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직이 커지고 직급이 올라갈수록 리더는 필연적으로 ‘완벽주의’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모든 것을 혼자서 다 잘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위임(Delegation)’이라는 아름다운 경영학적 단어로 배웁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수많은 조직과 리더들을 직간접적으로 지켜보며, 한 가지 위험한 징후를 자주 목격하곤 합니다.
내가 부족한 점을 인정한다는 핑계로, 리더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책임과 의무’까지 슬그머니 내려놓는 현상입니다.
"제가 그 분야는 약해서요, 김 팀장이 알아서 판단해서 진행하세요." "전 디지털 트렌드는 잘 모르니, 젊은 직원들 감각 믿고 다 맡기겠습니다."
처음에는 유연하고 권위적이지 않은, 이른바 ‘쿨한 리더’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실무자의 전문성을 존중하는 훌륭한 위임처럼 포장되기도 하죠.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냉정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그것은 위임(Delegation)입니까, 전가(Passing the buck)입니까? 아니면 혹시 포기(Abandonment)와 무책임(Irresponsibility)입니까?
진정한 위임과 책임 전가는 종이 한 장 차이 같지만, 조직에 미치는 파급력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위임(Delegation)은 '권한'을 나누는 것입니다. 실무자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의사결정의 범위를 열어주되, 그 결과에 대한 최종 책임(Accountability)은 여전히 리더 본인에게 있음을 명확히 하는 행위입니다. 실무자가 실패하더라도 리더가 방패가 되어주겠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전가(Passing the buck)는 '책임'을 넘기는 것입니다. 자신이 잘 모르거나 골치 아픈 영역이라는 이유로, 판단과 결과를 실무자에게 통째로 던져버리는 행위입니다. 일이 잘되면 리더의 안목 덕분이고, 일이 잘못되면 "네가 알아서 한다고 하지 않았냐"며 실무자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은 건강한 리더십의 출발점입니다. 하지만 "내가 부족하니까 너에게 다 맡긴다"가 "그러니 결과도 네 책임이다"로 이어지는 순간, 그것은 리더십의 직무유기가 됩니다.
특히 3040 중간관리자나 새롭게 리더 역할을 맡은 분들이 이런 함정에 자주 빠집니다. 실무자 시절 워낙 일 잘하던 분들이라, 본인이 잘 모르는 영역(예: 거시적 전략, 새로운 기술 트렌드 등)을 맞닥뜨렸을 때 오는 심리적 불안감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족한 영역을 보완하기 위해 전문가를 기용하고 타인에게 의지하는 것은 현명한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 영역에 대한 '이해'와 '방향성 제시'까지 포기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상호 신뢰라는 그럴듯한 명분 뒤에 숨어, 리더가 공부하기 싫어서, 혹은 책임지기 두려워서 선택한 '우아한 무책임'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우아한 무책임'이 최근 기업 내부에서 가장 극명하고 파괴적으로 드러나는 영역이 있습니다. 바로 생성형 AI(GenAI)를 활용한 업무 전환 프로세스입니다. 현재 대다수 기업의 현업에서는 AI를 다루는 실무자와 리더 간의 '역량 격차'와 '인식 차이'가 가파르게 벌어지고 있으며, 이는 심각한 리더십 공백을 낳고 있습니다.
30대 중심의 한 주니어 마케터 팀원들은 ChatGPT와 Claude를 활용해 시장 조사와 트렌드 리서치, 광고 카피 초안 작성 시간을 기존 대비 80% 이상 단축했습니다. 이때 AI의 메커니즘을 전혀 모르는 40대 팀장은 "난 기술은 잘 모르니 너희가 AI 돌려서 나온 최적의 결과물을 그대로 가져와라"라며 사실상 전권을 넘겼습니다.
문제는 AI가 도출한 결과물의 할루시네이션(정보 환각 현상)이나 내부 데이터 보안 리스크를 필터링할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조차 리더가 고민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기획안이 외부 리스크에 노출되었을 때, 팀장은 "AI가 뽑아온 데이터가 잘못된 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며 실무자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이는 기술 무지를 핑계로 리더의 핵심 의무인 '리스크 관리'를 포기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한 IT 기업의 인사이트 분석 부서에서 구성원이 생성형 AI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을 활용해 기존에 3일이 꼬박 걸리던 원시 데이터 코딩 및 시각화 작업을 단 3시간 만에 고도화하여 끝내왔습니다. 이를 본 리더의 반응은 두 갈래로 갈라지며 오작동을 일으킵니다. "AI가 다 해준 거니 자네 노력이 들어간 게 아니지 않나"라며 구성원의 리서치 및 도구 활용 역량을 폄하하거나, 혹은 "AI 쓰니까 이제 이 일은 10분이면 하겠네? 남는 시간에 다른 일 더 해라"라며 프로세스의 맥락을 무시한 채 무리한 노동 강도를 압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량 차이와 인식의 왜곡은 조직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구성원은 "우리 팀장은 업무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메커니즘도 모르면서 결과만 따진다"며 냉소적으로 변하고, 리더는 "실무자들이 툴 뒤에 숨어 요령만 피우고 깊이가 없다"며 불신하게 됩니다.
기술을 직접 실행할 줄은 모르더라도, 그 기술이 우리 부서의 일하는 방식과 리스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학습하기를 포기하는 순간, 위임은 무책임한 방조로 타락합니다.
타인의 역량이나 외부 도구(AI)에 의지하더라도, 리더가 조직과 구성원을 위해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의무가 있습니다.
질문할 수 있는 수준의 '맥락(Context) 파악' 내가 직접 프롬프트를 짜고 실행할(Execution) 수준의 기술적 숙련도는 없을지언정, 구성원이 들고 온 결과물이 우리 조직의 철학과 사업 방향성에 맞는지 검증할 수 있는 눈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모르면 실무자에게 "내가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이 데이터가 도출된 프로세스를 설명해달라"고 요청하며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리스크를 감당하는 '최종 의사결정' 실무자와 AI는 여러 대안(Options)을 정교하게 만들 수 있지만, 수많은 변수와 리스크를 감수하고 "A안으로 간다"고 최종 점을 찍는 것은 오롯이 리더의 몫입니다. "네가 전문가니까 네가 결정해"라는 대사는 실무자에게 과도한 압박감을 주어 조직을 마비시킵니다.
실패를 껴안는 '심리적 안전감 제공' 새로운 기술이나 타인의 역량에 의지해 진행한 프로젝트가 실패했을 때, "내가 지식이 부족해 리스크를 더 면밀히 살피지 못했다"며 구성원 앞과 경영진 앞에서 스스로를 방패로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책임의 무게를 지는 것이 리더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족해서..."라는 말이 리더십의 면죄부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위임'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다시 한번 무겁게 되새겨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 조직의 ‘위임’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혹시 위임의 탈을 쓴 '포기'나 '전가'는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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