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8년 5월, 태종은 열아흐레 간격으로 두 가지 일을 했다.
먼저 5월 11일, 판한성부사 황희를 불러 파직했다. 파직하며 태종이 꺼낸 것은 수년 전의 일이었다. 세자 양녕의 비행을 감싸며 "구종수의 한 짓은 매와 개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던 그 말. 태종은 그 눈물을 가슴에 담아두었다가 몇 년 만에 꺼냈다. 황희는 파주 교하를 거쳐 남원으로 내려갔다. 다만 태종은 그를 죄인처럼 압송은 하지 않았다. 버린 것이 아니었다.
5월 30일, 세자 양녕의 패만한 상서가 올라왔다. 아버지를 나무라고 한고조를 들어 자신을 변호하는 반항문이었다. 이미 결론은 정해졌다. 6월 2일 조정의 모든 서명이 세자 폐위 상소에 모였다. 의정부, 삼공신, 육조, 대간의 신료들이 일제히 참여했다. 황희의 이름은 없었다. 그는 이미 판 밖에 있었다. 다음날 조계청에서 박은이 택현론을 주도하며 충녕대군이 새 세자로 결정되었다.
바둑에서 백돌과 흑돌은 서로 다른 색으로 같은 판 위에 놓인다. 태종이 쥔 백돌은 박은이었고 흑돌은 황희였다. 태종은 결정적 국면에 앞서 흑돌을 먼저 판 밖으로 내려놓고, 백돌을 중심에 세웠다.

박은을 이해하려면 아버지 박상충에서 시작해야 한다.
고려말인 1375년, 이인임이 북원과의 외교를 재개하려 하자 박상충은 정도전 등과 함께 반대하고 친명외교를 주장했다. 감옥에 갇혀 곤장을 맞고 유배를 가다가 44세에 사망했다. 정도전은 살아남아 조선 건국의 설계자가 되었다. 박상충의 아들 박은은 결국 정도전을 제거하는 밤에 이방원 곁에 섰다. 아버지와 같은 뜻을 가진 동지와 서로 반목하는 편에 선 것이었다.
박은은 1370년에 태어나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여섯 살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직접 기억할 나이도 아니었지만 그 기억이 박은의 뼛속에 새겨진 것처럼 그는 살았다. 외삼촌 이색은 정도전 일파에 의해 내쫓겼고 외사촌들은 죽기까지 했다. 애당초 그는 조선 개국에 반대한 정몽주와 가까운 집안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조선 건국후에도 방관을 전전했다. 열아홉에 문과에 급제했으나 중앙 관직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의 성품은 그때 드러났다. 박은과 앙금이 있던 유양이라는 이가 혐의를 받게 되었을 때 당시 집정(아마도 정도전)이 박은을 사헌시사로 임명해 처벌을 직접 집행하게 만들었다. 박은의 보복을 기대한 것이었다. 집정은 껄끄러운 유양을 박은을 통해 제거코자 한 것이었지만 박은은 서명을 거부했다. "죄 아닌 것을 가지고 사람을 죽음에 빠뜨릴 수 없다." 이에 집정은 박은을 좌천시켰다. 그가 좌천된 벼슬은 지금의 춘천을 다스리는 지춘주사라는 벼슬이었다.

그리고 그는 얼마 뒤인 왕자의 난 때에 춘천의 군사들을 이끌고 태종 이방원의 편에 서 공신이 된다.
명나라 환관 황엄이 사신으로 왔을 때 다른 지방관들은 그의 횡포에 굴복했다. 전라도 관찰사 박은만이 규정대로 대접했다. 황엄이 태종에게 돌아와 아뢰었다. "전하의 충신은 오직 박은뿐입니다." 적의 입에서 나온 그 칭찬이 박은을 중앙으로 이끌었다.

겸판의용순금사사로 있던 태종 13년, 박은은 삼복법 시행을 건의했다. 사형을 집행하기 전 죄상의 진위를 세 차례 중복 확인하는 절차를 법제화하자는 것이었다. 그밖에도 그는 대사헌으로서 좌정승 하륜이 잘못한 바가 있으면 지적했고 하륜이 듣지 않으면 서명하지 않았다. 당대 최고 권신 앞에서도 붓을 내려놓는 사람이었다.
6월 3일 조계청의 장면이 그 원칙의 정점이었다. 태종이 폐세자의 아들로 적통을 잇자고 했을 때 대부분의 신하들이 동의했지만 유정현과 박은만이 거부했다. 박은이 말했다. "아비를 폐하고 그 아들을 세운다는 것이 옛 제도에 있다면 가능하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어진 자를 가려야 합니다." 원칙을 먼저 세우고 그 위에서 왕의 뜻을 밀어주는 방식이었다. 태종이 충녕을 언급하자 박은이 답했다. "신등이 말한 어진 자란 바로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입니다."
세종 4년(1422년) 5월 10일 박은이 눈을 감았다. 향년 53세. 태종이 세상을 뜬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시호는 평도(平度). 강기를 펴 다스리는 것이 평(平)이고 마음이 능히 의를 재량하는 것이 도(度)라 했다. 졸기는 마지막에 이렇게 쓴다. "식견이 밝고 통달하며 활발하고도 너그러우며 의논이 확실하였다. 내외의 직을 역임하여 업적이 심히 많았는데 태상왕이 크게 소중히 여겨 큰일을 의논할 때에는 반드시 그를 참여시켰다."

태종의 총애를 받았던 하륜과 달리 청빈하고 검소하게 살았다고도 전한다. 좌의정이 된 뒤에도 낙산 아래 조그만 집을 짓고 거친 조밥을 먹었다. 실록에도 박은이 치부와 뇌물로 물의를 일으켰다는 기록은 전무하다. 그는 주인의 시대와 하루 차이로 함께 닫혔다. 청렴하고 원칙으로 곧게 섰던 백돌은 판이 끝날 때 함께 거둬졌다.

황희는 복잡한 사람이었다.
1363년에 태어나 1452년에 눈을 감았다. 90세. 그는 조선에서만 태조부터 문종까지 다섯 임금을 모셨다. 영의정 18년, 좌의정 5년, 우의정 1년. 정승으로만 24년. 태종이 발탁하여 지신사(도승지)로 4년간 가장 가까운 자리에 두었던 사람이었다. 그 신임이 구종수 사건 하나로 무너졌다. 태종은 그 말을 몇 년이나 가슴에 담아두었다가 꺼냈다.
그러나 태종은 황희를 버리지 않았다. 몇 년 뒤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세종에게 말했다. "황희를 다시 불러들이라." 태종은 자신이 직접 내쫓은 사람을 자신이 직접 돌려보냈다. 황희가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예순이었다.
세종 치하에서 황희는 전성기를 맞았다. 그의 역할은 균형의 추였다. 세종은 개혁의 목록이 끝이 없었다. 그 추진력이 때로는 현실의 무게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채 앞서 나가기도 했다. 황희는 그 속도를 조율했다.

공법 개혁이 대표적이다. 세종은 풍흉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기존 방식을 바꾸려 했다. 황희는 반대했다. 흉년에 백성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세종은 결국 17만 명 이상이 참여한 전국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황희의 반대가 없었다면 그 긴 숙고의 과정은 없었을 것이다.
황희는 회의석상에서 절대로 먼저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의정이 먼저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의견을 내지 않거나 아부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황희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두루 듣고 마지막에 종합해 의견을 개진했다. 실록에서 그의 졸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일을 의논할 적엔 정대하여 대체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흠결도 컸다. 공적으로는 대쪽 같았지만 가문 앞에서는 무너진 모습이 보인다. 사위 서달이 아전을 폭행해 죽게 한 사건을 은폐하려다 조직적 조작이 발각되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유배로 끝나지 않을 이야기들이다. 그는 또한 승려에게서 뇌물을 받는가하면 자식들이 궁중 창고의 물건을 훔쳤다는 기록도 전한다. 세종이 황희의 사직서를 끊임없이 반려한 것은 그를 정치적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사직을 청한 흠결이 많은 사람을 왕이 직접 현직에 두어야만 지킬 수 있는 아이러니가 있었다.

황희와 김종서의 관계가 세종 시대 권력 구조를 잘 보여준다. 기질이 강하고 직언을 서슴지 않던 '대호' 김종서도 의정부 회의에서 황희가 자리에 앉으면 스스로 몸을 낮추었다. 두려움이 아니라 수십 년 경험에서 나오는 무게 앞에서의 자연스러운 복종이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김종서가 조금 비스듬하게 의자에 앉은 일로 황희에게 혼나자 김종서가 쩔쩔 맸다는 이야기도 전할 정도이다. 이렇듯 세종이 여러 번 황희의 은퇴를 막은 것은 단순한 만류가 아니었다. 황희가 없는 조정에서 세종의 추진력은 속도 조절 장치를 잃게 될 것이었다.
황희가 87세에 마침내 은퇴하고 집으로 돌아간 어느 날 마당에서 삽살개와 눈싸움을 했다. 이전에는 호랑이와 눈싸움을 해도 지지 않는다던 황희의 눈 앞에서 개가 가만히 있자 황희는 한탄했다. "나도 이제는 갈 때가 되었구나." 흑돌도 오래 서 있으면 끝이 닳는다.

태종은 박은과 황희를 같은 쓰임새로 보지 않았다.
태종의 통치 스타일은 제거와 구축이었다. 이숙번을 가두고 민씨 외척을 숙청하고 황희를 내보낸 뒤 박은을 세웠다. 기준은 단 하나였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가 없는가. 통제할 수 있으면 쓰고 통제할 수 없으면 잘랐다. 현대 경영학으로는 거래적 리더십(Transactional Leadership)이다.
반면 세종의 통치 스타일은 육성과 균형이었다. 집현전을 만들어 젊은 인재를 키우면서 황희라는 균형추를 옆에 두었다. 황희의 저항이 세종의 정책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는 것을 세종은 알고 있었다. 변혁적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이다.

인재가 아무리 뛰어나도 조직의 전략 방향과 맞지 않으면 그 능력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는다. 박은의 원칙이 태종의 시대에 빛났던 것은 그 원칙이 태종의 전략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황희의 균형 감각이 세종의 시대에 빛났던 것은 그 감각이 세종의 필요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황희가 태종의 시대에만 있었다면 내보내진 채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태종이 황희를 내보내면서도 버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 당장 쓸 수 없지만 다음 국면에서 필요한 인재를 미리 보존한 것이었다. 인재 포트폴리오(Talent Portfolio) 관리의 원형이다. 박은은 태종의 시대와 함께 닫혔고 황희는 세종의 시대를 위해 남겨졌다.

모든 조직에는 박은이 있고 황희가 있다.

백돌형 참모는 원칙이 있다. 권력 앞에서 서명하지 않고 법도와 맞을 때만 앞장선다. 그 쓰임새는 특정 국면에 집중되고 그 국면의 주인과 함께 닫힌다. 흑돌형 참모는 유능하고 오래 간다. 균형을 잡고 브레이크를 건다. 결정적인 순간에 어긋나 판 밖으로 밀려나지만 버려지지 않고 다음 대국에서 다시 불린다.
리더가 참모를 볼 때 던져야 할 질문은 세 가지다. 지금 이 국면에서 필요한 것은 원칙인가 균형인가. 이 사람을 지금 쓰고 있는 것인가 다음을 위해 남겨두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지금 판 위에 올려야 할 돌과 판 밖으로 내려야 할 돌은 각각 누구인가.

태종은 박은으로 조선의 기초를 세우고 황희를 세종에게 남겨두었다. 백돌로 원칙의 집을 짓고 흑돌로 다음 판의 세력을 열었다. 그 판의 이름이 조선 오백 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