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9년 음력 12월 28일, 좌의정 허조가 눈을 감았다. 죽기 직전 그는 유언을 남겼다. "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세상에 죽으니 천지간에 굽어보아도 부끄러운 것이 없다. 간언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허조의 형 허주가 방에 들어갔을 때 허조는 혼자 웃고 있었다. 자세히 살피니 이미 빙그레 웃음을 띤 채 숨을 거둔 뒤였다. 허조는 일평생 할 말을 다 하고 살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같은 해 세종의 총애를 받던 총신인 정인지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는 1478년까지, 허조보다 무려 39년을 더 살았다. 83세까지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의 다섯 임금을 더 모셨다. 그러나 정인지의 만년은 허조의 마지막 웃음과 달랐다. 그는 술에 취해 임금인 세조에게 막말을 하고 의금부에 투옥되었는가하면 곧잘 치부 논란에 휘말렸다. 심지어는 꿈에 세종이 나타나 저주를 내렸다는 야사가 돌았다.
둘 다 세종이 기르는 새였지만 허조는 송골매였고 정인지는 두루미였다. 송골매는 날카롭고 빠르지만 두루미는 우아하고 오래 살며 바람을 타고 떄를 기다린다. 세종이 그린 하늘에는 두 날개가 다 필요했다.
허조의 증조부 허수는 성리학을 고려에 들여온 안향의 사위이자 아버지 허귀룡은 판도판서를 지냈다. 그는 여말선초의 대유학자인 권근에게 직접 학문을 배워 1385년 생원시, 1390년 공양왕 때 문과에 병과 2위로 급제하며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조선이 개국하며 태조와 태종시기 실무 경험을 쌓았다. 그런데 그는 시비를 가리길 좋아하고 원칙에 우선하였기에 임금인 태종에게도 직언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태종마저 처음에는 허조를 꺼리며 싫어했을 저옫이다. 그때 지신사(왕의 비서실장)이던 황희가 "전하께 직언할 강직한 신하도 두셔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할 정도였다. 이후 그는 이조정랑 등을 거쳤고 마침내 세종에게 태종이 선위하면서 "허조는 내 주춧돌이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에게는 별명이 하나있었다. 바로 수응재상(瘦鷹宰相)이다. 한글로 풀어 말하면 말라깽이 송골매 재상이라는 뜻이다. 서거정의 필원잡기에는 허조가 척추가 굽은 장애인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식사도 허기를 면할 정도로만 먹어 늘 깡마른 체격이었다. 또 다른 별명은 주공(周公). 예학의 전문가로 공식 석상에서 말할 때마다 주례를 들먹여서 붙은 비아냥이었다. 세종 치세 그는 나이도 50을 넘겼으니 그야말로 조정의 꼰대가 아닐 수 없었나보다.
그는 세종 치세에서도 반대를 통해 세종의 통치 질서를 완성했다. 바로 꼰대의 쓸모였다.
세종 즉위 초, 명나라 황제였던 영락제가 조선에 군마 1만필을 요구(라고 하지만 사실상 강요였다.)하자 “군마1만필은 곧 기병 1만명인데 국방이 위태로우니 주지 말아야 한다”라고 반대하는가하면 영락제가 죽을때 조선사람인 한씨도 순장당한 것을 듣고선 “공자께선 무덤에 넣을 흙인형을 만든 이도 후손이 끊길 것이라 했는데 궁녀 열 다섯을 순장한다니 대국이라 해도 반드시 배울 것이 못됩니다.” 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이조판서 시절에는 파저강 정벌을 두고 여진족 영토의 산세가 험하고 지금 군사를 급히 일으키면 적을 잡기는 커녕 적이 오히려 도망가 헛되이 공력만 쏟을 것을 걱정해 끝까지 반대했다. 물론 세종은 결국 정벌을 단행해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반대는 현지에서 병력을 모은 뒤 철저한 준비를 한 뒤 현장 지휘관들의 판단 하에 결정해야한다는 논리였다. 이는 어찌보면 전략적 시각으로 타당한 의견제시였다.
그는 또 세종이 즉위 초 추진하려던 부민고소법금지법에 대하여 다른 이들이 반대하자 홀로 상왕인 태종에게 이를 강력히 주청해 통과시키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내 편일땐 든든한 꼰대였다.
물론 그가 세종의 힘이 되어준것만은 아니었다. 어찌보면 그는 철저한 야당과 다름없었다. 그는 장영실 임용 문제에서는 다른 신하들이 모두 찬성하는 가운데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 원칙이 시대를 앞서갈 때는 송골매가 되지만 원칙이 시대보다 굳어 있을 때는 꼰대가 된다.
그러나 세종은 그를 미워하지도, 홀대하지도 않았다.
인사조직론에서 '악마의 변호인(Devil's Advocate)' 이론이 있다. 조직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Irving Janis)가 집단 사고(Groupthink) 연구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의도적으로 반대 의견을 내는 역할을 조직 내에 제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집단 사고에 빠진 조직은 모두가 같은 방향만 바라보다 틀린 방향으로 집단 전체가 려가는 일이 생긴다. 파저강 정벌도, 군마 요구도, 순장 비판도 허조는 그 역할을 자임했다.

그러나 허조가 단순히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현대 리더십 이론에서 '건설적 저항(Constructive Dissent)'과 '비생산적 저항(Destructive Dissent)'을 구분한다. 전자는 조직의 목표를 공유하면서 방법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고 후자는 조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허조는 전자였다. 세종의 통치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더 나은 통치를 위해 제동을 걸었다. 부민고소금지법처럼 옳다고 판단했을 때는 상왕에게까지 달려가 밀어붙였다.
세종이 허조를 미워하지도, 홀대하지도 않은 것은 이 차이를 알았기 때문이다. 건설적 저항자는 조직의 면역 체계다. 외부의 위험을 막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판단 오류를 걸러낸다. 조직이 단기적으로 불편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더 건강해지는 이유가 바로 이 면역 체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종묘 춘향대제에서 세종을 수행하던 그가 계단을 내려오다 넘어졌을 때 세종이 말했다. "이조판서가 상하지는 않았느냐." 그리고 계단 보수를 명해 계단을 넓혔다. 수도 없이 반대 의견을 낸 이조판서가 넘어지자 탄핵이 아니라 그의 안위부터 물었다. 세종이 허조를 어떻게 여겼는지 이 장면 하나로 충분하다.
정인지는 이런 허조와는 영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조선이 개국한 뒤 1396년에 태어났던 인물로 5세 때 이미 글을 깨우쳐 서책에 눈길만 스쳐도 외웠다. 7살에 소학을 깨우쳤고 13살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선비들 앞에서 강론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는 1414년 식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가 급제할 때 일화가 하나 있다. 당시 시험을 감독했던 하륜 등이 태종에게 장원을 뽑아주길 원했는데 ‘두 답안은 비슷하고 하나는 조금 처집니다.’ 라고 말했다. 그 말에 태종이 “과인이 집는 것이 장원이다.” 하며 뽑았는데 그것이 바로 정인지였다.

어찌 되었던 그는 이렇게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예빈시 주부를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 예조좌랑, 병조좌랑 등의 관직을 거쳤다. 그는 실무에서 행정 처리가 미숙함을 이유로 의금부에 투옥되는가하면 병조좌랑 시절엔 훈련 중 술을 먹는 짓으로 탄핵되기도 했다. 그런데도 태종은 세종에게 “정인지는 장차 크게 쓸 사람이다.” 라고까지 이야기한다.
그러다 세종이 즉위한 후 그는 예조판서, 이조판서, 예문과 대제학을 거치고 세종의 격물치지에 든든한 동반자로 자리한다. 오죽하면 세종은 "다른 신하들은 간의, 보루각 등의 제작에 있어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나 정인지만이 이를 함께할 수 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실록에는 세종이 산학계몽(계몽산)이란 수학책을 공부할 때 정인지를 불러 질문을 기다리게 해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천문과 역법, 칠정산 내편, 혼천의와 앙부일구 설계. 세종 시대의 과학 전반에 정인지의 손이 닿아 있었다.
정인지는 그 밖에는 새로운 공법(세금징수에 관한 법)을 위해 삼남(전라, 경상, 충청)의 모든 토지를 심사해 토지를 등급을 정하는가하면 김종서 등과 고려사의 편찬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정인지를 세종 시대에 새기는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역시 훈민정음이다. 해례본의 서문을 쓴 것이 정인지였다. 해례본 서문에서 그는 "중국의 글자를 빌어서 사용하는 것은 마치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낀 것과 같다." 이 비유 하나로 훈민정음 창제의 이유를 설명했다. 오늘날 한글날이 10월 9일이 된 것은 정인지가 서문을 쓴 날을 양력으로 환산한 결과다.
이렇게 세종 치세 전반에 걸쳐 세종의 분신이나 다름없던 그였으나 세종이 세상을 떠난 뒤 정인지의 선택은 달라졌다. 병조판서로 있던 그는 당시 정권의 핵심이었던 황보인의 전횡에 밀려 좌천당했다. 이후 세종시절부터 교분이 깊었던 수양대군 세력과 연결되며 그는 계유정난에 동조해 1등 공신에 올랐다. 그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단종의 폐위를 지지했고 단종의 목숨을 끊을 것을 적극 요청했다. 꿈에 세종이 나타나 저주를 내렸다는 야사는 이 행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세종의 총애를 가장 많이 입은 그가 단종 폐위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문이었을까. 세조 치세때의 그는 어느덧 원로로서 대접받았는데 세조의 불경 간행을 두고선 취중에 “이것은 옳지 못하다.” 며 말했다가 의금부에 투옥되는가하면 평안도를 시찰하고 돌아오던 잔치에서 풍수에 대해 이야기하다 “더 이상 얘기하면 풍수의 심오한 것을 얘기하게 되오니 전하께선 아마 잘 모르실겝니다. 이쯤 하지요.” 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로 인해 다음날 꾸중을 들었음에도 술을 먹고 세조에게 “너”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 외에도 세종시기의 정인지와 세조시기의 정인지는 같은 사람이 맡기는 한가 하는 생각이 들정도다. 어찌되었던 세조의 배려 덕에 그는 천수를 누려 1478년 향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성(文成). 그러나 성종실록 사관은 썼다. "재산 늘리기를 좋아하여 수 만석이 되었다. 이웃의 것까지 점유하였으므로 당시의 의논이 이를 그르다고 하였다."

대체 무엇이 그를 바뀌게 하였을까. 조직심리학에서 '리더-구성원 교환 이론(LMX: Leader-Member Exchange Theory)'이라는 개념이 있다. 그렉 그라엔(George Graen)이 제시한 이 이론은 리더와 구성원 사이의 관계 질(quality)이 구성원의 성과와 충성도를 결정한다고 설명한다. 높은 질의 LMX 관계에 있는 구성원은 리더로부터 더 많은 자원과 기회와 정보를 받고, 그 대가로 더 높은 헌신과 성과를 낸다. 세종과 정인지의 관계는 LMX 이론이 상정하는 최고 수준의 교환 관계였다.

그런데 LMX 이론에는 치명적인 취약점이 하나 있다. 리더가 바뀌면 그 관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는 것이다. 높은 LMX를 쌓아온 구성원이 새로운 리더 아래에서 자동으로 같은 지위를 유지하지 못한다. 세종과의 관계에서 최고 수준의 교환을 이루었던 정인지는 세종이 사라지자 그 교환의 상대를 잃었다. 새로운 구조에서 자신의 가치를 다시 증명해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선택한 방향이 세조였다. 어쩌면 세조를 어린 시절부터 지켜본 정인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런 모습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천재인 정인지가 천재인 세종에게 충성을 다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나이문제도 있었겠지만 세종의 사망 이후 정인지의 천재적인 재능은 그 자취를 감추고 만다.
허조는 브레이크였고 정인지는 엔진이었다. 정인지는 세종이 가려는 방향을 세종보다 먼저 이해하고 실무로 바꿨다. 허조는 세종이 너무 앞서나갈 때 반대 의견을 냈다. 그 제동이 물론 때로는 결과적으로 틀렸다. 그러나 제동 자체가 없었다면 세종도 사람이었기에 더 많은 실수를 했을 수도 있었다.

세종이 위대한 것은 훈민정음같은 그의 치적 때문만이 아니다. 허조가 반대할 때 듣고 정인지가 달릴 때 함께 달렸으며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었던 리더였기 때문이다. 세종은 송골매의 날렵함과 두루미의 우아함이라는 두 날개를 동시에 가진 하늘이 내린 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