내고, 그 행동이 처음의 잘못된 믿음을 참으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예언자는 나중에 벌어진 일을 들어, 자신이 처음부터 옳았다고 말한다.
퇴장 전제도 같은 경로를 밟는다. 곧 나갈 사람이라고 여겨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는다. 중요한 일이 없으니 기여가 줄어든다. 줄어든 기여를 보며 조직은 역시 그렇다고 확인한다. '일을 주지 않았는데, 일을 하지 않으니 역시 그렇다'는 순환이다. 몇 해가 지나면 처음에 무엇이 원인이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남는 것은 '저분들은 원래 그렇다'는 결론뿐이다.
이 순환이 무서운 것은 관찰자가 틀리지 않았다는 데 있다. 실제로 기여는 줄었고, 실제로 의욕은 식었다. 데이터는 정확하다. 다만 그 데이터가 무엇을 측정했는지를 잘못 읽었을 뿐이다. 거기 찍힌 것은 사람의 한계가 아니라, 거둬들인 기회의 크기였다.
퇴장 전제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비대칭이 하나 더 있다. 투자와 보상에 서로 다른 잣대를 쓴다는 점이다.
교육이나 역할을 배분할 때 조직은 앞으로 남은 기간을 본다. 얼마나 더 머물 것인가. 그런데 보상이 정당한지를 따질 때는 올해의 산출을 본다. 올해 얼마나 해냈는가. 투자는 미래로 재고, 보상은 현재로 잰다. 1편에서 생애 단위의 계약을 한 해의 단면으로 잘라 재는 문제를 짚었는데, 여기서 그 단면은 한층 불리하게 잘린다. 기회는 남은 시간이 짧다는 이유로 줄이고, 보상은 올해 성과가 낮다는 이유로 문제 삼는다. 앞의 결정이 뒤의 결과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회계의 언어로 옮기면 더 선명해진다. 조직은 고경력자를 자산으로 분류해 두고, 운영에서는 그 가치를 실제 쓰임이 아니라 남은 재직 기간에 맞춰 미리 깎아 내린다. 설비라면 사용 가능한 기간이 늘어났을 때 상각 계획을 다시 세운다. 정년이 늘어나는 지금, 사람에 대한 상각표만은 여전히 옛날 그대로다.
그렇다면 이 순환은 어디서 끊을 수 있는가. 퇴장 전제가 작동하는 지점은 크게 셋이다.
첫째는 규칙이다. 남은 기간을 기회를 거둘 이유로 쓰는 관행을 멈추고, 남은 기간에 맞는 역할을 따로 설계하는 기준으로 바꿔야 한다. 남은 시간이 짧다는 것은 기회를 줄일 근거가 아니라 역할을 다르게 짤 조건이다. 첫 장면의 회의로 돌아가 보면, 물어야 할 것은 누가 3년을 채울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이 과제의 어느 구간에 누구의 경험이 가장 필요한가다. 과제의 초기 설계와 위험 검토, 지난 실패의 복기는 그 분야를 가장 오래 다뤄 온 사람이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이다. 그가 끝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가 시작을 가장 잘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지우지는 못한다.
둘째는 내면화다. 당사자가 같은 계산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검열하는 고리를 끊어야 한다. 셋째는 실행이다. 배분을 실제로 결정하는 사람은 현장의 리더다. 기준이 바뀌어도 리더의 판단이 그대로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세 지점 가운데 하나만 건드려서는 순환이 멈추지 않는다. 기준을 바꿔도 리더가 예전 방식으로 배분하면 무력해지고, 리더를 교육해도 기준이 그대로면 오래가지 못한다. 당사자의 마음을 다독이는 프로그램은 앞의 둘이 따라오지 않는 한 위로에 그친다.
그리고 이 세 지점이 모두 교차하는 자리에 HR이 있다. 교육 대상자 선정 기준을 만들고, 인사 기록 양식을 설계하고, 배치 검토 절차를 운영하는 곳이 HR이다. 퇴장 전제는 누군가의 머릿속에만 있지 않다. HR이 만든 문서의 빈칸과 기본값 속에도 살고 있다. 다음 글은 그 문서들 가운데 가장 먼저 들여다봐야 할 것, 교육 정원표에서 시작한다.
인생여행자 정연이 건네는 질문
우리 조직의 인사 결정 가운데 '남은 재직 기간'이 판단 근거로 쓰이는 곳은 어디일까. 교육 대상자 선정, 장기 과제 배정, 해외 파견, 핵심 직무 배치의 기준을 한번 펼쳐 보자. 문서에 적혀 있지 않다면 지난 1년의 실제 명단에서 연령 분포를 살펴보면 된다. 규칙은 문서보다 결과에 더 정직하게 남는다.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③교육 정원표는 누구의 미래를 계산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